어린이의 지성과 어른의 환상
- 김서정
C. S. 루이스를 그저 [나니아 이야기]의 작가로만 알고 있던 나는, 안소니 홉킨스가 루이스 역을 맡았던 영화 「섀도우 랜드」를 보면서 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자세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강연에서 고뇌에 찬 얼굴을 보여 주면서 고통에 관한 기독교적 메시지를 아주 쉬운 언어로, 그러나 심도 깊게 전달하는 장면이 유난히 내 가슴을 쳤던 것이다.
그런 뒤 나는 루이스가 동화작가이기 이전에 뛰어난 영문학자이자 종교사상가였으며 완벽하게 적절한 문체를 구사한 문장가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자로 교육받으며 자라났지만 청소년기부터 무신론에 빠져 있다가 30세 무렵 극적으로 회심한 루이스는 에세이와 사이언스 픽션을 비롯한 소설, 동화에서까지 자신의 종교관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피력한다. 「사자와 마녀와 옷장」을 비롯한 일곱 권의 [나니아 이야기]를 제대로 읽는 방법은, 그 안에서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모티프를 발견하고 그것이 다른 요소들과 엮이는 행로를 따라가는 일일 것이다.
그 외에 「섀도우 랜드」에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있다. 루이스가 동화를 썼다는 것을 알게 된 케임브리지 대학의 동료 교수들이 늙은 독신남인 그를 둘러싸고 놀려 댄다.
“동화라니! 대체 자네가 어린이를 하나나 알기나 하나?”
루이스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능청스럽게 받아넘긴다.
“최소한 둘은 알지. 나하고 우리 형.”
루이스의 평생의 동반자(?)였던 세 살 위인 형은 어린 시절부터 인생 뿐 아니라 환상 세계의 동반자이기도 했다. 어린 형제는 벨파스트의 저택에서 왕성하게 책을 읽으며 동물의 나라와 인도라는 나라를 상상하고 그 상상을 글과 그림으로 옮기곤 했다고 한다. 루이스는 중학교 때 몸이 아파 쉰 적이 있는데 그 때도 북구, 지중해의 신화와 동화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의 가공할 만한 상상력은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충분한 양분을 받아 자랐던 것이다. 그 어린 시절을 잊지 않고 자기 안의 어린애를 간직했던 루이스는 ‘진정한 어린 아이의 지성’을 가진 사람이었고, ‘모든 사람들이 순수함에 대해서 말하지만 정작 순수함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순수한 사람의 표본’이었다.
루이스와 그의 동화에 관해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J. R. R. 톨킨이다. 옥스포드 대학 시절 동료였던 톨킨은 루이스가 기독교로 돌아오게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루이스는 톨킨이 쓰고 있던 [반지의 제왕]에 열광하고 있었으며 톨킨이 그 장엄한 판타지를 끝마치는 데에는 루이스의 관심과 격려가 큰 몫을 차지했다고 한다.
루이스는 톨킨을 격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도 판타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ꡔ나니아 연대기ꡕ의 첫 작품인 「사자와 마녀와 옷장」이다. 마음을 조이며 건네 준 원고를 읽은 톨킨의 반응이 그다지 신통치 않아 루이스는 적지않이 낙담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른문학에서는 [반지의 제왕]으로 시작된 하이 팬터지의 전통이, 어린이문학에서는 루이스의 [나니아 이야기]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평가된다.
루이스가 뚜렷하게 제시해 놓은 2차세계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의 치열한 대결이라는 구도는 매들렌 렝글, 수잔 쿠퍼, 어슐러 르 귄 등의 팬터지로 이어진다.
[나니아 이야기]는 반지 제왕에 비하면 좀더 ‘설교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첫 작품인 「사자와 마녀와 옷장」에서만 해도 루이스는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의 환상을 배경으로 한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생각이었다. 좋은 이야기 들려주기. 그것은 루이스가 ꡔ나니아 연대기ꡕ를 쓴 첫 번째 목적이었다.
사자는 루이스가 어린 시절 거듭 꾸었던 무서운 꿈에 나오는 동물이었고, 한 손에 짐을, 다른 손에 우산을 들고 눈 덮인 숲 속을 걸어가는 파우누스는 어렸을 때 그림에서 본 장면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권이 거듭되면서 루이스는 ‘사물의 기독교적 존재 방식에 대한 유추’를 보여 주고 싶어했다. “만일 나니아 같은 나라가 있다면 거기서 예수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어떻게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칠 것이며 어떻게 부활할 것인가?”를 그리는 것이 그의 목표가 되었다. 그리하여 사자 아슬란은 명백한 그리스도의 표상이 되었다. 나니아 나라로 간 아이들이 그 곳에서 보고 듣고 겪는 사건들은 기독교적 상징으로 읽힐 수 있다. 사자 아슬란의 죽음과 부활을 비롯하여 아슬란이 세상을 창조하는 장면, 마녀 제이디스가 디고리에게 아름다운 정원에서 사과를 따먹도록 유혹하는 장면, 끈질기게 되살아나 아슬란의 백성을 유혹하고 전쟁으로 끌어 내는 악의 세력, 아슬란의 발자국에서 솟아나는 물, 영원하고 유일한 생명수에 대한 비유 등등, ꡔ나니아 연대기ꡕ에는 명백한 모티프에서부터 희미한 암시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적 코드가 산재해 있다.
그러나 기독교적 코드만이 전부였다면, 그리고 그것이 전면에 나섰다면, 이 책은 그저 알레고리로만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풍요롭고 광대하며 생생한 환상의 나라가 나니아에는 펼쳐진다. [반지의 제왕]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외에는 달리 견줄 영역이 없는 상상의 나라와 인물을 루이스는 창조해 냈다. 그 안에는 북구와 남구의 온갖 신화의 조각이 들어 있고, 동방풍 이야기와 중세 이야기의 경향도 보이며, 루이스가 어려서부터 탐독했던 한스 크리스찬 안데르센, 에디스 네스빗, 조지 맥도날드, 루이스 캐럴 등 위대한 작가들에게서 받은 영향이 녹아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자신이 후세 동화 작가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 중의 하나가 되었다. 가까운 예로, 캐더린 패터슨의 뉴베리 상 수상작인 [비밀의 숲 테라비시아]에는 [나니아 이야기]를 읽고 자신들만의 (상상의) 왕국을 세우려는 두 아이들이 나온다.
‘테라비시아’라는 이름도 나니아에 나오는 ‘테레빈시아’의 변형이며, 주인공이 죽는 ‘동화답지 않은’ 결말도 아이들 넷이 모두 기차 사고로 죽는 나니아의 결말과 맥을 같이 한다.
루이스가 이런 기독교와 각종 신화 모티프를 끌어들여 다른 동화적 소재들과 함께 버무린 ‘동화’를 쓴 이유는, 아마도 독자들이 그 기독교와 신화 세계의 원리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톨킨은 나니아 이야기가 ‘너무 알레고리적’이라며 비평했다지만, 루이스는 오히려 이 이야기에서 성경적인 분위기를 흐리게 하려고 애를 썼다.
아슬란의 행적이나 새롭게 창조된 나니아 나라에 악이 들어오게 된 배경 같은 것들은 신학적 관점으로 설명하기 어렵거나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첫 번째 책인 「사자와 마녀와 옷장」에서 아슬란은 불쑥 나타나서 충분한 개연성 없이 대속적 죽음을 맞는다. 아슬란이 예수의 표상이라는 것을 아는 독자들도 그 죽음에 대해서는 어리둥절해진다. 그런데 감동은 그렇게 독자들이 어리둥절하고 방심한 틈을 타서 일어난다. “실제 복음서를 읽으면 우리가 어떻게 느껴야만 한다는 선험적인 지식 때문에 오히려 감동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 루이스의 생각이었다. 명백하면서도 혼돈스러운 이야기, 뭔가 빈 듯하다 갑자기 모든 일이 터지는 이야기. 그 모순을 통해 루이스는 오히려 우리가 사는 세계와 우주와 나니아 나라 자체를 더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 세계들의 원리는 단순하고 명백하지만, 현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 복합적인 상황을 루이스는 풍요로운 환상을 통해 독자에게 인상적으로 각인시켜 준다.
이 작품들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또 하나의 요인은, 시시때때로 나오는 유머 감각에 있다. 「말과 소년」에서 아슬란이 난폭하고 비열한 라바다슈 왕자를 당나귀로 만들어 버리는 장면, 「마법사의 조카」에서 동물들이 기절한 앤드루 삼촌이 식물인지 동물인지 광물인지를 놓고 입씨름하다가 나무로 단정하고 땅에 심어 놓은 뒤(어느 쪽이 뿌리인지를 두고 또다시 입씨름이 벌어진다. 무성한 머리카락 부분이 뿌리일 거라는 판단도 있지만, 다행히 흙이 많이 묻은 두 갈래 부분 쪽이 우세해 다리가 심어진다) 축 처진 이 나무를 살리기 위해 코끼리가 물을 열심히 길어 뿌려 주는 장면(그 노력 덕분에 ‘나무’는 다시 꼿꼿이 살아난다), “좀더 편하게 싸움을 계속하려고 결혼을 했다.”는 선언 같은 유머러스한 대목들을 통해 루이스는 자신의 메시지에 독자가 무감각하게 맹목적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는다. 객관적인 거리감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장렬한 서사적 사건과 엄숙하고 무게 있는 기독교적 메시지에 끼여드는 우스꽝스러운 코미디와 가벼운 풍자들을 보면 우리는 루이스가 얼마나 경직된 자기 몰입을 경계했는지 알 수 있다. 지옥을 “모든 사람이 끊임없이 자신의 위엄과 진보에 관심을 쏟으며, 모든 사람이 불만을 가지고 있는 곳”으로, “모든 사람이 죽을 듯한 질투와 자기애 그리고 분노에 사로잡혀 사는 곳”으로 보았던 그는, “지옥에서 결코 볼 수 없는 것”으로 유머를 들었다.
유머 감각은 “자기를 비웃을 수 있는 마음”과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균형과 능력”에서 생겨난다. 과연, 나니아를 지옥 같은 곳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마녀와 침략자들에게는 하늘을 찌르는 자만심과 분노 외에 다른 것이 없다.
반대로 나니아를 지켜 나가는 인물들 주위에서는, 토끼와 고슴도치 같은 작은 동물에서부터 아슬란에 이르기까지 경쾌한 유머와 장난이 맴돈다. 무엇보다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도중에 끊임없이 뛰어들어 간섭을 하고, 사족 같은 해석을 달고, 어깃장을 놓기도 하는 화자의 말투가 장난스럽다. 자칫하면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진실성을 훼손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 장난기는, 말년의 루이스가 혼신의 힘을 다해 피력한 변신론조차 스스로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보고자 하는 균형 감각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덕분에 나니아 연대기는 아이들에게 버거운 기독교 알레고리가 아니라 풍성하고 재미있는 환상의 세계가 될 수 있었다.
동화, 특히 팬터지가 현실을 왜곡시키고 현실에서 도피하게 만든다는 비난을 던지는 사람들을 향해 루이스는 강력한 팬터지 옹호론을 펼쳤다.
“동화는 신화처럼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 세계의 대한 새로운 차원의 깊이를 제공해 준다.”는 것이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이 현실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통찰과 의미 부여를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볼 줄 알고 그 두 세상 사이의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상상력의 힘이라는 것을 루이스는 가르쳐 준다. 실재란 과연 무엇인가. 아이들에게, 너희가 가지고 있는 실재의 개념은 단지 꿈일 뿐이라고 마술을 거는 마녀를 향해 퍼들글럼이 하는 연설은 바로 루이스가 경직된 현실주의자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네 말대로 우리는 단지 장난이나 꾸며 대는 아이들이라고 하자. 그러나 장난을 하는 네 명의 아이들은 네가 말하는 그 빈 깡통 같은 진짜 세계를 이길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놀이의 세계를 지지할 거야. 아슬란이 없다고 해도 아슬란의 편에 설 거야. 나니아가 없다고 해도 최대한 나니아인처럼 살 거야.”
김서정
아동문학평론가이며 동화작가. 동화집으로 [유령들의 회의]대원사)가 있고, 평론집 [용의 아이들], 동화책 [잃어버린 기억]들을 번역했다.
출처 월간 어린이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