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로 리뷰

세기의 음화가 감춰둔 여인의 삶
음악, 미술, 건축 등 예술 작품을 화두로 삼은 이야기는 꽤 있다. 해당 예술가의 인생편력이 기구할수록, 그리고 그의 작품이 구구절절 인구에 회자될수록 그를 둘러싼 구설수는 더욱 무궁무진한 법. 우리나라의 천재시인 이상은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세상의 근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만날 차례다. 19세기 프랑스의 화가 쿠르베에 의해 그려진 이래 130년 동안 어둠과 비밀 속에 묻혀 있었다는 한 점의 그림.

'휘슬러의 무덤 앞에 있으니까 문득 무엇인가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났다.'
크리스틴 오르방의 소설 「세상의 근원」은 이렇게 시작한다. 소설의 화자는 아일랜드 출신 모델 조안나 히퍼넌. 그녀는 19세기 유럽에서 활동한 두 명의 화가 휘슬러와 쿠르베의 연인이었다. 이쯤에서 독자들은 이 소설을 두 명의 예술가와 모델 사이의 그 흔한 삼각관계쯤으로 짐작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삼각관계는 단지 130년 동안 숨겨져 왔던 쿠르베의 그림 '세상의 근원'을 빛내기 위한 소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 소설은 여성의 음부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쿠르베의 그림 '세상의 근원'이 그려지는 과정과 그 음부의 주인인 직업모델 조안나 히퍼넌의 내면적 풍경을 그녀의 독백으로 담고 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세상의 근원'이라는 그림이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다. 하나는, 가로 55센티미터, 세로 46센티미터짜리 작은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숨이 멎어버릴 듯 사실적으로 묘사된 여성의 음부라는 것. 다른 하나는 너무나 충격적이며 파격적이라는 이유로 헝가리로, 독일로, 소련으로 떠돌다 최종적으로는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에 의해 비밀리에 소장되고 있었다는 것. 그러나 이 소설의 저자는 그림 자체보다는, 모델로서, 여성으로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그로 인해 모델이 아닌 창녀라는 소문에 시달려 스스로를 은폐한 채 살아야 했던 한 여성의 내면적 풍경에 방점을 찍고 있다.

"나는 쫙 벌린 당신의 두 다리를 갖고 싶어. 진열대 위에 있는 것처럼 내 눈앞에서 전시된 당신의 음부를 갖고 싶어. 난 당신의 음부를 보호하고 간직하고, 도망가지 못하게 몰래 가두고 싶어. 그 음부가 바로 나로 인해서 망가지고 으스러지고 무릎꿇고 파멸하기를 원해."(p.83)

이 같은 쿠르베의 제안 앞에서 조안나 히퍼넌이 느낀 건 공포와 치욕과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배신감, 그리고 여인의 음부를 그리는 것을 그림의 완성이자 사랑의 완성으로 여겼던 쿠르베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치밀하고 다소 끈적끈적한 문장으로 이러한 그녀의 심리를 고스란히 독자들의 가슴속에 옮겨 심는데 성공한다.

"나는 두려웠다. 그 순간에, 나는 그가 내 몸에서 살점 한 조각을 떼어 내어 자기 팔레트에 넣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귀스타브는, 정말로, 다시 일어섰다. 내 앞에 서서는, 마치 악마처럼 그 자리에 박힌 듯 꼼짝 않고 서서는, 내 배를 흘끗 훑어보면서 한쪽 검은 눈으로는 내 다리 사이의 작은 주름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이었다."(p.138)

이 책의 저자 크리스틴 오르방은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 그리고 그 속에 감추어진 사랑을 재조명하는 작품창작에 주력해온 프랑스의 작가. 표지부터 시작하여 첫 번째,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책장을 넘기면 문제의 명작 '세계의 근원' 복사본이 드디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제발 그림에서 눈을 거둬 이제 이 소설 자체에 몰입해보자. 그러면 문제의 그림과 화가의 욕망에 묻혀 한평생을 '치욕'과 '은폐' 속에 살아야 했던 한 여성의 숨은 영상이 슬그머니 떠오르리라.(이현희 / 리브로)


 
지은이 소개

크리스틴 오르방(Christine Orban) - 예술가들의 삶을 추적하며 그들의 작품 속에 나타난 사랑, 광기, 예술혼을 재구해 가는 그녀의 글에는 쿠르베의 그림만큼이나 강렬한 열정이, 외젠 앗제의 사진과 같은 후미진 삶과 세월의 흔적이, 앙드레 가뇽의 '모놀로그'와 같은 잔잔함이 녹아들어 있다. 작가는 단 예술가의 작품으로부터 단서를 하나씩 발견해 나가며, 뒤엉킨 실타래 풀 듯 사라져서 흔적마저도 희미해진 인물들과 사건들을 차분히 추적해 나가는 수법과 간결하고 시적인 문체, 날카로운 심리 포착을 통해 독자들을 창작의 현장으로 이끌고 간다.

그녀는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으며, TV에도 모습을 자주 내비치는, 독자들과 친근한 작가이다. 또한 '파리 마치'에도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작품으로는「소녀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버지니아 울프의 사랑의 시간」「불륜의 여자」「수집가」「사랑의 광기」, 자전적 소설「내게 딱 맞는 친구」「내 마음의 중심」「기다림」「응가로」등이 있다.

함유선 -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발레리의 시에 나타난 자아 탐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에 출강 중이다. 역서로는 자크 프레베르의「붉은 말」, 장 그르니에의「섬」「지중해의 영감」「그림자와 빛」, 피에르 장주브의「절망은 날개를 달고 있다」등이 있다.

 

 

책 표지 글
「세상의 근원」은 대체 무엇인가? 왜 자크 라캉은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세상의 근원」을 1백 50만 프랑이나 주고 샀는가? 19세기 유럽에서 화제가 되었던 「세상의 근원」은 왜 1백 30년 동안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는가? 쿠르베와 휘슬러의 그림에 등장하는 붉은 머리의 모델은 과연 같은 인물인가?

어느 날 쿠르베는 그녀에게 자신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게 되는데, 두 사람의 사랑을 예감하게 된 휘슬러는 그녀를 떠나게 되고, 그녀는 쿠르베의 연인이 된다. 터키 대사이자 엄청난 부호였던 칼릴 베이의 부탁으로 쿠르베는「세상의 근원」을 그리게 되고, 연인으로서의 귀스타브의 시선과 화가로서의 쿠르베의 시선의 간극을 견딜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그를 떠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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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키웨이 2004-06-18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리뷰보다 리브로 리뷰가 더 재미있어서 옮겨왔어요.
이러다 방빼! 라고 하심 우짜죠?

panda78 2004-06-18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 그럴리가- 밀키님 가심 따라 갈 사람들이 몇인데요!
근데, 그 잠자는 여인들의 다리 척 걸친 갈색 머리 여자도 조안나라면서요.

panda78 2004-06-18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퍼가요--- ^^

밀키웨이 2004-06-18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메...그래요?
우연인가 ? 아닌가? ㅋㅋㅋ

panda78 2004-06-18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 아니겠죠.. 모델 많이 섰겠지요..
휘슬러가 잠시 어디 간 동안 <잠(그 그림)>의 모델을 섰는데, 휘슬러가 나중에 그 그림보고
꽤나 분노했다죠. 아마 찾아보면 조안나가 많을 듯. ^^

밀키웨이 2004-06-19 0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그럼 꽤나 재미있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을 거 같아요.
판다님~~~
왜 부를까~~요?
비하인드 스토리에 또 목숨거는 밀키...^^

loveryb 2004-06-23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방빼라고 했다간..
알라딘 큰일 날껄요!~~
저역시 밀키님 뒤에 숨어서 듣고 싶은 비하인드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