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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은 융경 신미년에 태어나서 열다섯에 우리 집으로 시집을 왔다. 성품이 근실하면서도 질박하여 꾸밈이 없었다. 길쌈에 부지런하여 조금도 나태함이 없었으며, 말을 입에서 내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 모부인 섬기기를 매우 공손히 하여,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몸소 인사를 여쭈었으며 진지는 반드시 맛을 보고 올렸다. 계절이 되면 시절 음식을 공궤함이 매우 풍성하였다. 종을 대하는 것은 엄하면서도 관대하였고 험악한 말로 꾸짖는 일이 없었다. 모부인께서도 칭찬하면서 "내 어진 며느리"라 하셨다.

내가 한창 어린 나이에 마구 놀러 다니기를 좋아했는데, 얼굴에 싫은 빛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 조금이라도 마구 행동하면 문득 이렇게 말하곤 했다.
"군자가 처신하는 것은 마땅히 엄해야 합니다. 옛사람은 술집이나 찻집에도 들어가지 않는 분이 있었다는데, 하물며 이보다 더한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내가 듣고 마음에 너무 부끄러워 조금이나마 자제하곤 했다. 그이는 항상 내게 공부를 권면하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대장부가 세상에 나매 과거급제를 해서 높은 벼슬에 올라 어버이를 영광스럽게 해 드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이로운 것 또한 많은 법입니다. 당신의 집은 가난하고 시부모님 또한 연로하신, 재주만 믿고 허랑하게 세월을 보내지 마십시오. 세월은 빠르게 지나가니, 후회한들 어찌 돌이킬 수 있겠습니까?"

임진년 왜적을 피해 피난하던 시절, 바야흐로 임신하여 곤고한 몸으로 단천에 이르러 7월 초이렛날 아들을 낳았다. 이틀 후 왜적이 갑자기 쳐들어오자 순변사 이영은 마천령으로 물러나 수비를 하였고,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그대를 이끌고 밤을 도와 마천령을 넘었다. 임명역에 이르자 기운이 없어 말도 못하였다. 그때 같은 성씨였던 허형이 우리를 맞아 함께 바다의 섬으로 피난하였지만, 거기서 머무를 수가 없었다. 억지로 산성원의 백성인 박논억의 집에 이르러, 초열흘날 목숨이 다했다. 소를 팔아 관을 사고 옷을 찢어 염습을 했으나, 살갗이 상기도 따스하여 차마 묻질 못했었다. 얼마 후 왜적이 성진창을 공격한다는 말을 듣자 도사공이 급히 명하여 뒷산 언덕에 묻으니, 그대 나이 스물 둘이요 나와 함께 산 지 무릇 8년이었다.

아, 슬프다! 그때 낳은 아들은 젖이 없어 일찍 죽고, 처음 낳은 딸 하나는 자라서 진사 이사성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과 딸 각 하나씩 낳았다. 기뉴년 내가 당상관에 승직하여 형조참의를 제수받았는데, 관례에 따라 숙부인으로 추증하였다. 아! 그대의 아름다운 행실로 중수도 누리지 못하고 후사도 끊어졌으니, 하늘의 도 역시 짐작하기 어렵다.

바야흐로 곤궁했던 시절에 그대와 마주하여 등잔불을 돋우면서 반짝반짝 밤을 새워 책을 펴고 읽었다. 조금이라도 싫증을 내면 그대는 꼭 농담을 던지곤 했다.
"게으름 피지 마세요. 저의 숙부인 첩지가 늦어집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다만 한 장 텅빈 교지를 그대 영전에 바치고 그 영화로움을 누리는 자는 나와 머리 틀어올려 부부가 된 애초의 짝이 아니라는 것을. 그대 만약 앎이 있다면 또한 필시 탄식하고 슬퍼할 것이다. 아, 슬프도다! 을미년 가을, 함경도 길주에서 돌아와 강릉 외가에 묻었다가 경자년 3월 선부인을 따라 강원도 원주 서면 노수에 길이 안장하니, 그 묘는 선영 왼쪽에 있고 인좌 신향이다. 삼가 행장을 쓴다.


허균 부인의 농담이 정겨워, 또 그 농담을 행장에 옮겨적기까지 20년을 삭여두었던 허균에게 뭔가 위로를 전해야 할 것같아 근무시간인 줄 알고서도 옮겨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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