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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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주인공 허삼관의 8번의 매혈과 같은 숫자만큼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있다. 읽는 이들도 같은 숫자만큼 울고 웃는다. 빙긋 웃음이 안되고 터져나온다. 눈물은 엄지로 찍어내지 못하고 손등을 동원해야 할 분량이다. 그것 참! 이렇게도 풀어내는구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엎어치고 메치고, 얼르고 뺨때리는 에피소드들. 어처구니없음에도 불구하고 천연덕스러운 대화들. 비루하다는 느낌 들지 않았다. 달리 말할 수 없음을 알겠다. 그래서 울었다, 웃는 동안에. 매사 진지하고 품위고수하려는 우리네 사는 모양, 나누는 대화들 찬찬히 뜯어보면 허삼관으로부터 반뼘도 벗어나있지 못하리라고 불안했다. 이런 남루한 에피소드들, 천박한 대화들에 공감(나아가 일체감)을 느낀다니. 억울해!

가족을 위해 피를 판다는데야 아버지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돼지간볶음에 황주 두냥(이거 파는 중국집 있나요?) 대신에 좋아하시는 전어회에 쏘주(전어회에 먹는 건 소주가 아니라 쏘주다) 한잔이 좋겠다. 뭐... 죄송하다고 해야 할까? 부모노릇 자식노릇 다 해본 사람들끼리 그런 얘기 하는 거 아니다 하시겠고.

이 소설 헷갈린다. 가족소설? 무슨 가족소설의 주인공이 엔딩에서 돼지간볶음에 황주 병째 차고 앉아 좆털이나 논하겠는가. 현대의 영움담인가? 사실 마음 무겁게 짓누르는 어떤 것을 빼면 깜량은 딱 영화 리틀빅히어로다. 비행기 승객을 수백명 구했으니 리틀한 더스틴 호프만은 '빅'해진 건 확실한데, 허삼관의 매혈은 무엇이길래 가슴이 이리도 무거운가?  현대영웅들은 다 제집 방구석에서 제 가족이나 구해대고 있다며 당신도 달아보라고 건네는 훈장이 줄 수 있는 무게가 아니다. 어쨌든 가족들을 구했쟎나구? 핏! 일락, 이락, 삼락이 없고 (그래서) 피 팔러 나서지 않아도 되었다면 허삼관의 인생은 또 어디에 소용했겠느냔 말이다. 

대중소비문화의 조류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한국작가들에 대한 견해를 묻은 질문에 위화, 가라사대 "그가 정치적 인간이든 대중소비적 인간이든 사람을 이해할 수 잇는 작가라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랬다. 그냥 사람얘기인가보다 한다. 위화의 나머지 책들을 마저 보면서 곰곰 생각해보야겠다.  

소설에 의하면 12월7일은 허삼관씨의 생일이다. 김가네삼겹살에 가서 삼겹살에다 쏘주 시켜놓고 조촐하나마 축하해 주고 싶다. 비루하지도 않은 게 무슨 인생이냐고 허삼관에게 맞장구치겠다. 눈썹보다 늦게 난 주제에 자라기는 길게 자란 좆털들 흉도 좀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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