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복종에 관하여
에리히 프롬 지음, 김승진 옮김 / 마농지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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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편한 단어 '불복종', 그 이면의 진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순종'을 미덕으로, '불복종'을 악덕으로 배웠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에게 저항하거나 불복종하는 행위는 본능적인 불편함을 동반한다. 사회는 기존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삐딱이' 혹은 '반항아'라는 낙인을 찍어 소외시킨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은 이 견고한 통념을 비틀어 다시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과연 복종은 언제나 선이고, 불복종은 언제나 악인가?

프롬은 인류 역사의 시작을 '불복종'에서 찾는다. 아담과 이브가 신의 금기를 깨고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그들은 낙원에서 추방당했지만, 그 대가로 눈을 떴고 이성을 가진 독립적인 인간이 되었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었을 때, 문명은 시작되었다. 신화적 관점에서 볼 때 불복종은 타락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껍질을 깨고 나와 비로소 '자유'와 '이성'을 획득하는 해방의 몸짓이었다. 다시 말해, 불복종은 인간이 더욱 인간다워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다.


2. 권력은 어떻게 복종을 '미덕'으로 만들었나

인류가 계급 사회를 형성하고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게 되면서, 지배층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교묘한 심리적 기제를 만들어냈다. 바로 '복종은 선, 불복종은 악'이라는 도덕적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 속에서 권력에 대한 복종은 신성한 의무가 되었고, 불복종은 처벌받아 마땅한 죄악이 되었다. 이러한 복종의 습관은 핵무기 버튼을 누르는 군인의 손끝까지 지배하며, 인류를 공멸의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는 맹목적인 복종으로 진화했다.

프롬은 냉전 시대의 두 체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방식만 다를 뿐 결국 인간을 복종시킨다는 점에서 같다고 비판한다. 공산주의(소련)가 무력과 철권통치로 인간을 강제로 굴복시킨다면, 자본주의는 훨씬 더 세련되고 은밀한 방식으로 우리를 복종시킨다. 텔레비전과 광고, 여론이라는 보이지 않는 최면술사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더 많이 소비하라", "유행을 따르라"고 속삭인다.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상은 거대한 기계 장치의 부속품처럼 시스템이 요구하는 욕망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3. 2026년, 여전히 유효한 '인본주의적 사회주의'의 외침

프롬이 이 글을 쓴 1960년대와 내가 살고 있는 2026년의 풍경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인간은 여전히 조직의 논리에 휘둘리고, 물질만능주의라는 거대한 신전 앞에서 무릎 꿇고 있다. 기업이나 관료 사회에서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생존을 건 모험이 된다.

프롬이 대안으로 제시한 '인본주의적 사회주의'는 단순히 정치 체제를 바꾸자는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물질이나 기계, 혹은 국가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사회의 모든 시스템이 '인간의 성장과 행복'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선언이다. 60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그의 외침이 여전히 내 가슴을 때리는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소유'와 '복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불복종은 파괴가 아니다. 그것은 맹목적인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나의 이성과 양심에 따라 '진정한 나'로 서겠다는 실존적 결단이다.


<같이 생각해요>

1. 양심적 불복종:학교나 직장에서 비합리적인 지시를 받았을 때, 우리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침묵하는 다수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는 무엇인가?

2. 자율적 복종:프롬은 '타율적 복종(권력에 대한 굴종)'과 '자율적 복종(자신의 양심과 신념에 대한 따름)'을 구분했다. 내가 지키고 있는 규율들은 타인의 강요인가, 나의 선택인가?

3. 현대판 우상: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맹목적으로 복종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권력'은 무엇인가? (예: 돈, 성공, 타인의 인정, 알고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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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 동녘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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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삶에 찾아온 두 번째 혁명가 나의 청춘을 지배했던 첫 번째 혁명가가 쿠바의 푸른 악어 '체 게바라'였다면, 중년의 길목에서 만난 두 번째 혁명가는 조선의 붉은 호랑이 '김산'이다. 이것은 단순히 누구를 먼저 만났느냐의 순서 문제가 아니다. 체 게바라가 이상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동경의 대상이었다면, 김산은 짓눌린 현실 속에서도 끝내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켜낸 연민과 공명의 대상이다. 쿠바에 체가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김산이 있었다. 아니, 김산은 체 게바라보다 더 혹독한 식민지의 어둠과 망국의 설움 속에서, 더욱 처절하게 자신의 신념을 증명해 낸 인물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실패한 혁명가였으나, 자기 자신에게는 승리했던 한 위대한 영혼에게 깊은 존경을 보낸다.

2. 짓눌린 현실을 넘어 광야로: 혁명의 시작 식민지 조선의 현실은 거대한 바위처럼 우리 민족을 짓누르고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이 그 무거운 현실에 순응하거나 체념할 때, 김산은 안락한 집을 떠나 거친 만주와 중국 대륙으로 뛰어들었다. 열네 살의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길이었지만,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거친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중국 혁명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찾고자 했다. 광둥꼬뮌의 황포군관학교에서 군사학과 정치학을 배우며, 그는 단순히 총을 드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 있는 혁명을 꿈꾸었다. 광둥 봉기의 참혹한 실패와 수많은 동지의 죽음 앞에서도 그는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하이루펑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펑파이가 이끄는 농민 소비에트의 기적을 목격했다. 흙투성이 농민들이 주인이 되어 세상을 바꾸는 현장에서, 김산은 조선의 농민 혁명이라는 희망의 불씨를 발견했다. 그에게 혁명은 책상 위의 이론이 아니라, 피와 땀이 흐르는 처절한 삶의 현장이었다.

3. 소금 인형의 두려움과 치열한 자기 단속 이 책에서 가장 마음을 울리는 부분은 김산이 느꼈던 '소금 인형'의 두려움이다. 그는 중국 혁명이라는 거대한 바다 속에서 조선인 독립혁명가라는 정체성이 소금 인형처럼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봐 끊임없이 불안해했다. "나는 중국 혁명을 위해 싸우지만, 나의 조국은 조선이다." 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가혹하리만치 철저한 '자기 단속'이었다. 편안함에 길들여지면 마음이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김산은 이 자연스러운 마음의 흐름을 거스르기 위해 매 순간 자신을 채찍질했다. 중국인들 틈바구니에서 조선의 독립을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기 위해 그는 끝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다잡았다. 상하이에서의 활동, 그리고 죽음 직전까지 이어진 그의 투쟁은 밖으로는 일제와의 싸움이었지만, 안으로는 나태해지려는 자신과의 치열한 전쟁이었다.

4. 패배를 통해 완성된 승리 김산은 저자인 님 웨일스에게 담담하게 고백한다. "나의 일생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나는 역사에게 패배했다." 표면적으로 그의 말은 맞다. 그는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했고, 믿었던 동지들에게 오해를 받아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꿈꾸었던 혁명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러나 그는 곧이어 덧붙인다. "하지만 나는 단 하나, 나 자신에게는 승리했다." 이 말은 내 가슴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잃었어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다면, 그것은 패배가 아니다. 그는 상황에 굴복하지 않았고, 비겁하게 타협하지 않았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걸었다. 결과로서의 성공이 아니라, 존재로서의 승리. 이것이야말로 김산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일 것이다.

5. 어제의 나를 이기는 오늘의 다짐 20여 년 전, 뜨거웠던 2000년의 여름을 기억한다. 당시 《체 게바라 평전》을 읽으며 다이어리에 꾹꾹 눌러 썼던 문장이 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진실을 바라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기는 더더욱 힘들다. 그리고 진실을 실천하기는...." 그때 나는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행동하는 교사가 되겠다고, 불합리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지금 나는 체 게바라나 김산처럼 총을 들고 거친 산야를 누비는 위대한 혁명가는 아니다. 하지만 김산의 삶을 통해 깨닫는다. 혁명은 거창한 구호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나'를 극복하는 과정 속에 있음을 말이다. 매일 아침 교단에 설 때, 나는 나태해지려는 나 자신과 싸운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과 싸운다.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기 위해, 나는 오늘도 내 안의 '소금 인형'이 녹아내리지 않도록 나를 단속한다. 김산이 자신에게 승리했듯, 나 또한 다짐해 본다. 거창한 세상의 승리자가 되기보다는, 어제의 나를 되돌아보고 오늘의 나에게 승리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것이 바로 이 시대, 교사 김명하가 실천할 수 있는 작지만 가장 소중한 혁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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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 지음, 차경아 옮김 / 까치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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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어가 가둔 세계: 대상화된 고통과 시들어버린 꽃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규정하는 틀이다. 프롬은 현대인들이 "머리가 아프다(I ache)"라는 동사적 상태 대신, "나는 두통을 가지고 있다(I have a headache)"라는 명사적 소유를 선호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단순한 화법의 차이가 아니다. 고통이라는 실존적 체험마저 내 것으로 '소유'하고 통제하려는 현대인의 강박을 보여주는 현상학적 징후다. 흐르는 시간을 멈춰 세워 박제하려는 이러한 태도는 살아있는 생명력을 앗아간다. 저자가 인용한 두 편의 시는 세상을 대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태도를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서양의 테니슨은 아름다운 꽃을 보자마자 뿌리째 뽑아(Pluck) 손에 쥐고 탐구하려 했다. 반면 동양의 바쇼는 꽃을 그저 바라보며(Look carefully) 그 존재 자체와 공명했다. 물리학적으로 관찰 행위가 대상을 변화시키듯, 소유하려는 욕망은 대상의 생명을 파괴한다. 꽃을 꺾어 든 순간 남는 것은 시들어가는 식물체뿐, 꽃의 아름다움(본질)은 사라진다. 우리는 대상을 소유함으로써 안다고 착각하지만, 실상 우리가 쥐고 있는 것은 죽은 껍데기뿐이다.

2. 데카르트의 변질: '나는 생각한다'에서 '나는 소유한다'로 근대 철학의 문을 연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선언하며 인간 이성의 주체성을 확립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이 명제는 비극적으로 변질되었다. "나는 소유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의 존재 가치가 내가 가진 물질, 지위, 그리고 지식의 양으로 증명되는 물신주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소외(Alienation) 현상은 배움의 영역에서 가장 뼈아프게 드러난다. 진정한 앎이란 사고의 근육을 움직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역동적인 과정이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학교는 지식을 마치 상품처럼 진열하고, 학생들은 그것을 최대한 많이 쇼핑하여 머릿속 창고에 쌓아두는 것을 공부라 여긴다. 이해와 성찰이 거세된 채 암기된 지식은 내면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생각하는 힘을 잃은 지식은 그저 소유물일 뿐,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이끌어주지 못한다는 저자의 통찰은 교육 현장에 있는 나에게 서늘한 죽비소리처럼 다가온다.

3. 50년의 시차, 변하지 않는 인간의 굴레 책의 말미, 프롬은 당대 사람들의 의식을 조사하며 '새로운 인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놀랍고도 씁쓸한 것은, 이 책이 쓰인 1976년과 2026년을 바라보는 지금의 사회 풍경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해 우리는 스마트폰이라는 강력한 도구를 손에 쥐었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 도구에 종속되어 더 깊은 불안과 고립감을 느낀다. 물질적 풍요가 내면의 빈곤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미 증명되었다. 50년 전 프롬이 던진 화두는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더 절박하다. 우리는 소유의 욕망이 만든 무한 경쟁의 궤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삶은 무언가를 채워 넣는 '축적의 과정'이 아니라, 매 순간 깨어있는 정신으로 세상과 관계 맺는 '존재의 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멈춰 서서 질문해야 한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인가, 아니면 나는 나 자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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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과학의 열쇠, 퀀텀 유니버스
마커스 초운 지음, 정병선 옮김 / 마티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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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식의 장막을 걷어내고 마주한 우주의 민낯

물리학 전공자에게 세상은 아름다운 수식으로 기술되는 기하학적 공간이다. 하지만 그 수식의 엄밀함은 종종 대중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높은 장벽이 되기도 한다. 리처드 파인만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마커스 초운의 퀀텀 유니버스는 바로 그 지점에서 가치를 증명한다. 저자는 난해한 미분방정식과 텐서(Tensor)의 장막을 걷어내고, 일상적인 언어로 우주의 작동 원리를 명료하게 설명한다. 짐 배것의 힉스, 신의 입자 속으로가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을 탐구하는 여정이었다면, 이 책은 물리학이라는 거대한 세계관의 입구에서 망설이는 이들에게 가장 친절하고 명확한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2. 20세기 물리학의 두 개의 탑: 불확정성과 시공간의 곡률

이 책은 현대 물리학을 지탱하는 두 개의 거대한 기둥, 양자역학(1: 작은 것들)과 상대성이론(2: 큰 것들)을 치밀하게 파고든다.

먼저 '작은 것들'의 세계는 직관이 허용되지 않는 곳이다. 고전역학의 결정론적 세계관라플라스의 악마가 지배하던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앞에서 힘을 잃는다.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동시에 확정될 수 없으며, 존재는 확률의 구름(Cloud) 속에 머문다. 저자는 슈뢰딩거의 파동 함수가 그리는 기묘한 확률의 분포를 통해, 우리가 '물질'이라고 믿었던 실체가 사실은 텅 빈 공간 속의 에너지 진동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단순한 이론적 확장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틀을 송두리째 바꾸는 철학적 전환이다.

반면 '큰 것들'의 세계는 아인슈타인의 우아한 기하학이 지배한다. 특수상대성이론이 시간과 공간을 엮어 4차원 시공간(Spacetime)을 창조했다면, 일반상대성이론은 그 시공간이 질량에 의해 휘어짐을 증명했다. "물질은 공간에게 어떻게 휘어질지를 말하고, 공간은 물질에게 어떻게 움직일지를 말한다"는 존 휠러의 명언처럼, 저자는 중력이 힘이 아니라 공간의 곡률임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등속 운동을 넘어 가속 운동계까지 확장된 이 이론은 블랙홀과 우주 팽창이라는 거시적 현상을 설명하는 완벽한 도구이다.

3. 물리학의 마지막 성배, '최종 이론'을 향하여

양자역학은 미시 세계의 확률을, 상대성이론은 거시 세계의 인과율을 완벽히 설명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이론은 수학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극도로 작으면서 극도로 무거운 블랙홀의 특이점이나 태초의 빅뱅 순간을 설명하려 할 때, 두 이론은 충돌하고 수학적 무한대가 발생한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명확하다. 바로 이 두 세계를 하나의 우아한 수식으로 통합하는 '양자 중력 이론(Quantum Gravity)' 혹은 '최종 이론(Theory of Everything)'을 찾아내는 것이다.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이 그 후보가 될지, 루프 양자 중력(Loop Quantum Gravity)이 답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인류는 끊임없는 탐구 끝에 결국 답을 찾아낼 것이다. 우주의 모든 힘과 물질을 설명하는 단 하나의 방정식, 신이 우주를 설계할 때 사용했을 그 청사진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물리학자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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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술사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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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보지 못한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미시마야 시리즈를 읽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면서도 따뜻해지는 묘한 경험을 한다. 괴담(怪談)이라는 형식을 빌려오고 있지만, 정작 작가가 주목하는 것은 귀신의 무서움이 아니라 그 귀신을 만들어낸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일 테다. 주인공 오치카가 운영하는 '흑백 방'의 규칙, "말해서 버리고, 듣고 잊는다"는 원칙은 어쩌면 오늘날 우리 학교 현장에서도 꼭 필요한 치유의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이들의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응어리들도 누군가 묵묵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지 않을까.

 

2. 책 속에서 만난 인간의 어리석음과 슬픔

이번 세 번째 이야기 피리술사속에는 유독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구조를 돌아보게 하는 에피소드들이 가득했다.

첫 번째 이야기인 <다마토리 연못>에서는 연인에 대한 질투심을 이기지 못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목격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지만, 결국 그 안을 들여다보면 상대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뒤틀린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질투는 그 대상을 파괴하기 전에 나 자신을 먼저 갉아먹는 독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기치장치 저택>에서는 먼저 떠난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과 홀로 살아남은 자의 슬픈 마음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이는 비단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도 세월호를 비롯해 수많은 아픔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부채감'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지 않은가. 그 슬픔을 어떻게 위로하고 연대할 것인가는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이다.

또한, <우는 아이>를 통해 죄를 지은 사람의 몸에 새겨진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죄는 숨길 수 있다고 믿지만, 결국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삶의 흔적으로 남기 마련이다.

특히 표제작인 <피리술사>는 여성이 남성보다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던 당대의 구조적 모순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과거 자신의 성적 편견을 반성하며 읽었던 이갈리아의 딸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꿈을 접어야 하고, 희생을 강요받는 삶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해 왔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씁쓸함을 느낀다.

마지막으로 <절기 얼굴>은 그리움이 극에 달하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판타지적 설정을 보여준다. 너무나 보고 싶은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상실을 견뎌내기 위해 스스로 만드는 '위로의 장치'일지도 모르겠다.

3. !!! 그럼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책에서 가장 긴 에피소드인 <가랑눈 날리는 날의 괴담 모임>을 보며 새로운 꿈을 꾸어본다. 나도 언젠가 학교나 지역 공동체에서 이렇게 각자의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 놓는 모임을 만들고 싶다. 1등이 되기 위한 경쟁적인 대화가 아니라, 내 안의 슬픔과 어리석음, 그리고 작은 희망까지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자리 말이다.

교탁 앞에 서서 지식을 전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도록 마음의 빗장을 열어주는 일일 테다. 인디언들이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듯, 나 또한 아이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올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는 '듣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야기는 힘이 세다. 그 힘으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조금 더 나은 내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같이 생각해요>

1. 미시마야의 '흑백 방'처럼 우리 학교나 가정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아픔을 '안전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나요? 우리가 그런 '듣는 사람'이 되기 위해 버려야 할 선입견은 무엇일까요?

2. <기치장치 저택>처럼 공동체가 짊어진 슬픔을 개인의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함께 기억하며 치유해 나가는 '로컬에듀'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보이지 않는 '검은 그림자'와 정직한 삶: 아이들에게 성취보다 자신의 그림자를 똑바로 응시하는 정직함을 가르치는 것이 왜 더 소중할까요?

3.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사회적 편견 때문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피리술사'들은 누구일까요? 그들과 연대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추천 도서>

1. 선량한 차별주의자(김지혜, 창비): 무지에서 비롯된 특권과 차별을 돌아보게 하는 책입니다.

2. 말의 품격(이기주, 황소북스): 경청과 침묵이 가진 치유의 힘을 다룹니다.

3.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김원영, 사계절): 소외된 존재들이 자신의 서사를 회복해 나가는 과정을 따뜻하게 그려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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