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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 동녘 / 2005년 8월
평점 :
1. 내 삶에 찾아온 두 번째 혁명가
나의 청춘을 지배했던 첫 번째 혁명가가 쿠바의 푸른 악어 '체 게바라'였다면, 중년의 길목에서 만난 두 번째 혁명가는 조선의 붉은 호랑이 '김산'이다. 이것은 단순히 누구를 먼저 만났느냐의 순서 문제가 아니다. 체 게바라가 이상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동경의 대상이었다면, 김산은 짓눌린 현실 속에서도 끝내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켜낸 연민과 공명의 대상이다. 쿠바에 체가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김산이 있었다. 아니, 김산은 체 게바라보다 더 혹독한 식민지의 어둠과 망국의 설움 속에서, 더욱 처절하게 자신의 신념을 증명해 낸 인물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실패한 혁명가였으나, 자기 자신에게는 승리했던 한 위대한 영혼에게 깊은 존경을 보낸다.
2. 짓눌린 현실을 넘어 광야로: 혁명의 시작
식민지 조선의 현실은 거대한 바위처럼 우리 민족을 짓누르고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이 그 무거운 현실에 순응하거나 체념할 때, 김산은 안락한 집을 떠나 거친 만주와 중국 대륙으로 뛰어들었다. 열네 살의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길이었지만,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거친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중국 혁명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찾고자 했다. 광둥꼬뮌의 황포군관학교에서 군사학과 정치학을 배우며, 그는 단순히 총을 드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 있는 혁명을 꿈꾸었다. 광둥 봉기의 참혹한 실패와 수많은 동지의 죽음 앞에서도 그는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하이루펑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펑파이가 이끄는 농민 소비에트의 기적을 목격했다. 흙투성이 농민들이 주인이 되어 세상을 바꾸는 현장에서, 김산은 조선의 농민 혁명이라는 희망의 불씨를 발견했다. 그에게 혁명은 책상 위의 이론이 아니라, 피와 땀이 흐르는 처절한 삶의 현장이었다.
3. 소금 인형의 두려움과 치열한 자기 단속
이 책에서 가장 마음을 울리는 부분은 김산이 느꼈던 '소금 인형'의 두려움이다. 그는 중국 혁명이라는 거대한 바다 속에서 조선인 독립혁명가라는 정체성이 소금 인형처럼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봐 끊임없이 불안해했다.
"나는 중국 혁명을 위해 싸우지만, 나의 조국은 조선이다."
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가혹하리만치 철저한 '자기 단속'이었다. 편안함에 길들여지면 마음이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김산은 이 자연스러운 마음의 흐름을 거스르기 위해 매 순간 자신을 채찍질했다. 중국인들 틈바구니에서 조선의 독립을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기 위해 그는 끝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다잡았다. 상하이에서의 활동, 그리고 죽음 직전까지 이어진 그의 투쟁은 밖으로는 일제와의 싸움이었지만, 안으로는 나태해지려는 자신과의 치열한 전쟁이었다.
4. 패배를 통해 완성된 승리
김산은 저자인 님 웨일스에게 담담하게 고백한다. "나의 일생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나는 역사에게 패배했다."
표면적으로 그의 말은 맞다. 그는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했고, 믿었던 동지들에게 오해를 받아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꿈꾸었던 혁명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그러나 그는 곧이어 덧붙인다.
"하지만 나는 단 하나, 나 자신에게는 승리했다."
이 말은 내 가슴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잃었어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다면, 그것은 패배가 아니다. 그는 상황에 굴복하지 않았고, 비겁하게 타협하지 않았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걸었다. 결과로서의 성공이 아니라, 존재로서의 승리. 이것이야말로 김산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일 것이다.
5. 어제의 나를 이기는 오늘의 다짐
20여 년 전, 뜨거웠던 2000년의 여름을 기억한다. 당시 《체 게바라 평전》을 읽으며 다이어리에 꾹꾹 눌러 썼던 문장이 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진실을 바라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기는 더더욱 힘들다. 그리고 진실을 실천하기는...."
그때 나는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행동하는 교사가 되겠다고, 불합리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지금 나는 체 게바라나 김산처럼 총을 들고 거친 산야를 누비는 위대한 혁명가는 아니다. 하지만 김산의 삶을 통해 깨닫는다. 혁명은 거창한 구호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나'를 극복하는 과정 속에 있음을 말이다.
매일 아침 교단에 설 때, 나는 나태해지려는 나 자신과 싸운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과 싸운다.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기 위해, 나는 오늘도 내 안의 '소금 인형'이 녹아내리지 않도록 나를 단속한다.
김산이 자신에게 승리했듯, 나 또한 다짐해 본다. 거창한 세상의 승리자가 되기보다는, 어제의 나를 되돌아보고 오늘의 나에게 승리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것이 바로 이 시대, 교사 김명하가 실천할 수 있는 작지만 가장 소중한 혁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