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복종에 관하여
에리히 프롬 지음, 김승진 옮김 / 마농지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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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편한 단어 '불복종', 그 이면의 진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순종'을 미덕으로, '불복종'을 악덕으로 배웠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에게 저항하거나 불복종하는 행위는 본능적인 불편함을 동반한다. 사회는 기존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삐딱이' 혹은 '반항아'라는 낙인을 찍어 소외시킨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은 이 견고한 통념을 비틀어 다시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과연 복종은 언제나 선이고, 불복종은 언제나 악인가?

프롬은 인류 역사의 시작을 '불복종'에서 찾는다. 아담과 이브가 신의 금기를 깨고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그들은 낙원에서 추방당했지만, 그 대가로 눈을 떴고 이성을 가진 독립적인 인간이 되었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었을 때, 문명은 시작되었다. 신화적 관점에서 볼 때 불복종은 타락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껍질을 깨고 나와 비로소 '자유'와 '이성'을 획득하는 해방의 몸짓이었다. 다시 말해, 불복종은 인간이 더욱 인간다워지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다.


2. 권력은 어떻게 복종을 '미덕'으로 만들었나

인류가 계급 사회를 형성하고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게 되면서, 지배층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교묘한 심리적 기제를 만들어냈다. 바로 '복종은 선, 불복종은 악'이라는 도덕적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 속에서 권력에 대한 복종은 신성한 의무가 되었고, 불복종은 처벌받아 마땅한 죄악이 되었다. 이러한 복종의 습관은 핵무기 버튼을 누르는 군인의 손끝까지 지배하며, 인류를 공멸의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는 맹목적인 복종으로 진화했다.

프롬은 냉전 시대의 두 체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방식만 다를 뿐 결국 인간을 복종시킨다는 점에서 같다고 비판한다. 공산주의(소련)가 무력과 철권통치로 인간을 강제로 굴복시킨다면, 자본주의는 훨씬 더 세련되고 은밀한 방식으로 우리를 복종시킨다. 텔레비전과 광고, 여론이라는 보이지 않는 최면술사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더 많이 소비하라", "유행을 따르라"고 속삭인다.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지만, 실상은 거대한 기계 장치의 부속품처럼 시스템이 요구하는 욕망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3. 2026년, 여전히 유효한 '인본주의적 사회주의'의 외침

프롬이 이 글을 쓴 1960년대와 내가 살고 있는 2026년의 풍경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인간은 여전히 조직의 논리에 휘둘리고, 물질만능주의라는 거대한 신전 앞에서 무릎 꿇고 있다. 기업이나 관료 사회에서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은 여전히 생존을 건 모험이 된다.

프롬이 대안으로 제시한 '인본주의적 사회주의'는 단순히 정치 체제를 바꾸자는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물질이나 기계, 혹은 국가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사회의 모든 시스템이 '인간의 성장과 행복'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선언이다. 60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그의 외침이 여전히 내 가슴을 때리는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소유'와 '복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불복종은 파괴가 아니다. 그것은 맹목적인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나의 이성과 양심에 따라 '진정한 나'로 서겠다는 실존적 결단이다.


<같이 생각해요>

1. 양심적 불복종:학교나 직장에서 비합리적인 지시를 받았을 때, 우리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침묵하는 다수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는 무엇인가?

2. 자율적 복종:프롬은 '타율적 복종(권력에 대한 굴종)'과 '자율적 복종(자신의 양심과 신념에 대한 따름)'을 구분했다. 내가 지키고 있는 규율들은 타인의 강요인가, 나의 선택인가?

3. 현대판 우상: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맹목적으로 복종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권력'은 무엇인가? (예: 돈, 성공, 타인의 인정, 알고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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