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 창비시선 286
문인수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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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소리>.......문인수

 

 

곤충채집 할 때였다./물잠자리, 길 앞잡이가 길을 내는 것이었다./ 그 길 취해가면 오릿길 안쪽에/

내 하나 고개 하나있다./ 고개 아래 뻐꾹 뻐국 마을이 나온다. 그렇게 어느 날 장갓마을까지 간 적 있다./ 정갓마을엔 큰 누님이,/

날 업어키운 큰 누님이 시집살이하고 있었는데/ 삶은 강냉이랑 실컷 얻어먹고/ 집에 와서 으스대며 마구 자랑했다./

전화도 없던 시절,/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느그 누부야 눈에 눈물 빼러 갔더냐며/ 어머니한테 몽당 빗자루로 맞았다./

다시는 그런 길,/ 그리움이 내는 길 가보지 못했다.*

 

(이 행간엔 자꾸 소리가 난다)

 

2006년 1월 12일, 뻐꾹뻐꾹뻐꾹......큰누님 저 세상 갔다.

향년 76세, 삼일장 치른 뒤 우리 남매 어머니한테 갔다.

활짝 반기면서 어머니는 대뜸,

하필 내게 물었다.

"느그 큰누부는 안오나......?" (약속대로 우리는) 나는, 딴청을 피며 어물쩍 넘겼다.

어물쩍 넘겼으나 어머니, 오늘은 패지도 않는다.뻐꾹 뻐꾹,

 

지금은 서울, 작은형네 아파트엔 물론 몽당빗자루도 없고

연세 아흔 여섯, 어머니는 뭐든 대강 잘 넘어간다.

그런다음......그 다음, 그 다음에 가 뵈어도 어머니,

"나, 와 이리 오래 사노!" 당신을 직접 때리는 것인지

큰누님 안부, 다시는 한번도 잠잠 묻지 않는다. 뻐꾹......

 

문인수 시집 <배꼽>, 창비,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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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시인의 다른 시집을 사기로 했다.

내게 있어 잘 쓴 시란 명확하다.

이렇게 삶이 진솔히 묻어나거나

시적 언어의 영역이 확장되거나

둘 중 하나는 갖고 있어야 시다.

문체의 미학만으로도 아름다운 시가 있는 반면

어눌해도 감동이 있음으로써 아름다운 시가 있다.

내 나이가 되면 단순한 센치멘탈리즘만으론 감동이 잘 오지 않는다.

문인수 시인의 시는 질긴 실존의 슬픔이 담겨 있다.

 

시인의 말을 옮긴다.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

사람의 냄새가 배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야말로 절경이다. 그래,

절경만이 우선 시가 된다.시, 혹은 시를 쓴다는 것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결국

사람 구경일 것이다.

 

사람의 반은 그늘인 것 같다.

말려야 하리.연민의 저 어둡고 습한 바닫,

다시 잘 살펴보면 실은 전부 무엇이야.

내가 엎질러놓은 경치다. "(2008년 4월 문인수)

 

2.

윗시는 아흔 여섯의 어머니가 일흔 여섯의 딸을 먼저 보낸,

인생의 한 비극이 펼쳐진다. 어찌할 수 없는 생의 뒤틀림.

어쩌면 나이들어 자식의 죽음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정신을 놓아버린 어머닐 통해 삶의 부조리를 말하려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다른 시 <조묵단전>에서 어머니를 말한다. 

여든 하나에 남편을 보내고서도  "나 늙으면 우짤꼬"를 염려하는 어머니를 보는

시인의 눈은 아리다.

40년을 시어머니 병수발, 그 중 10년은 시아버지 병수발까지 중복,  그후 남편 병수발 10년,

그 와중에 5남매를 낳고 기른 어머니.

그 연산 60년, 기간으론 50년인 세월을 남의 똥을 치우며 살다가 이젠

스스로 똥을 싸며 사시는 연세에 이른 어머니. 그 인생은 "정말 똥이다."

급기야 시인은 아흔 여섯의 어머닐 향해 "어무이 이제 고마 돌아가이소"라고 내뱉는다.

죽으라는 말은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다. 가까운 이의 고생은 바라보는 것 조차 힘들다.

생은 참으로 무자비하다. 삶과 죽음이 자유롭지 않은 것.

 

시를 읽는 동안 조묵단 여사에 내 어머니가  겹쳐서 혼이 났다.

아흔 둘의 할머닐 보내신 후 쓰러지셔 병원에 계신다.

어머니에게 자신의 삶이란 있었던가. 나 역시 어머니를 병원에 두게 한 공범이다.

 

읽는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시집이었다. 진실을 매만진다는 것은 늘 아리다.

시집 <배꼽>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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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 김인후에 관한 역사서 <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백승종저, 돌베개)를 읽다가 위의 挽詞를 발견했습니다.

16세기 조선의 시인이자 성리학자였던 하서 선생이 부인을 사별한 친구를 위해 써 준 애도시입니다.

저자의 번역이 좋아 그대로 옮기고,어미만 몇 자 고쳤습니다. (같은 책, 84쪽)

 

當時結髮共靑春。牛女何期參與辰。惆悵百年經苦樂。只今還是夢中身。

其二
鶴髮偏親襁褓兒。春風三十落花飛。空餘壁上靑鸞鏡。不減從前明月輝。

출처: 河西先生全集卷之七   七言絶句  < 挽李适室 >(a_033_151d)

 

 

결발(結髮: 결혼)할 땐 모두가 청춘이었지.

견우 직녀 헤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

슬프다! 백년 괴로움 즐거움 다 겪더니,

이제 와 꿈속의 몸이 되었어라.

 

학발(鶴髮: 흰머리)의 시아버님, 강보에 누운 아기

삼십이라, 봄바람에 꽃잎 날아 떨어졌네.

속절없다, 홀로 남은 벽에 걸린 청란 거울

밝은 달은  예처럼 빛나건만.

 

* 청란(菁鸞)은 부부 사이를 상징하는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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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나무들> 

 

다 흘러가지 않은 저녁 속에

둥지에 내려앉은 새처럼

그저 일순의 숨결이라도

행복 속에 가두고 싶다는 듯

잎들의 날개를 접는 나무들,

이젠 쓰고 남은 시간도 접어

뒷주머니에 꾸깃꾸깃 집어넣고

다 흘러가지 않은 저녁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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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딴생각>>은 그 첫 시로 <저녁, 나무들> 마지막 시를 <가을>로 두었는데, 이는 인생의 저녁을 앞두고 지나온 삶을 이 한 권의 시집 속에 정리해 두겠다는 시인의 의도가 반영되었다고 본다. 그 첫 시 <저녁 , 나무들>로 시작해 보자. 이 시는 표면으론 짧은 시이지만 읽기의 측면에선 오래 읽히는 굉장히 길고 무거운, 시공간이 큰, 한마디로 좋은 시다. 좋은 시란, <<독서의 기술>>에서 헤럴드 블룸이 한 대답을 놓으면, “훌륭한 시의 진정한 기준은 매우 꼼꼼한 읽기를 가능케” 하는 시이다.  

 

이 한편에도 김재혁 시의 특성이 다 살아 있다. 고즈넉하고 사색적인 릴케의 사물시를 한 편 보는 것 같으면서도, 기법에는 은유의 성찬과 의인화, 알레고리가 다 담긴 시이다. 새와 날개, 나무와 잎은 제유의 관계이자 이중의 은유이다. 또 새는 나무이고 날개는 잎이 되어 환유의 상태가 되었다. 거기다 이 새와 나무는 바로 시인 자신을 상징하기도 한다.  

 

새처럼 , 나무처럼, 삶의 둥지에 행복한 순간을 가두고,  

인생의 낮동안 살아온 날들 혹은 기억들-날개와 잎들-을 정리하는  

인생의 저녁에 서 있는 시인이 보인다.   

여기서  ‘저녁’은 시간의 하루의 저녁에서 인생의 저녁으로 부피가 확산되어,  

삶의 둥지-혹은 집-와 나무들-인간, 자연 등 만물-을 담는 하나의 세계, 공간이기도 하다.  

시간이 공간으로 확대되면서 시의 시공간이 우주적 공간-세계-까지 확장된다.  

또 시 형식의 간결함 역시 독자의 내면에 자리한 해석공간을 넓혀  깊이와 울림을 확대시킨다.

 

중년을 맞아 살아온 삶의 기억들을 정리하고 못다 정리한 기억들을 주섬 주섬 집어넣고 있는  

시인의 내면을 우리는 이 시에서 엿듣는다. 우리 자신의 생을 함께 돌아 보며!   

 

가만히 마음의 둥지에 내려앉는 시  

 

* 제가 쓴 시평의 일부를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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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가 말한 '사람은 자기만의 고유한 죽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시이론과 연관시켜서 쓴 글. 김수영의 글 속에 릴케의 글이 겹친다.

자기만의 고유한 죽음이란 자기만의 삶 속에서 구현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래는 김수영의 산문이다. 강신주의 <<김수영을 위하여>>를 읽다가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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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洙暎散文集 中 -<죽음과 사랑의 對極은 詩의 本隨>

 

 

사랑과 죽음의 素材는 우리나라의 詩에 있어서도 무수히 취급되어 왔고 또 오늘날도 취급되고 있지만, 그 중에 성공한 작품이 지극히 희소하고 또한 그 중에서도 자기 나름으로 성공한 작품이 全詩史를 통해서 가뭄에 콩나기 정도 밖에 없는 것을 보면, 이 흔한 소재가 얼마나 어렵고 높은 詩의 絶頂인가를 새삼스럽게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죽음과 사랑의 문제는 말할 필요도 없이 萬人의 萬有의 문제이며, 萬人의 궁극의 문제이며, 모든 문학과 詩의 드러나 있는 素材인 동시에 숨어있는 소재로 깔려있는 영원한 문제이며, 따라서 무한히 매력있는 문제이다. <사람은 죽을 곳을 알아야 한다>고 하지만 이 말은 詩에도 통한다. 어떻게 잘 죽느냐--- 이것을 알고 있는 詩人을 <깨어있는> 시인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완수한 작품을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우리들은 항용 말한다.
그런데 조금더 따지고 보면 <사람은 죽을 곳을 알아야 한다>는 말은, 사람은 자기만이 죽을 수 있는 장소와 때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이 말을 詩 에다 적용하는 경우에는 <자기나름>으로, 즉 자기의 나름의 스타일을 가지고 죽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말하면 영리한 독자는 또 獨創性에 대한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의 講話로구나 하고 눈살을 찌푸릴지 모르지만 모든 詩는--- 마르크스 主義의 詩까지도 합해서- 어떻게 자기나름으로 죽음을 완수했느냐의 문제를 검토하는 방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모든 詩論은 이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는 모습과 行方과 그 행방의 距離에 대한 해석과 測定의 의견에 지나지않는다. 죽음과 사랑을 對極에 놓고 詩의 새로움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詩라는 것이 얼마만큼 새로운 것이고 얼마만큼 낡은 것인가의 本質的인 默契를 알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필자의 말을 너무나 正統派的이고 고루하다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필자의 갈망은 훨씬 未來의 편에 서있다. 그리고 그러한 실험적인 미래의 詩의 관점에서 들여다볼 때 우리 詩壇의 작품들이 주는 환멸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자기도모르게 소위 正統派的인 防禦的 僞裝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막상 고의적인 것이라 치더라도 그다지 有害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필자는 알고 있다.
이러한 인내를 가지고 이 달의 작품을 살펴볼 때에도 及第點에 달하는 작품은 겨우 한 편.
金顯承의 (波濤) (現代文學 ) 정도이다. 이 정도의 작품이면 죽음을 디디고 일어선 자기의 스타일을 가진 강인한 精神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보다 훨씬 젊은층의 작품으로는 李姓敎의 (산으로 올라가는 집들을 위하여) (현대문학)가 미숙한대로 알찬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너무 급한 호흡을 한꺼번에 내쏟느라고 그런지 斷續의 부자연한 점이 보이기는 하지만 庶民生活의 건전 <窮狀>을 <통일>에의 꿈으로 치켜올린 뜨거운 정열이 차디찬 억제의 스타일 사이로 귀엽게 點火되고 있다. 그의 종래의 姑息的인 세계에 뚜렷한 龜裂이 생긴 것같고 그것만으로도 스타일에의 접근에 진전이 있었다고 보아야겠다.
<1967年 10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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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우리를 찌르는 그런 종류의 책들만을 읽어야 한다고 난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머리를 치는 일격으로 우리를 깨우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 책을 뭣 때문에 읽지?

...... 그 대신 우리는 우리에게 재앙과도 같은 영향을 주는,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어떤 사람의 죽음처럼, 모든 이들로부터 숲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우리를 깊게 비탄에 젖게 하는 그러한 책들을 필요로 한다. 책이란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한 도끼가 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나의 믿음이다>

 

---카프카가 동급생 오스카 폴락에게 스물 한 살에 쓴 편지--

* 폴오스터의 <굶기의 예술> 중 한 챕터인 '카프카의 편지'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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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산문집 <굶기의 예술>을 읽었다. 이 책은 폴 오스터가 자신의 문학에 영향을 미친 작가들, 예를 들어 크누트 함순, 로라 라이딩, 프란츠 카프카, 사무엘 베게트, 파울 첼란, 찰스 레즈니코프, 에드몽 자베스에 이르기까지의 제 현대작가들에게 받은 문학적 인상이나 작품 등을 소개하거나 비평해 놓은 글을 편집한 것이다.  책의 내용이 가볍지 않아 정독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말하면,  현대 문학에 대한 나의 일천한 지식을 감안한다해도  글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오스터 문학과 이 책에 소개된 작가들이 가진 상관관계가 드러나는 글도 있었고 그 함의나 복선을 알아채지 못하는 글도 있었다. 여러 편의 산문 중  카프카의 서신에 관한 글들이 일견 내 관심을 끌었다.

(참고로 이 책에 수록된 폴 오스터의 에세이들은 <<폴 오스터의 뉴욕통신>>이란 제하에 새로 증보되어 번역되어 나왔다.)

 

 카프카의 작품은 그의 생전에 거의 발표되지 않았다.

1924년 마흔 한 살에 후두폐결핵으로 죽은 카프카는 그의 모든 미발표작품을 없애달라고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부탁을 했다. 그러나 브로트는  헌신적인 노력으로 그것을 되살려 세상에 내 놓았다.  카프카는 막스 브로트와 이십 년에 걸쳐 우정을 나누며 서신 왕래를 했는데, 그는 그의 영혼을 브로트에게 쏟아 놓았다.  브로트에게 그는 개인적이고 문학적인 문제들, 그리고 일상생활의 무수한 사건들을 자세히 써보냈다. 그 두사람의 우정의 깊이에 경탄하지 않고 그 편지들을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폴 오스터는 전한다. 

 

카프카는 그 외 수많은 친구나 연인, 심지어는 이웃 소녀에게도 친절한 편지를 보낼 정도로 수많은 편지를 남겼다.  카프카는 자신을 단련하며 살았다. 서신을 보면 참 소심하고 섬세하며 겸손하며..내성적이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편지를 쓰기 좋아하며 자신을 한 없이 낮춘 카프카를 들여다 보는 일은 경외롭다. 편지를 쓰는 인간은 일반적으로 진중하다. 카프카의 글이 무게를 지니는 것도 일상의 그런 깊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여겨진다.

 

이번에 주의를 끈 <색계>란 영화의 원작자 장아이링이 자신의 미발표 원고와 유품을 유언으로 남긴 사람도 혈족이 아니라  홍콩에 거주하는 벗, 宋淇와 광文美 부부이다. 그들 역시홍콩과 미국이란 물리적 거리를 두고도 오래 교유한 사람들이다. 남편이나 연인보다 친구들이 자신의 삶과 문학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고 믿은 탓이다. 그들 사이의 편지는 문학에 대한 조언과 일상 생활의 위로로 가득차 있다. 편지만큼 한 작가의 생애를 잘 들여다 보는 은밀하고 정밀한 도구도 없다. 일기나 작품은 자기만의 독백이지만 편지는 타인과의 관계와 교유기 때문에 자신을 더 객관화 시킨 것일 수 있다. 

 

서신을 읽을 땐 주의를 요한다. 글이 내면의 풍경을 다 대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자의 말처럼,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릴케는 닥터지바고를 쓴 파스테르나크의 중재로 러시아의 여류시인 츠바타예바와 열정적인 서신 교환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사이에 놓여진 거리때문에 실제 이상으로 왕성하고 정열적인 교류를 했다.  가까이 있어서 쉽게 만날 수 있었다면 그런 편지들이 씌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해서  실제 츠바타예바가 만나자 했을 때 릴케는 거절했고 그의 병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 릴케는 백혈병으로 돌연 죽음을 맞는다. 즉, 릴케의 글이 릴케의 속마음을 다 대변한 것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가까이 옆에 있는 사람과는 내면을 이야기 하는데 익숙치 않다. 더 긴요한듯 해보이는 일상이 전부를 차지하기 때문에 속의 이야기는 밀어 놓는다. 일상의 문제에서 무엇을 선택하는가가 한 인물의 실제 초상화를 그리는데 글보다 더 중요한 잣대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영복 선생이나 에곤 쉴레처럼 일상이 아주 단순화되어 있는 감옥에 있을 경우 편지의 비중은 더 크고 투명성을 지닌다. 아무튼 지금 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서 서신을 주고 받았던 사람들이 좀 더 사색을 요하는 긴 호흡의 글을 썼다는 것은 분명하다.

 

작금의 소설이 말로 쓴 글처럼 감각적이게 되는 것 또한 생각의 여과없이 씌여지는 즉각성 글이기 때문이다. 두고 두고 읽지 않는 글을 두고 두고 쓰는 바보는 없다. 이메일의 교류가 서신만큼의 초상화가 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아쉬운 일이다. 문향을 맡지 못하는 것은.

  

덧붙임 1: 크누트 함순의 <굶기>를 다룬 폴 오스터의 글은 다분히 동양의 단식의 의미와 유사한 느낌으로 읽었다. '자발적으로 죽기 직전까지 굶는 것을 통해서 영혼의 찌꺼기와 욕구를 거세하는 것, 극단적 상황에 자신을 놓음으로써 생의 귀중함을 체험하는 것, 그게 단식이 아닌가.  이 크누트 함순의 <굶기>는 폴오스터의 작품 <달의 궁전>의 마르코의 단식에 영감을 불어넣은 것 같다.

 

덧붙임 2:  책의 유용함 중 하나는 자성을 가능케 한다는 점이다. 이는 문학이나 책이 은 폴 오스터의 말을 들면 영화나 음악과 달리 일 대 일의 대면으로 이루어졌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즉 작가와 독자가 일대 일로 내면적으로 만나는 은밀한 공간, 그게 책이다. 장 그르니에는 독서의 유용함으로 내 맘대로 친구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들었다.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세상에서 그것도 통시대적으로 공간을 초월하여 친구를 두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 아닐까.

(2008/12/02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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