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우리를 찌르는 그런 종류의 책들만을 읽어야 한다고 난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머리를 치는 일격으로 우리를 깨우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 책을 뭣 때문에 읽지?

...... 그 대신 우리는 우리에게 재앙과도 같은 영향을 주는,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어떤 사람의 죽음처럼, 모든 이들로부터 숲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우리를 깊게 비탄에 젖게 하는 그러한 책들을 필요로 한다. 책이란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한 도끼가 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나의 믿음이다>

 

---카프카가 동급생 오스카 폴락에게 스물 한 살에 쓴 편지--

* 폴오스터의 <굶기의 예술> 중 한 챕터인 '카프카의 편지'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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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산문집 <굶기의 예술>을 읽었다. 이 책은 폴 오스터가 자신의 문학에 영향을 미친 작가들, 예를 들어 크누트 함순, 로라 라이딩, 프란츠 카프카, 사무엘 베게트, 파울 첼란, 찰스 레즈니코프, 에드몽 자베스에 이르기까지의 제 현대작가들에게 받은 문학적 인상이나 작품 등을 소개하거나 비평해 놓은 글을 편집한 것이다.  책의 내용이 가볍지 않아 정독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말하면,  현대 문학에 대한 나의 일천한 지식을 감안한다해도  글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오스터 문학과 이 책에 소개된 작가들이 가진 상관관계가 드러나는 글도 있었고 그 함의나 복선을 알아채지 못하는 글도 있었다. 여러 편의 산문 중  카프카의 서신에 관한 글들이 일견 내 관심을 끌었다.

(참고로 이 책에 수록된 폴 오스터의 에세이들은 <<폴 오스터의 뉴욕통신>>이란 제하에 새로 증보되어 번역되어 나왔다.)

 

 카프카의 작품은 그의 생전에 거의 발표되지 않았다.

1924년 마흔 한 살에 후두폐결핵으로 죽은 카프카는 그의 모든 미발표작품을 없애달라고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부탁을 했다. 그러나 브로트는  헌신적인 노력으로 그것을 되살려 세상에 내 놓았다.  카프카는 막스 브로트와 이십 년에 걸쳐 우정을 나누며 서신 왕래를 했는데, 그는 그의 영혼을 브로트에게 쏟아 놓았다.  브로트에게 그는 개인적이고 문학적인 문제들, 그리고 일상생활의 무수한 사건들을 자세히 써보냈다. 그 두사람의 우정의 깊이에 경탄하지 않고 그 편지들을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폴 오스터는 전한다. 

 

카프카는 그 외 수많은 친구나 연인, 심지어는 이웃 소녀에게도 친절한 편지를 보낼 정도로 수많은 편지를 남겼다.  카프카는 자신을 단련하며 살았다. 서신을 보면 참 소심하고 섬세하며 겸손하며..내성적이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편지를 쓰기 좋아하며 자신을 한 없이 낮춘 카프카를 들여다 보는 일은 경외롭다. 편지를 쓰는 인간은 일반적으로 진중하다. 카프카의 글이 무게를 지니는 것도 일상의 그런 깊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여겨진다.

 

이번에 주의를 끈 <색계>란 영화의 원작자 장아이링이 자신의 미발표 원고와 유품을 유언으로 남긴 사람도 혈족이 아니라  홍콩에 거주하는 벗, 宋淇와 광文美 부부이다. 그들 역시홍콩과 미국이란 물리적 거리를 두고도 오래 교유한 사람들이다. 남편이나 연인보다 친구들이 자신의 삶과 문학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고 믿은 탓이다. 그들 사이의 편지는 문학에 대한 조언과 일상 생활의 위로로 가득차 있다. 편지만큼 한 작가의 생애를 잘 들여다 보는 은밀하고 정밀한 도구도 없다. 일기나 작품은 자기만의 독백이지만 편지는 타인과의 관계와 교유기 때문에 자신을 더 객관화 시킨 것일 수 있다. 

 

서신을 읽을 땐 주의를 요한다. 글이 내면의 풍경을 다 대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자의 말처럼,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릴케는 닥터지바고를 쓴 파스테르나크의 중재로 러시아의 여류시인 츠바타예바와 열정적인 서신 교환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사이에 놓여진 거리때문에 실제 이상으로 왕성하고 정열적인 교류를 했다.  가까이 있어서 쉽게 만날 수 있었다면 그런 편지들이 씌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해서  실제 츠바타예바가 만나자 했을 때 릴케는 거절했고 그의 병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 릴케는 백혈병으로 돌연 죽음을 맞는다. 즉, 릴케의 글이 릴케의 속마음을 다 대변한 것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가까이 옆에 있는 사람과는 내면을 이야기 하는데 익숙치 않다. 더 긴요한듯 해보이는 일상이 전부를 차지하기 때문에 속의 이야기는 밀어 놓는다. 일상의 문제에서 무엇을 선택하는가가 한 인물의 실제 초상화를 그리는데 글보다 더 중요한 잣대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영복 선생이나 에곤 쉴레처럼 일상이 아주 단순화되어 있는 감옥에 있을 경우 편지의 비중은 더 크고 투명성을 지닌다. 아무튼 지금 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서 서신을 주고 받았던 사람들이 좀 더 사색을 요하는 긴 호흡의 글을 썼다는 것은 분명하다.

 

작금의 소설이 말로 쓴 글처럼 감각적이게 되는 것 또한 생각의 여과없이 씌여지는 즉각성 글이기 때문이다. 두고 두고 읽지 않는 글을 두고 두고 쓰는 바보는 없다. 이메일의 교류가 서신만큼의 초상화가 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아쉬운 일이다. 문향을 맡지 못하는 것은.

  

덧붙임 1: 크누트 함순의 <굶기>를 다룬 폴 오스터의 글은 다분히 동양의 단식의 의미와 유사한 느낌으로 읽었다. '자발적으로 죽기 직전까지 굶는 것을 통해서 영혼의 찌꺼기와 욕구를 거세하는 것, 극단적 상황에 자신을 놓음으로써 생의 귀중함을 체험하는 것, 그게 단식이 아닌가.  이 크누트 함순의 <굶기>는 폴오스터의 작품 <달의 궁전>의 마르코의 단식에 영감을 불어넣은 것 같다.

 

덧붙임 2:  책의 유용함 중 하나는 자성을 가능케 한다는 점이다. 이는 문학이나 책이 은 폴 오스터의 말을 들면 영화나 음악과 달리 일 대 일의 대면으로 이루어졌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즉 작가와 독자가 일대 일로 내면적으로 만나는 은밀한 공간, 그게 책이다. 장 그르니에는 독서의 유용함으로 내 맘대로 친구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들었다.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세상에서 그것도 통시대적으로 공간을 초월하여 친구를 두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 아닐까.

(2008/12/02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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