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가 말한 '사람은 자기만의 고유한 죽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시이론과 연관시켜서 쓴 글. 김수영의 글 속에 릴케의 글이 겹친다.
자기만의 고유한 죽음이란 자기만의 삶 속에서 구현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래는 김수영의 산문이다. 강신주의 <<김수영을 위하여>>를 읽다가 찾아보았다.
---------------
金洙暎散文集 中 -<죽음과 사랑의 對極은 詩의 本隨>
사랑과 죽음의 素材는 우리나라의 詩에 있어서도 무수히 취급되어 왔고 또 오늘날도 취급되고 있지만, 그 중에 성공한 작품이 지극히 희소하고 또한 그 중에서도 자기 나름으로 성공한 작품이 全詩史를 통해서 가뭄에 콩나기 정도 밖에 없는 것을 보면, 이 흔한 소재가 얼마나 어렵고 높은 詩의 絶頂인가를 새삼스럽게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죽음과 사랑의 문제는 말할 필요도 없이 萬人의 萬有의 문제이며, 萬人의 궁극의 문제이며, 모든 문학과 詩의 드러나 있는 素材인 동시에 숨어있는 소재로 깔려있는 영원한 문제이며, 따라서 무한히 매력있는 문제이다. <사람은 죽을 곳을 알아야 한다>고 하지만 이 말은 詩에도 통한다. 어떻게 잘 죽느냐--- 이것을 알고 있는 詩人을 <깨어있는> 시인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완수한 작품을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우리들은 항용 말한다.
그런데 조금더 따지고 보면 <사람은 죽을 곳을 알아야 한다>는 말은, 사람은 자기만이 죽을 수 있는 장소와 때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이 말을 詩 에다 적용하는 경우에는 <자기나름>으로, 즉 자기의 나름의 스타일을 가지고 죽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말하면 영리한 독자는 또 獨創性에 대한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의 講話로구나 하고 눈살을 찌푸릴지 모르지만 모든 詩는--- 마르크스 主義의 詩까지도 합해서- 어떻게 자기나름으로 죽음을 완수했느냐의 문제를 검토하는 방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모든 詩論은 이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는 모습과 行方과 그 행방의 距離에 대한 해석과 測定의 의견에 지나지않는다. 죽음과 사랑을 對極에 놓고 詩의 새로움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詩라는 것이 얼마만큼 새로운 것이고 얼마만큼 낡은 것인가의 本質的인 默契를 알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필자의 말을 너무나 正統派的이고 고루하다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필자의 갈망은 훨씬 未來의 편에 서있다. 그리고 그러한 실험적인 미래의 詩의 관점에서 들여다볼 때 우리 詩壇의 작품들이 주는 환멸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자기도모르게 소위 正統派的인 防禦的 僞裝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막상 고의적인 것이라 치더라도 그다지 有害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필자는 알고 있다.
이러한 인내를 가지고 이 달의 작품을 살펴볼 때에도 及第點에 달하는 작품은 겨우 한 편.
金顯承의 (波濤) (現代文學 ) 정도이다. 이 정도의 작품이면 죽음을 디디고 일어선 자기의 스타일을 가진 강인한 精神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보다 훨씬 젊은층의 작품으로는 李姓敎의 (산으로 올라가는 집들을 위하여) (현대문학)가 미숙한대로 알찬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너무 급한 호흡을 한꺼번에 내쏟느라고 그런지 斷續의 부자연한 점이 보이기는 하지만 庶民生活의 건전 <窮狀>을 <통일>에의 꿈으로 치켜올린 뜨거운 정열이 차디찬 억제의 스타일 사이로 귀엽게 點火되고 있다. 그의 종래의 姑息的인 세계에 뚜렷한 龜裂이 생긴 것같고 그것만으로도 스타일에의 접근에 진전이 있었다고 보아야겠다.
<1967年 10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