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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우스 치하의 전제정치: 법의 탈을 쓰고 행해지는 전제정치/몽테스키외 

 

"로마에는 국민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들을 처벌하는 몇가지 불경죄에 관한 법이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이법을 교묘하게 잘 이용한 경우였다. 그는 이 법의 본래의 취지를 넘어서서, 자신의 증오심이나 불신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라면 우엇에나 적용했다. 비단 어떤 행위 뿐만 아니라 말이나 몸짓, 심지어 사상까지도 이 법의 적용범위에 포함되었다. 친구 사이의 대화에서 감정을 토로하는 데 뱉어진 말조차 사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향연의 자유는 물론 혈연 사이의 신뢰, 노예의 충성심마저 더이상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군주의 기만과 우울증이 모든 곳으로 확산되었고, 우정은 위험한 것으로, 솔직함은 무모함으로, 미덕은 민중의 마음 속에서 지난 시절의 행복을 상기시키는 애착쯤으로만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법의 탈을 쓰고 정의의 색을 입혀서 행해지는 전제정치만큼 잔인한 것은 없다. 이는 뗏목 덕에 목숨을 건진 불쌍한 이들을 그 위에서 다시 밀쳐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몽테스키외, <<로마의 성공,로마제국의 실패 >>, 김미선 옮김, 사이, 2013, 199-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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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은 몽테스키외로 하여금 <<법의 정신>>을 쓰게 한 모티브가 된 책이다. 로마의 멸망에 대한 정치사상가의 총체적 보고서. 개별 사료보다는 전체를 조망하는 방식으로, 역사가와는 다른 통찰의 눈으로 로마시대를 해석했다. 역사학자 뿐만 아니라 세정과 인정의 기미, 즉 인간을 해석하는 데도 훌륭한 책이다. 수상록을 읽는 기분.

 

몽테스키외는 로마제국의 멸망이 너무 이른 성공, 즉 번영에 있다고 보았다. 정복과 팽창의 속도가 빨라 관리와 지속의 체제로 미처 법을 바꾸지 못한 데에 그 원인이 있다 하였다. 정복의 법과 유지의 법은 달라야 한다!

 

오늘은 그가 쓴 <<로마의 성공,로마제국의 실패 >>를 읽다가 티베리우스의 전제정치를 설명한 부분이 그냥 읽혀지지 않아서 소개한다. 왜 멈추게 되었을까?  불경죄는 무슨 법과 닮아 있다.

 

전제정치를 효율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장치는 "두려움의 조장"이다. 독재는 공포를 먹고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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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둣방의 송곳처럼 펜은 쓰면 쓸수록 날카로워지고, 이윽고 수놓는 바늘처럼 예리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인간의 사상은 더욱더  모난 데가 없어져 간다. 

낮은 산에서 높은 봉으로 올라가면서 바라보는 경치처럼.

 

저작자가 한 사람을 증오하고 그 사람에 대해 통렬한 논란의 붓을 들고 있더라도,

만일 아직 그 사람의 좋은 면을 보고 있지 않다면 다시 한 번 붓을 놓아야 한다.

그에게는 아직 논란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임어당, <<생활의 발견>>, 박병진 옮김, 육문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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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유의 六不과 함께 나를 찌른 임어당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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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공간성: 부동의 이동

 

 

손에 손을 잡고 그들은 힘겹게 같은 걸음으로 나아간다. 아무것도 없는 손 안에는 -아니,

비어있는 작은 손들. 둘 다 뒤에서 보면 등을 굽힌 채로 힘겹게 같은 걸음으로 나아간다.

꼭 쥔 손에 닿으려고 들어 올린 아이의 손. 꼭 잡고 있는 늙은 손을 꼭 잡기. 꼭 잡고 꼭 잡히기.

힘겹게 가버리지만( 움직이지만의 의미: 제 주석) 결코 서로 멀어지지 않는다. 뒤에서 본 모습.

둘 다 등을 굽힌 채로, 꼭 잡으면서 꼭 잡힌 손들로 하나가 된. 하나가 된 것처럼 힘겹게 간다.

하나의 그림자. 또 하나의 그림자.(14-15쪽)

 

---사무엘 베케트의 <이제 그만 >(알랭 바디우, <<베케트에 대하여>>, 서용순, 임수현 옮김, 민음사, 224쪽,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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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손을 통해서 각자의 위치를 지워버리지요. 움직이지 않고 이동하기!

 

옛날에 소개한 글과 그림 하나를 보여드립니다.

 

Cover image expansion

 

Emilio Longoni (Italian, 1859–1932). The First and the Last Steps. 1897. Oil on canvas. Photo Credit: Alinari / Art Resource, NY.

 

1.

그림 하나를 소개합니다.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자 화가' 에밀리오 롱고니의 그림입니다.

원래 점묘파 계열에 서있는 화가로, 주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애환을 화폭에 담았었죠.

 

아기는 아무것도 붙잡지 않기 위해 인생에서의 첫 발걸음을 뗍니다.

반면에 노인은 지팡이에 의지하고 마지막 걸음을 걷죠.

같은 울타리에 독립과 의존 두 가지 방향의 기운이 흐릅니다.

화가는 아기와 노인의 대비를 통해 삶의 한 순환을 잘 보여주지요.

아이는 의존상태를 떠나려 하고 노인은 다시 아이가 떠난 의존상태로 돌아옵니다.

그 순환의 한 지점이 한 그림에서 보여지는 거죠.

 

2.

한 친구가 제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요.

두려움은 무언가를 잃을까하는 염려에서 나오니, 

두려워한다는 것은 '나는 소유의 사람'이라는 고백이라는 군요.

삶을 소유의 코드로 읽지말고 존재의 코드로 읽으면

자유로워진다고요. 

나는 내가 참여하는 모든 곳에 편재하죠.

그리고 모든 사람들, 나아가 나무와 풀과 꽃 등 자연 역시 그러하겠죠.

사람은 죽음을 통해서 자연에도 참여하니까요.

과연 죽음은 나에게서 '또 다른 나'로 흐르는 과정이로군요.

 

그러고 보면 삶도 죽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골고다언덕에서 제자들에게 강조한 말씀도 이것이죠.

"너희는 두려워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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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식 숙명론을 들어본 적이 있으세요!
이수영의 <명랑철학>을 읽다가 만난 개념입니다.


행군이 혹독하면 러시아 병사들은 그대로 눈위에 쓰러져
아무것도 안합니다.  바로 무반응, 무저항의 태도로,
신진대사를 감소시키거나 완만하게 해서 겨울잠을 자듯이
신체의 에너지를 보존하는  거지요. 이것을 러시아식 숙명론이라 한대요.
살다가 '견딜 수 없는 상황과, 장소와 집과 사회' 속에 있게 되면
저항하거나 변경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말고

삶이 다시 풍부해질 때까지 그대로 버티는 것이 
오히려 가장  적극적인 생존방법이란 거죠.

 

익숙하고 반복적인 일상이 갑자기 지루하고 힘겹게 느껴질 때 또한

무언가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려 애쓰지 말고  당분간 그대로 버티는 것이 낫다는 군요. 

 

'폭풍이 지나갈 땐 고개를 숙여라'던 오랜 동지의 조언과

맞닿아 있네요.

 

2.

 

비슷한 글 하나를 소개합니다.

 

 

“지금은 독이 묻은 화살을 빼내는 시간입니다. 이 화살이 어디
서 날아왔고 무슨 독이 묻었고 얼마나 깊이 박혔나 따지기 전에
먼저 빼내야 하는 것입니다. 절에 왔다 생각 말고 부처를 의식하
지도 말고 옆의 일에 마음 쓰지도 마십시오. 눕고 싶으면 눕고 먹
고 싶으면 먹고 걷고 싶으면 걷고 울고 싶으면 울고 가만히 앉았
고 싶으면 가만히 앉았고 그냥 자기를 돌보며 한량없이 마음을 내

려놓고 지내십시오. 맹자는 늘 천지가 지금이라 했습니다. 이제 막
태어난 듯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앞일도 걱정 말고, 지난 일도 떠
올리지 마십시오. 포식이 육체를 해치듯 너무 많은 생각도 정신을
해칩니다. 상처가 나으면 살아갈 용기도 생기니 그저 편히 지내며
세상을 버리려 했던 마음을 돌려 눈을 뜨십시오.”

 

 

전경린의 <<황진이>>중에서(이주향의 <<행복한 책읽기>>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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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r in Liebe aber, nur umschattet von der Illusion der Liebe schafft der Mensch,
nämlich nur im unbedingten Glauben an das Vollkommene und Rechte.

 인간은 오로지 사랑 안에서만, 사랑의 환상에 둘러싸여서만 창조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완벽하고 정당한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 안에서만 창조할 수 있다.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 중에서

 

(Nietzsche, Unzeitgemäße Betrachtungen II. Vom Nutzen und Nachteil der Historie für das Leben 7, S.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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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반시대적이라 함은 '시대의 주된 사상에 반대하는'이란 뜻이 아니라

'때에 맞지 않는, 때이른 앞선 ' 고찰을 뜻한다. 철학자를 '미래의 시대'에 사는 사람이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이다. "현재의 시대에 앞서서 미래의 이야길 하는 사람", 일종의 선구자.

즉 "반시대적'이란 "철학적'이라는 뜻과 등가적으로 볼 수 있다. 

 

사랑은 '완벽하고 정당한 것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

자주 펼쳐보는 구절이다.

 

자기 자신에게도 또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믿음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믿음은  기다리고 견딜 수 있게 만든다.

자신과 타인에게 기회를 줄줄 아는 것이다.

 

"언제 동이 틀지 모르지만

동이 트리라 믿기 시작하면

우리는 문을 모두 열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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