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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부신 친구 나폴리 4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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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필생의, 눈부신 친구가 되는, 저 벅차고도 서늘한 우정의 과업을 놀랍도록 잘 포착한 소설!! 서정적 심미감은 서정적 문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깊은 시선에서 나오는 것임을 이 책을 읽으며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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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사랑이 싹트는 둥지(배경으로서의 공간) , 그리고 베껴쓰기

 

 

"사랑이 싹트는 둥지"(제가 임의적으로 붙인 제목)

 

원제: <알리는 말씀: 우리 모두 산림을 보호합시다> 중 일부

 

번역1

 

"사랑하는 남자는 연인의 '결점'에만, 여자의 변덕과 약점에만 애착을 갖는 것은 아니다.

얼굴의 주름, 기미, 낡아빠진 옷과 비뜰어진 걸음걸이가 모든 아름다움보다 훨씬 더 지속적으로  그리고 집요하게 그를 사로잡는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그렇다면 왜?

감각은 머릿속에 둥지를 트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창문, 구름, 나무를 뇌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것을 보는 장소에서 느낀다는 설이 있는데 , 그러한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애인을 바라볼 때도 우리 외부에 있게 된다. 하지만 고통스러울 정도로 긴장하며 완전히 마음을 빼앗긴 채, 현혹된 우리의 감각은

여자의 광휘를 새들 무리처럼 빙빙돈다.  그리고 새들이 잎이 무성한 나무의 은신처에서 보호처를 찾듯이 온갖 감각은 애인의 육체의 그늘진 주름 , 품위없는 동작, 눈에 잘 띄지않는 결점 속으로 도피해 그곳에서 안전하게 은신처에 몸을 숨긴다. 그리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은 바로 이곳, 즉 결점이 있는 곳, 비난받을 만한 곳에 한 여자를 숭배하는 남자의 화살처럼 빠른 연정이 둥지를 튼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출처: <알리는 말씀: 우리 모두 산림을 보호합시다>,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조형준 역, 새물결, 2007, 33쪽)

 

번역 2

 

 

사랑하는 사람은 애인의 '실수', 여성스러운 변덕이나 약점에만 연연해하지 않는다. 어떠한 아름다움보다 그의 마음을 더욱 더 오래, 더욱 더 사정 없이 붙잡는 것은 얼굴의 주름살, 기미, 낡은 옷, 그리고 기울어진 걸음걸이이다. 우리는 이를 이미 오래전에 경험했다. 어째서인가? 감정은 머리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학설이 맞는다면, 또한 창문, 구름, 나무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머릿속이 아니라 그것들을 본 장소에 깃들어 있다는 학설이 맞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애인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 자신을 벗어난 곳에 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는 고통스러울 정도의 긴장과 환희를 느낀다. 감정은 여인의 광채에 눈이 부셔서 새떼처럼 푸드득거린다. 그리고 잎으로 가려진 나무의 우묵한 곳에 은신처를 찾는 새처럼 감정은 사랑하는 육체의 그늘진 주름살, 투박한 몸짓,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결점을 찾아 그 안에 숨어 들어가 안전하게 은신처 안에서 몸을 움츠린다. 사모하는 사람에게 순식간에 일어나는 사랑의 떨림은 바로 거기, 결점이 되고 비난거리가 될 만한 것 안에 둥우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일방통행로>>,최성만 외 역,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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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짧은 단상의 제목이 왜 '산림을 보호하자'일까요. 우리가 사랑을 느끼는 곳이 우리 내부의 뇌가 아니라 우리의 감각이며, 타인을 바라볼 때조차도 본래의 모습보다 외부적 요소와 결합된 배경 속 모습에 더 현혹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듯이 '산림을 보호하는 것'도 우리가 무언가를 더 잘 느끼게 하는 그런 배경 공간을 하나 더 만드는 것일 수 있지요. 같은 사람도  상이한 공간적 배경 속에서는 다르게 느껴지니까요? 연인의 옷도 걸음걸이도 주름도 기미도 다 일종의 그녀 바깥의 공간적 배경이지요. 우리는 주관적인 것에 진정성을 부여하는 습관에 물들어있지만 진정성이 발휘하는 곳이 꼭 내면공간만은 아니란 이야길 벤야민은 하고 싶었나 봅니다.

 

사랑이 싹트는 둥지가 결점이 있는 곳, 비난받을 만한 곳이란 말은 참 시사적입니다. 어쩌면 관계 속에서 내가 작용할 공간이 확보되는 곳을 원하는지도 모르지요. 또 대저 약점이 있는 곳에 바로 그 장점이 숨겨져 있는 법이기도 하고요!! 아무도 모르는, 세밀히 들여다 보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런 그녀  혹은 그의 고유성!

 

2. 발터 벤야민은 텍스트를 베껴쓰는 일을 강조했어요. 그는 텍스트를 그냥 읽는 것과 베껴쓰는 것의 차이는 시골길을 비행기를 타고 풍경의 일부로 보느냐 아니면 걸어가면서 굽이굽이 펼쳐진 길의 멋진 조망을 세세히 맛보느냐의 차이와 같다는 것이죠. "베껴 슨 텍스트만이 그것에 몰두한 사람의 영혼에게 호령할 수 있는 반면, (텍스트에 의해 열린) 단순한 독자는 자기 내면의 새로운 광경들, 계속 다시 빽빽해지는 내면의 원시림 사이로 나 있는 길을 결코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저 읽기만 하는 사람은 몽상의 자유로운 하늘을 떠돌며자아의 움직임을 따르지만 베껴적는 사람은 그러한 움직임에 호령하기 때문이다."(같은 책,27쪽) . 그런 맥락에서 벤야민은 중국 서적의 필사전통을 중국 문예문화에 공헌한, 중국 문화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라 보았고, 그 필사본들을 '중국의 공예품'이라 보았죠.

 

3.

저 역시 베껴 써보았어요!! 벤야민의 뜻에 따라, 그의 글에 대한 경의로!!

작가 김훈은 훌륭한 문장을 쓰려면 좋은 문장을 많이 외워야 한다고 하였어요. '문장을 외우는 것', 이 역시 '입으로 베껴쓰기' 이죠. 외우면서 되새김질 하는 것! 텍스트 원저자의 생각 속을 걸어서 갖고 나온 글들을 다시 내 생각 속으로 넣어 굴리는 일. 어쩌면 "번역"도 그런 것이겠지요. 그래서 베껴쓰기를 좋아한  벤야민이  그의 번역이론에서 수용자인 독자보다 원저자의 의도를 더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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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유의 번역: "무릇 인생에서 우리를 슬프게 한 것이 예술에선 즐겨 감상할만한 것이 된다."

 

 

 

 

 

 

 

 

 

 

 

 

 

 

 

 

1.

어떤 분이 뷔르거의 이 시를 왕국유가 번역한 것을 놓고 원문보다 더 훌륭한 번역이라 하였어요.

왕국유는 뷔르거의 시를 뜻을 다치지 않고 시경에서 쓰는 문장형식을 빌어서 다시 쓴 것입니다.

이 또한 번역이지만 , 형식미를 본다면 새로운 작품이기도 하지요.

 

Gottfried August Bürger는 18세기 독일 발라드 시의 창시자로 알려졌지요. 뱀파이어를 등장시킨 시를 썼답니다.

 

"Ye wise men, highly, deeply learned,
Who think it out and know,
How, when, and where do all things pair?
Why do they kiss and love?
Ye men of lofty wisdom, say
What happened to me then;
Search out and tell me where, how, when,
And why it happened thus."


 - BURGER

 

嗟汝哲人,靡所不知,靡所不学,既深且跻。粲粲生物,罔不匹俦。各啮厥齿,而相厥攸。匪汝哲人,孰知其故。自何时始,来自何处?
  嗟汝哲人,渊渊其知。相彼百昌,奚而熙熙?愿言哲人,诏余其故。自何时始,来自何处?  (译文)/왕국유 번역

                                                          ————王國維先生《紅樓夢評論》

 

높고 심오한 지식을 지닌 철인들이여,

궁리해서 알려주세요.

만물들은 어떻게, 언제, 어디에서 짝을 짓는 걸까요?

왜 그들은 입맞추고 사랑할까요?

고귀한 지혜를 지닌 현자들이여,

말해주세요.

그때 무슨 일이 내게 일어났는가요?

어디에서, 어떻게, 왜 일이 그렇게 일어났는지를

알아내서 알려주세요.(tr by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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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yanruojiangcheng.blog.hexun.com.tw/3362308_d.html

왕국유의 <<홍루몽평론 >>

 

Gottfried August Bürger의 시를 왕국유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영문본에서 가져왔다. 실제 이 시가 원문에 있었는지 편집자나 번역자가 덧댓는지는 불명확...독어본을 봐야 암. 다른 영역본에는 없다.

 

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Supplements to the Third Book

 

The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 by Arthur Schopenhauer, translated by R B Haldane and J. Kemp  출처: 위키피디아 아랫부분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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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아미와 숭고미

 

"무릇 인생에서 우리를 슬프게 한 것이 예술에선 즐겨 감상할만한 것이 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인용된 괴테의 비유적 시를

왕국유가 <<홍루몽평전>>에서 재인용한 것입니다. 왕국유는 이를 '우아미'와 대비하여 '숭고미'를 설명하기 위해 인용했지요. "말하자면 숭고미란 사물과 나의 관계를 잊고 즐거워하는 것으로, 이는 우아미에는 없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이 두 미를 구별짓는 것이다. "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우아미는 사물과 나의 관계에서 긴장이 없습니다. 주객관이 저절로 일치하는것이죠. 저절로 아름답다고 여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당연히 아름다운 것이죠. 객관의 미는 우아미입니다. 아무런 되새김질 없이 누구나 인정하는 미. 물론 우아미에서도  숭고함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은 미미한 정도고 낮은 차원의 숭고미입니다. 그러나 숭고미는 어떤 대상이 객관적으로가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 수용을 거쳐 다시 아름다움으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객관과 주관의 거리가 멀수록 숭고미는 커지죠. 우아미에는 추의 미가 없지만 숭고미에는 '추의 미'가 있는 거지요!! 슬픔의 미, 슬픔의 즐거움도 그렇고요.

이것을 왕국유는 '경계'로 설명했어요. 한마디로 경계내의 미는 '우아미優美'이고, 경계를 넘나드는, 한 경계에서 다른 경계로 이륙하는 미는 '숭고미 壯美' 이지요! 인용문처럼 대상에 대한 자신의 슬픔을 잊고 기쁨으로의 경지까지 드높여지는 미", 단순한 초월이 아니라 내적 수용을 통해 승화시킨 미, 압도적 상태에서 대상에 대한 슬픔-관계-를 망각한 미...이런 게 숭고미라 본 거지요.

 

" 千復格代之詩曰:

    What in life doth only grieve us.
    That in art we gladly see.

 

凡人生中足以使人悲者,於美術中則吾人樂而觀之。此之謂也。此即所謂壯美之情,

而其快樂存於使人忘物我之關系,則固與優美無以異也

 

영문번역판:  "What in life doth only grieve us, That in art we gladly see."

 

원문:: "Was im Leben uns verdrießt, Man im Bilde gern genießt."---괴테/원문

원출처 : Parabolisch. [411] Was im Leben uns verdrießt,. Man im Bilde gern genießt[411]  

http://en.wikisource.org/wiki/The_World_as_Will_and_Representation/Supplements_

to_the_Third_Book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독일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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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사회와 닫힌 사회: 나보코프와 이광수 혹은 백석

 

 

 

 

 

 

 

 

 

 

 

 

 

 

 

어제 나보코프의 일대기를 읽으면서 같은 시대 우리 문인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제국주의와 전쟁이 겹쳤던 시기, 우리로는 식민지 시대였던 19세기 말 20세기 초엽.

이시기의 지식인들은 거의 유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도 나오듯이 제정 러시아 시기에 상류층은 불어를 해야만

교양인 대접을 받았고, 사교계에선 일상적으로 불어가 통용되었어요. 이시기엔 불어가 고급 문화를 뜻하는 언어여서 독일도 상류층은 불어를 가르치려고 노력했죠. 우리나라에서 양반이 한문을 먼저 가르친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16세기에 몽테뉴는 라틴어를 먼저 배우죠.

나보코프도 유아기와 소년기에 영어와 불어를 배웁니다. 심지어 러시아어보다 영어를 먼저 배웠죠.

나치를 피해 유럽에 가고, 또 미국으로 간 나보코프는 이 때 배운 영어로 미국 생활에 성공적으로 정착합니다. 미국의 잡지에 기고하고, 교수 자리를 얻고, 영어로 소설을 발표합니다. 슬라브계 이민의 도움이 컸어요.

 

백석도 한문과 한학을 먼저 배웁니다. 이후 그는 일본으로 유학해 영문학을 전공하였으니, 영어와 일어를 배웠죠. 또 러시아어를 배웠어요. 윤치호도 한문, 영어, 불어, 일어에 능통했고, 이광수도 한문과 일어에, 이승만은 한문과 영어에 능통했죠. 식민지의 지식인의 유랑의 세월은 언어와 문화의 저변을 넓혔어요. 그러나 불행한 시대의 우리 지식인은 불행하죠. 갈 데가 없어요. 목숨을 건져서 자신의 명예를 건질 탈출구가 없죠. 나치 시대에 탈출했다고 독일 지식인을 나무라는 국민은 없습니다. 우리 지식인은 일본에 가서 작품 활동을 하면 매국노고, 폐쇄적인 동양 사회에서 한국 소설가나 문인이 자리잡고 살 데는 없어요. 오직 내나라에 갇혀서 강압으로 일제에 협력하는 길을 택합니다. 그들은 절망해서 일본의 세상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줄 알고, 점진적인 개량을 꿈꿉니다. 내선일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우리도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자는 주장까지 하게 됩니다. 이런 주장은 반민족적 생각에서 온 것이 아니라 민족을 구하자는 생각에서 온 것도 있습니다. 급기야 그들은  '친일반민족주의자'란 오명을 쓰고  맙니다. 우리의 갇힌 사고는 우리의 지식인을 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시기의 토마스 만도 나보코프도 나오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랑 같이 역사의 몰매를 맞아 매몰되기를 바라죠. 후손인 우리가 그들에게 죽음을 요구할 권리가 있을까요?

 

 

나보코프를 읽으면서 참 안타깝다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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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가 말한 '사람은 자기만의 고유한 죽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시이론과 연관시켜서 쓴 글. 김수영의 글 속에 릴케의 글이 겹친다.

자기만의 고유한 죽음이란 자기만의 삶 속에서 구현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래는 김수영의 산문이다. 강신주의 <<김수영을 위하여>>를 읽다가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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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洙暎散文集 中 -<죽음과 사랑의 對極은 詩의 本隨>

 

 

사랑과 죽음의 素材는 우리나라의 詩에 있어서도 무수히 취급되어 왔고 또 오늘날도 취급되고 있지만, 그 중에 성공한 작품이 지극히 희소하고 또한 그 중에서도 자기 나름으로 성공한 작품이 全詩史를 통해서 가뭄에 콩나기 정도 밖에 없는 것을 보면, 이 흔한 소재가 얼마나 어렵고 높은 詩의 絶頂인가를 새삼스럽게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죽음과 사랑의 문제는 말할 필요도 없이 萬人의 萬有의 문제이며, 萬人의 궁극의 문제이며, 모든 문학과 詩의 드러나 있는 素材인 동시에 숨어있는 소재로 깔려있는 영원한 문제이며, 따라서 무한히 매력있는 문제이다. <사람은 죽을 곳을 알아야 한다>고 하지만 이 말은 詩에도 통한다. 어떻게 잘 죽느냐--- 이것을 알고 있는 詩人을 <깨어있는> 시인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완수한 작품을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우리들은 항용 말한다.
그런데 조금더 따지고 보면 <사람은 죽을 곳을 알아야 한다>는 말은, 사람은 자기만이 죽을 수 있는 장소와 때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이 말을 詩 에다 적용하는 경우에는 <자기나름>으로, 즉 자기의 나름의 스타일을 가지고 죽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말하면 영리한 독자는 또 獨創性에 대한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의 講話로구나 하고 눈살을 찌푸릴지 모르지만 모든 詩는--- 마르크스 主義의 詩까지도 합해서- 어떻게 자기나름으로 죽음을 완수했느냐의 문제를 검토하는 방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모든 詩論은 이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는 모습과 行方과 그 행방의 距離에 대한 해석과 測定의 의견에 지나지않는다. 죽음과 사랑을 對極에 놓고 詩의 새로움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詩라는 것이 얼마만큼 새로운 것이고 얼마만큼 낡은 것인가의 本質的인 默契를 알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필자의 말을 너무나 正統派的이고 고루하다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필자의 갈망은 훨씬 未來의 편에 서있다. 그리고 그러한 실험적인 미래의 詩의 관점에서 들여다볼 때 우리 詩壇의 작품들이 주는 환멸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자기도모르게 소위 正統派的인 防禦的 僞裝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막상 고의적인 것이라 치더라도 그다지 有害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필자는 알고 있다.
이러한 인내를 가지고 이 달의 작품을 살펴볼 때에도 及第點에 달하는 작품은 겨우 한 편.
金顯承의 (波濤) (現代文學 ) 정도이다. 이 정도의 작품이면 죽음을 디디고 일어선 자기의 스타일을 가진 강인한 精神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보다 훨씬 젊은층의 작품으로는 李姓敎의 (산으로 올라가는 집들을 위하여) (현대문학)가 미숙한대로 알찬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너무 급한 호흡을 한꺼번에 내쏟느라고 그런지 斷續의 부자연한 점이 보이기는 하지만 庶民生活의 건전 <窮狀>을 <통일>에의 꿈으로 치켜올린 뜨거운 정열이 차디찬 억제의 스타일 사이로 귀엽게 點火되고 있다. 그의 종래의 姑息的인 세계에 뚜렷한 龜裂이 생긴 것같고 그것만으로도 스타일에의 접근에 진전이 있었다고 보아야겠다.
<1967年 10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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