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ilight

                           Sara Teasdale

   Dreamily over the roofs
   The cold spring rain is falling;
  Out in the lonely tree
   A bird is calling, calling.

  Slowly over the earth
   The wings of night are falling;
  My heart like the bird in the tree
   Is calling, calling, cal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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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깁니다.

 

<황혼>

 

지붕위로 꿈결같이

차가운 봄비 내리네

홀로 선 나무 위 

새 한마리  울고 또 우네

 

지상위로 느리게

밤의 날개 내리네

내마음 나무 위 그  새 마냥

울고 또 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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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위로  내려앉는 차가운 봄비

땅위로  날개접고 내려앉는  밤

홀로 선 나무위 날개접은  새 한마리

울고 또 우는 새

그 새처럼 우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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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은 순진한 마음으로 종교를 믿는 사람이다. 그 종교가 그리스도교건 이슬람교건 불교이건 호텐토트의 신이건, 에스키모의 신이건, 천황상제인건 그 교리와 은총늘 그대로 믿는다. 그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은 그러니 그  신앙에 좌우당한다. <카마라조프가의 형제들> 속에 나오는 이반의 <대심문관>이 말한 "수억을 헤아리는 어린애 같은 인류'가 이 족속에 속할지는 모른다.

 이와는 달리 신앙주의자는 신앙을 신앙 외적인 목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부류를 말한다. 그 대표적인 예를 문학작품 속에서 찾으면 스탕달의 <적과 흑>의 줄리앙 소렐 같은 사람이다. 줄리앙 소렐은 출세하기 위한 수단이면 군인이 되건 승려가 되건 마음의 구애를 받지 않을 위인이다. 신앙주의자는 갖고 있지도 않은 신앙을 가진 척 한다. 신앙을 갖고 있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범상한 신앙 생활엔 만족할 수 없어 세속적인 지배 권력으로 대입시키지 않곤 배겨내지 못하는 사람도 이 부류에 든다.

 또는 많은 사람을 자기와 같은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해 약간의 술책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실천하는 사람도 신앙주의자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생존경쟁의 양상을 띤 생활의 현장에서 이러한 신앙주의자일수록 지기 싫어하는 자존심과 의욕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의 본연에서 일탈하여 세속인 이상으로 세속적인 수렁에서 헤매는 결과를 빚는다. 기독교의 분파, 불교 승단의 분열 등은 신앙인들을 신앙주의자들이 압도한 때문이라고 나는 풀이한다.

 

 교회라는 조직없이 신앙을 가꾸어 나가기란 힘들고, 조직 속에 들기만 하면 신앙과는 일탈해야 하는 이 묘한 모순은 그대로 조직으로서의 신앙의 문제라는 중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

  

-----------------<이병주의 동서양 고전탐사>,1권, 생각의 나무,171 쪽-----

  

 신앙인을 보면 존경의 념이 든다. 한 가치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여 의존할 수 있는 단순함, 혹은 초탈함이 사람을 숙연하게 한다. 철학이란 어찌보면 허망을 배우는 학문이다. 그 허망에만 빠져 있으면 허무주의자가 되고 만다. 생각하고 산다는 것은 그만큼 일상의 행복에서 멀어지는 것이고 어찌보면 어리석음을 배우는 길이다. 현명하려 애쓰는 것이 어리석은 길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자각할 때 철학의 허망은 의미가 있다. 이 모순을 넘어서지 못하면 나 같은 생각쟁이는 우울 속에서 헤맬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신앙인은 이 많은 여과를 거치지 않고도 본질을 배워 버린 듯 해서 그 앞에서는 주눅이 든다. 애써서 얻는 것도 값진 것이지만 애쓰지 않고도 얻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천품이 가진 행운이리라. 마치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사랑을 받는 사람처럼 행운아다. 노력하고 애써 얻은 사랑보다 덜 상처를 지닌.

 신앙인처럼 사랑도 의문없이 그냥 받아들이는 사랑을 할 수 있다면 행운이다.

긴 편지를 쓸 필요가 없는 사랑, 분석도 생각도 그리움도 필요 없는 사랑.

내게 유용하나 무용하나 따지지 않고, 비교하지 않고  통째로 받아들이는 사랑.

신앙인의 신에 대한 사랑 또한 그러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런 신앙이 그런 사랑이 단순한 듯 해도

 사랑의 요체를 저절로 습득한 것은 아닌가 싶어, 삶의 고수를 들여다 본 느낌이 든다. 아무리 의미를캐고 온갖 지식을 동원해 정의를 내리고, 질투를 해도 얻어질 수 없는 경지 말이다. 그런 종교인을 만나거나 그런 천품의 사람을 만나면 나는 고개를 수그리게 된다. 내 자신이 그러한 것과는 quf개로.

 

 그러나 신앙주의자에 이르면 매끄러운 처세주의자를 보는 느낌이 들어 거북하다. 신앙의 알맹이가 없는 허위를 보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의 성공과 노력이 신앙인을 확대하고 종교를 세세토록 계승시키는 데 필요불가결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 조직을 무턱대고 경원할 수만은 없다. 조직없이 몇 천년을 원형보존을 하면서 내려오는 종교란 없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나오는 카톨릭조직의 수장을 대표하는 <대심문관>이 나사렛 예수 앞에서 떳떳이 떠나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다. 천상의 왕국이 지상의 왕국의 조직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자신감 말이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일상의 모든 것들 중에서 성공주의자들의 피와 땀의 결과인 것이 얼마나 많은가를 돌아보면, 자족하는 삶에 마냥 초연한 듯 찬양만 할 수 없다. 그들의 노력을 인정해 주지 않을 도리라 없다. 거기에 사람사는 모순이 있다. 빵없는 자유가 힘들듯이 조직없는 개인이 살아갈 방도가 없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신앙이 제도를 통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강화될 수 밖에 없는데 그 제도 속에 들어가면 신앙과 일탈해야 하는 모순을 말한 이병주의 지적은 종교적 조직 뿐만아니라 여타 제도에 관해서 여러 시사를 해준다. 사랑과 결혼의 관계 또한  그러하다. 제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도 결혼이란 제도를 통해야만 지속력을 지니고 생활을 통해 강화되어 간다. 그러나 실제 사랑의 원형을 보존하면서 지속되는 결혼은 드물다.  타협이 남을 뿐이다. 무정부주의나 무교회주의를 꿈꾸듯 느슨한 형태의 결혼 제도를 꿈꾸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삶의 현실은 모순태다.

"사람은 탁한 강물이다. 이 탁한 강물을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고 받아들이려면 바다가 되어야 한다."니체의 <자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한 귀절이다. 모순을 넘어 바다의 경지를 이룰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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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橋曉別》李商隱

  回望高城落曉河,長亭窗戶壓微波。
水仙欲上鯉魚去,一夜芙蓉紅淚多。

고개돌려 바라보았지.

 저멀리 높은 성엔 새벽 은하수.

길다란 누각의 창문 아래 일렁이는 잔물결.

잉어를 타고 떠나려는 수선때문에

밤새도록 부용이 붉은 눈물 흘리네.

(tr by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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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한시구절은 시경에 이미 나온 구절이기도 하고 당대 시인 이상은의 <새벽 판교에서의 이별 板橋曉別>에서 따온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은은 이 시를 조나라 사람 금고가 신선술을 익혀 잉어를 타고 물속에서 산 고사와 위나라 문제의 비 설령운이 부모와 이별하면서 흘린 '붉은 눈물'의 고사에서 따왔습니다. 수선은 나그네를 뜻했다 합니다. 판교는 널판지로 된 다리이지요.

이시를 원용해 장아이링(張愛玲)의 첫 남편 후란청胡兰成은 자신 诗에 비슷한 구절“水仙已乘鲤鱼去,一夜芙蓉红泪多”을 넣습니다. 장아이링을 보내는 마음을 시에 담은 거지요. (후란청은 '색계'에도 나오는 상하이 일본괴뢰정부의 고관입니다. 양가위가 분한 첩보대장 노릇을 했어요. 그런 남편을 두었기에 장아이링이 당시를 떠들석하게 했던 사건의 내막을 소설화 했지요.)
후란청의 시와 저 사진의 구절은 앞귀절이 약간 다르지요. '수선이 잉어를 타고 이미 떠났네'란

뜻이니 말입니다.근래에 들어  소설가 장웨란[張悅然]은 동명의 소설 <水仙已乘鯉魚去>(수선을 타고 간 잉어)를   내놓습니다.

어쨌든 이 시는 슬픈 이별시입니다. 수선과 잉어는 중국시에서 어울리는 한쌍입니다. 수선은  잉어를 타고 멀리 떠나고 싶어합니다. 고대시에서 '멀리 간다'는 것은 출세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좋은 동반을 만나 떠나는 친구를 두고 부용, 즉 연꽃은 밤새도록 눈이 발갛게 붓도록 눈물을 흘리지요. 하지만 수선은 잠시 돌아보고 맙니다. 먼 길 떠나는 설레임이 커서요.

이별의 슬픔에 '붉은 눈물이 두 눈에 가득 괸 부용이란 처녀가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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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leon, 중국 이름으론 馬良이란 세계적인 사진작가의 작품에도 이 시를 모티브로 한 것이 있습니다.

 http://www.maleonn.com/?p=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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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는 고통의 순간에 신은 어디 있는가의 문제를 17세기 일본 기독교 선교 당시의 박해상황을 소재로 하여 치밀하게 묻고 있다.
성화를 밟아 신앙을 부인해야만 살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 즉 종교적 신앙과  인간적 실존이 상치되는 순간, 로마교황청의 파견 신부 로드리고는 십자가 앞에서 침묵하는 신을 향해 그리스도를 반추하며 신의 침묵의 의미를 묻게 된다. 그는 신인 그리스도가 인간으로서 이땅에 와 십자가에 그대로 못밖힌 의미가 바로 인간적 고통을 끌어안고 나누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라면 여기 고통박고 박해받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성화를 밟았으리라고. 신앙은 그리스도의 정신에 있는 것이지 맹목적인 교리나 상징, 제도의 순종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엔도 슈사쿠는 말하고 싶었으리라.

 

인간적 진실과 신앙의 진리가  상반될 때 신은 사실 신적인 것을 침묵함으로써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숨은 신' 이상으로 자비로운 신은 없는 것이다.

 

(인상적인 구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도둑질을 한다거나 거짓말을 하는 그런 것이 죄가 아니었다. 죄란, 인간이 또 한 인간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거기에 남긴 흔적을 망각하는 데 있었다." 

"매력이 있는 것, 아름다운 것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아니다. 색 바랜 누더기처럼 되어 버린 인간과 인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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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의 줄거리를 크리스챤마음연구원의 김세준 연구원의 칼럼에서 빌어와 소개한다.

(http://soul-healing.org/chnet2/board/index.html?id=103&code=column01&cate=&start=30&category=&word=&viewType=&category_id=&category_name=&gfile=view&sid=)

참, 로드리고의 개명 오카다 산에몬은 실존인물에서 빌어 온 것이다.

  

'침묵'은 일본에 선교를 하던 포르투칼의 신부가 배교했다는 사실이 교황청에 알려지면서 시작된다. 일본 선교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다시금 보내지는 신부들은 배교한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로드리고라는 열렬한 페레이라의 수제자도 있었다. 그들은 침몰한 정크선처럼 좌초당한 일본선교를 재건하기 위한 불굴의 신앙심과 더불어 그렇게 존경에 마지않던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한 사실에 대한 궁금증이 뒤엉켜 있었다.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승선하는 신부들은 순교자체는 얼마든지 두렵지 않은듯했다. 뜨거운 물을 몸에 조금씩 부으면서 살이 벗겨지는 고문이라든지 열탕에 집어넣는 고문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문에 대한 소식을 접할때에도 신부들에게는 신앙으로 인해 참된 죽음을 맞이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을 뿐이다. 이는 페레이라 신부도 마찬가지 였을텐데 어찌 배교가 있을 수 있는지 궁금증은 더해만 갔다. 
 

일본에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로드리고와 가르페 신부는 아직도 잔존한 신도들의 도움으로 신도들에게 성례성사를 베풀고 고해성사를 하면서도 페레이라 신부의 행적을 찾아봤으나 알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한번 배교한 경험이 있는 일본 청년 기치지로의 밀고로 두 신부는 일본 신자들과 잡히게 된다. 로드리고는 가차없이 참수당하는 가르페 신부와 일본 신자들의 모습속에서도 신앙을 부인하지 않는다. 
 

일본관리는 예수의 모습이 그려진 성화를 밟게 함으로 신자들을 구별하거나 배교를 유도하게 하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성도들의 모습이 드러나고 성화를 밟기보다 죽음을 택하는 일본 사람들의 신앙을 로드리고 신부는 묵도하게 된다. 어떠한 고문이 닥쳐도 결코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을 수 없는 신앙인의 실존, 옆방에서 인간의 미약한 소리가 감옥 관리자의 코고는 소리로 들리지만 실은 고통에 신음하는 신도들의 소리라는 것을 알면서 몸서리치면서 배교하여 사와노라는 일본 이름으로 살고 있는 페레이라 신부를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참혹하리만큼 고통스럽게 신앙으로 인하여 또는 신부를 위하여 죽어가는 일본 성도들의 모습을 견디면서 컴컴한 감옥 벽에 손가락이 문드러 질 정도로 새겨넣은 LAUDATE EUM(주님을 찬양하라)라는 글을 써넣으며 기도했지만 하나님이 무엇하나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 그 하나님의 침묵을 괴로워하며 저들을 위해서라면 그리스도도 배교햇을 것이라는 페레이라 신부의 말에 로드리고는 성화를 밟기로 결심하게 된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알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어진 것이다 라는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많은 일본인들이 밟아서 우묵하게 들어간 성화속의 그분의 얼굴은 괴로운듯이 로드리게 신부의 모습을 보면서 호소하고 있었다. "밟아도 좋다. 밟아도 좋다.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나는 존재한다"

 

그렇게 배교한 로드리게 신부에게 사람들은 '배교자 바오로(베드로)'라고 놀림의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그럴즈음 자신을 밀고하였던 기치지로가 찾아와 고해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 고해를 자신은 이제 신부가 아니라며 거부하는 로드리고에게 기치지로는 울먹이며 말한다.
'이 세상에는 말입니다. 약한자와 강한자가 있습니다. 강한 자는 어떤 고통이라도 극복하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만, 저 같이 천성이 약한 자는 성화를 밟으라는 관리의 고문을 받으면...."
그런 가치지로에게 로드리게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강한자도 약한자도 없는 거요. 강한 자보다 약한자가 고통스럽지 않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소. 이 일본 땅에 당신의 고해를 들을 신부가 없다면, 내가 기도의 말씀을 외우겠소. 모든 고해의 마지막에 올리는 기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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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I become myself

 
 
Now I become myself. It's taken
Time, many years and places,
I have been dissolved and shaken,
Worn other people's faces,
Run madly, as if Time were there,
Terribly old, crying a warning,
"hurry, you will be dead before -----"
(What? Before you reach the morning?
or the end of the poem, is clear?
Or love safe in the walled city?)
Now to stand still, to be here,
Feel my own weight and density!.....
Now there is time and Time is young.
O, in this single hour I live
All of myself and do not move
I, the pursued, who madly ran,
Stand still, stand still, and stop the Sun!
 
                                      ~ May Sarton ~
 
(Collected Poems 1930-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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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 봅니다.
 
나, 이제 내가 되었네
많은 세월 이곳 저곳 떠도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지
수없이 다른 사람의 얼굴로 사느라
나는 부서지고 녹아버렸네
 
마치 시간이  충분한 듯
미치도록 달리기만 했네
이제 등이 굽어서야
 경고의  말을 내뱉지
"서둘러라, 네가 .....을 하기 전에
죽을 수도 있으니"
( 무엇을? 너의 아침이 오기전에?
아니, 그전에 이 시는 끝낼 수는 있을까?
성채같은 죽음에서 사랑은 안전할까?)
 
이제 여기 고요히 멈춰서서
나 자신의 무게와 밀도를 느끼네
이제사 시간이 여유롭고 젊어졌지.
 
오, 이 단 한순간 속에 나는
내 전부을 살며, 움직이지 않으리라
 무언가에 쫒겨 미친듯 달려와,
나, 이제  고요히, 고요히 멈춰서네
태양이여, 너도 멈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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