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쿠는 고통의 순간에 신은 어디 있는가의 문제를 17세기 일본 기독교 선교 당시의 박해상황을 소재로 하여 치밀하게 묻고 있다.
성화를 밟아 신앙을 부인해야만 살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 즉 종교적 신앙과  인간적 실존이 상치되는 순간, 로마교황청의 파견 신부 로드리고는 십자가 앞에서 침묵하는 신을 향해 그리스도를 반추하며 신의 침묵의 의미를 묻게 된다. 그는 신인 그리스도가 인간으로서 이땅에 와 십자가에 그대로 못밖힌 의미가 바로 인간적 고통을 끌어안고 나누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리스도라면 여기 고통박고 박해받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성화를 밟았으리라고. 신앙은 그리스도의 정신에 있는 것이지 맹목적인 교리나 상징, 제도의 순종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엔도 슈사쿠는 말하고 싶었으리라.

 

인간적 진실과 신앙의 진리가  상반될 때 신은 사실 신적인 것을 침묵함으로써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숨은 신' 이상으로 자비로운 신은 없는 것이다.

 

(인상적인 구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도둑질을 한다거나 거짓말을 하는 그런 것이 죄가 아니었다. 죄란, 인간이 또 한 인간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거기에 남긴 흔적을 망각하는 데 있었다." 

"매력이 있는 것, 아름다운 것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아니다. 색 바랜 누더기처럼 되어 버린 인간과 인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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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의 줄거리를 크리스챤마음연구원의 김세준 연구원의 칼럼에서 빌어와 소개한다.

(http://soul-healing.org/chnet2/board/index.html?id=103&code=column01&cate=&start=30&category=&word=&viewType=&category_id=&category_name=&gfile=view&sid=)

참, 로드리고의 개명 오카다 산에몬은 실존인물에서 빌어 온 것이다.

  

'침묵'은 일본에 선교를 하던 포르투칼의 신부가 배교했다는 사실이 교황청에 알려지면서 시작된다. 일본 선교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다시금 보내지는 신부들은 배교한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로드리고라는 열렬한 페레이라의 수제자도 있었다. 그들은 침몰한 정크선처럼 좌초당한 일본선교를 재건하기 위한 불굴의 신앙심과 더불어 그렇게 존경에 마지않던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한 사실에 대한 궁금증이 뒤엉켜 있었다.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승선하는 신부들은 순교자체는 얼마든지 두렵지 않은듯했다. 뜨거운 물을 몸에 조금씩 부으면서 살이 벗겨지는 고문이라든지 열탕에 집어넣는 고문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문에 대한 소식을 접할때에도 신부들에게는 신앙으로 인해 참된 죽음을 맞이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을 뿐이다. 이는 페레이라 신부도 마찬가지 였을텐데 어찌 배교가 있을 수 있는지 궁금증은 더해만 갔다. 
 

일본에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로드리고와 가르페 신부는 아직도 잔존한 신도들의 도움으로 신도들에게 성례성사를 베풀고 고해성사를 하면서도 페레이라 신부의 행적을 찾아봤으나 알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한번 배교한 경험이 있는 일본 청년 기치지로의 밀고로 두 신부는 일본 신자들과 잡히게 된다. 로드리고는 가차없이 참수당하는 가르페 신부와 일본 신자들의 모습속에서도 신앙을 부인하지 않는다. 
 

일본관리는 예수의 모습이 그려진 성화를 밟게 함으로 신자들을 구별하거나 배교를 유도하게 하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성도들의 모습이 드러나고 성화를 밟기보다 죽음을 택하는 일본 사람들의 신앙을 로드리고 신부는 묵도하게 된다. 어떠한 고문이 닥쳐도 결코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을 수 없는 신앙인의 실존, 옆방에서 인간의 미약한 소리가 감옥 관리자의 코고는 소리로 들리지만 실은 고통에 신음하는 신도들의 소리라는 것을 알면서 몸서리치면서 배교하여 사와노라는 일본 이름으로 살고 있는 페레이라 신부를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고 참혹하리만큼 고통스럽게 신앙으로 인하여 또는 신부를 위하여 죽어가는 일본 성도들의 모습을 견디면서 컴컴한 감옥 벽에 손가락이 문드러 질 정도로 새겨넣은 LAUDATE EUM(주님을 찬양하라)라는 글을 써넣으며 기도했지만 하나님이 무엇하나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 그 하나님의 침묵을 괴로워하며 저들을 위해서라면 그리스도도 배교햇을 것이라는 페레이라 신부의 말에 로드리고는 성화를 밟기로 결심하게 된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알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어진 것이다 라는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많은 일본인들이 밟아서 우묵하게 들어간 성화속의 그분의 얼굴은 괴로운듯이 로드리게 신부의 모습을 보면서 호소하고 있었다. "밟아도 좋다. 밟아도 좋다.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나는 존재한다"

 

그렇게 배교한 로드리게 신부에게 사람들은 '배교자 바오로(베드로)'라고 놀림의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그럴즈음 자신을 밀고하였던 기치지로가 찾아와 고해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 고해를 자신은 이제 신부가 아니라며 거부하는 로드리고에게 기치지로는 울먹이며 말한다.
'이 세상에는 말입니다. 약한자와 강한자가 있습니다. 강한 자는 어떤 고통이라도 극복하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만, 저 같이 천성이 약한 자는 성화를 밟으라는 관리의 고문을 받으면...."
그런 가치지로에게 로드리게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강한자도 약한자도 없는 거요. 강한 자보다 약한자가 고통스럽지 않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소. 이 일본 땅에 당신의 고해를 들을 신부가 없다면, 내가 기도의 말씀을 외우겠소. 모든 고해의 마지막에 올리는 기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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