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인은 순진한 마음으로 종교를 믿는 사람이다. 그 종교가 그리스도교건 이슬람교건 불교이건 호텐토트의 신이건, 에스키모의 신이건, 천황상제인건 그 교리와 은총늘 그대로 믿는다. 그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은 그러니 그 신앙에 좌우당한다. <카마라조프가의 형제들> 속에 나오는 이반의 <대심문관>이 말한 "수억을 헤아리는 어린애 같은 인류'가 이 족속에 속할지는 모른다.
이와는 달리 신앙주의자는 신앙을 신앙 외적인 목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부류를 말한다. 그 대표적인 예를 문학작품 속에서 찾으면 스탕달의 <적과 흑>의 줄리앙 소렐 같은 사람이다. 줄리앙 소렐은 출세하기 위한 수단이면 군인이 되건 승려가 되건 마음의 구애를 받지 않을 위인이다. 신앙주의자는 갖고 있지도 않은 신앙을 가진 척 한다. 신앙을 갖고 있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범상한 신앙 생활엔 만족할 수 없어 세속적인 지배 권력으로 대입시키지 않곤 배겨내지 못하는 사람도 이 부류에 든다.
또는 많은 사람을 자기와 같은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해 약간의 술책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실천하는 사람도 신앙주의자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생존경쟁의 양상을 띤 생활의 현장에서 이러한 신앙주의자일수록 지기 싫어하는 자존심과 의욕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의 본연에서 일탈하여 세속인 이상으로 세속적인 수렁에서 헤매는 결과를 빚는다. 기독교의 분파, 불교 승단의 분열 등은 신앙인들을 신앙주의자들이 압도한 때문이라고 나는 풀이한다.
교회라는 조직없이 신앙을 가꾸어 나가기란 힘들고, 조직 속에 들기만 하면 신앙과는 일탈해야 하는 이 묘한 모순은 그대로 조직으로서의 신앙의 문제라는 중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
-----------------<이병주의 동서양 고전탐사>,1권, 생각의 나무,171 쪽-----
신앙인을 보면 존경의 념이 든다. 한 가치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여 의존할 수 있는 단순함, 혹은 초탈함이 사람을 숙연하게 한다. 철학이란 어찌보면 허망을 배우는 학문이다. 그 허망에만 빠져 있으면 허무주의자가 되고 만다. 생각하고 산다는 것은 그만큼 일상의 행복에서 멀어지는 것이고 어찌보면 어리석음을 배우는 길이다. 현명하려 애쓰는 것이 어리석은 길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자각할 때 철학의 허망은 의미가 있다. 이 모순을 넘어서지 못하면 나 같은 생각쟁이는 우울 속에서 헤맬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신앙인은 이 많은 여과를 거치지 않고도 본질을 배워 버린 듯 해서 그 앞에서는 주눅이 든다. 애써서 얻는 것도 값진 것이지만 애쓰지 않고도 얻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천품이 가진 행운이리라. 마치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사랑을 받는 사람처럼 행운아다. 노력하고 애써 얻은 사랑보다 덜 상처를 지닌.
신앙인처럼 사랑도 의문없이 그냥 받아들이는 사랑을 할 수 있다면 행운이다.
긴 편지를 쓸 필요가 없는 사랑, 분석도 생각도 그리움도 필요 없는 사랑.
내게 유용하나 무용하나 따지지 않고, 비교하지 않고 통째로 받아들이는 사랑.
신앙인의 신에 대한 사랑 또한 그러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런 신앙이 그런 사랑이 단순한 듯 해도
사랑의 요체를 저절로 습득한 것은 아닌가 싶어, 삶의 고수를 들여다 본 느낌이 든다. 아무리 의미를캐고 온갖 지식을 동원해 정의를 내리고, 질투를 해도 얻어질 수 없는 경지 말이다. 그런 종교인을 만나거나 그런 천품의 사람을 만나면 나는 고개를 수그리게 된다. 내 자신이 그러한 것과는 quf개로.
그러나 신앙주의자에 이르면 매끄러운 처세주의자를 보는 느낌이 들어 거북하다. 신앙의 알맹이가 없는 허위를 보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의 성공과 노력이 신앙인을 확대하고 종교를 세세토록 계승시키는 데 필요불가결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 조직을 무턱대고 경원할 수만은 없다. 조직없이 몇 천년을 원형보존을 하면서 내려오는 종교란 없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나오는 카톨릭조직의 수장을 대표하는 <대심문관>이 나사렛 예수 앞에서 떳떳이 떠나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다. 천상의 왕국이 지상의 왕국의 조직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자신감 말이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일상의 모든 것들 중에서 성공주의자들의 피와 땀의 결과인 것이 얼마나 많은가를 돌아보면, 자족하는 삶에 마냥 초연한 듯 찬양만 할 수 없다. 그들의 노력을 인정해 주지 않을 도리라 없다. 거기에 사람사는 모순이 있다. 빵없는 자유가 힘들듯이 조직없는 개인이 살아갈 방도가 없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신앙이 제도를 통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강화될 수 밖에 없는데 그 제도 속에 들어가면 신앙과 일탈해야 하는 모순을 말한 이병주의 지적은 종교적 조직 뿐만아니라 여타 제도에 관해서 여러 시사를 해준다. 사랑과 결혼의 관계 또한 그러하다. 제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도 결혼이란 제도를 통해야만 지속력을 지니고 생활을 통해 강화되어 간다. 그러나 실제 사랑의 원형을 보존하면서 지속되는 결혼은 드물다. 타협이 남을 뿐이다. 무정부주의나 무교회주의를 꿈꾸듯 느슨한 형태의 결혼 제도를 꿈꾸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삶의 현실은 모순태다.
"사람은 탁한 강물이다. 이 탁한 강물을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고 받아들이려면 바다가 되어야 한다."니체의 <자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한 귀절이다. 모순을 넘어 바다의 경지를 이룰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