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같은 작품은 줄거리로 읽기 보다는 부분적으로 한 단락씩 '단상'처럼 '시'처럼 읽으면 좋지요. 그 이유가 형식의 운문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독일문학이 지닌 의도적인 불완전성과 내면성에 있다는 것을 다음 글에서 배웠습니다.

 

다음은 경북대 변학수 교수님의 논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

"이런 내면성에서 20세기의 독일어의 거장 베른하르트 또한 멀리 물러나 있지 않다. 그는 옛 거장들의 등장인물 레거를 통해서 책읽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나는 내 생애에 단 한 번도 책 한 권을 완전히 다 읽어 본적이 없습니다 [...] 반드시 괴테와 칸트의 작품 전체를 다 읽을 필요는 [...] 없습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친화력’의 몇 쪽만을 읽으면 우리는 마지막에 우리가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을 경우보다 더 큰 만족을 얻고 이 두 책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 우리는 완결되지 않은 작품들에서 바로 최고의 기쁨을 얻습니다 [...] 어떤 완벽한 것을 불완전한 것으로 바라보게 되면, 그때서야 우리는 큰 기쁨, 때에 따라서는 최고의 기쁨을 얻습니다.17)

어떻게 글을 쓰면 읽는 사람이 “몇 쪽만을 읽는 데” 전체를 읽는 것보다 더 큰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 약간의 과장이 있다손 치더라도 사실은 빌헬름 마이스터, 아테네움 단편, 심정토로, 파우스트 그리고 위에서 열거한 작가들의 작품 모두 이런 경향성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독문학은 어떤 사회적 내용을 골자로 한 사회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독일문학의 불완전함의 문체, 언어 이전의 내면적 상황을 지시하는 의도적 불분명함은 개개의 장르나 어느 한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미 경건주의와 목사관의 언어가 시작된 이래, 꾸준히 독일문학을 지배해 온 언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경향성 때문에 독일의 소설은 한국의 독자가 읽기 어렵다. 한국문학에서는 그에 비해 ‘완성품’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연유에서 이런 문학은 특수한 독자에게 읽힐 뿐 그렇지 않은 독자에게는 불편함만을 가중할 뿐이다."

출처: 변학수, 문화로서의 글쓰기한국과 독일의 글쓰기 문화의 비교해석 , 뷔히너학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조지 엘리엇은 19세기 농촌마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가입니다.

특히 그녀의 소설 <<미들 마치>>는 미시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를 제공하고, 그 자체 미시사나 다름없지요. 흔히들 미시사를 일상의 자잘구례한 역사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오인하는데, 미시사는 그 자잘구레한 표본 연구를 통해 거시사적 해석에 어떤 기여를 해야 합니다. 즉 미시사는 거시사와 유기적으로 연관이 될 때, 그 연구의 의미가 있는 것이죠.

 

조지 앨리엇의 <<싸일러스 마아너>>를 읽다가, 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전의 소박한 농촌공동체에서는 사람들이 은연 중에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며, 스스로 삼가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이웃보다 잘난 사람도 없으며 그렇다 하더라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죠.

 

글 두 꼭지를 놓습니다.

 

 

1.

래블로의 주민들은 그다지 규칙적으로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달력에 나와있는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간다는 것은 하느님한테 잘 보여서,

부당하게도 자기 이웃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려는 탐욕스러운 속셈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은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보통사람들'보다 나아지겠다는 욕심이고,

그래서 자기네와 마찬가지로 대부와 대모가 있고 장례미사를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들을 은근히

비난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하인이거나 젊은이가 아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축일 중

어느 한 번은 성체를 모시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도 누구나 인정하는 일이었다. 캐쓰 나리 자신도

크리스마스에 성체를 배령했다. 반면에 '착한 사람들'이라고 간주되는 사람들은 더 자주, 그러나

과하지 않게 교회에 갔다. 윈스롭부인은 바로 이런 착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조지 앨리엇, <<싸일러스 마아너>>, 김승순 옮김, 창비, 2003, 127-8쪽

 

 

2.

 

 

 

 

 

 

 

 

 

 

 

 

 

 

<나무 1>.....신경림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나고 큰 나무

제 치레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 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

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 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크라우스에게서는 교양이란 말의 원래 의미를 아주 정확히 보게 된다. 크라우스는 훗날 어떤 삶을 살게 되든지 어디서나 유용한 인간으로, 그렇지만 교양은 없는 인간으로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는 어디까지나 교양을 갖춘 인간이다. 그는 확고부동하고 온전한, 깨지지 않는 전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크라우스야말로 인간적 교양 그자체라 할 수 있다. 그의 주변에는 날개를 달고 속삭여대는 지식들이 날아다니지 않는다. 그 대신 무엇인가가 그의 내면에 들어 있다. 그는, 그는 그 무엇 위에 가만히 있고, 그리고 그 무엇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는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결코 누군가를 속이거나 헐뜯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것을, 이 수선스럽지 않음을 나는 교양이라 부른다. 수다스러운 자는 사기꾼이다. 그가 매우 친절한 사람일 수는 있지만, 자기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을 모두 뱉어내지 않으면 못배기는 그의 단점은 그를 비열하고 나쁜 친구로 만들 것이다. 크라우스는 비밀을 간직하고 남에게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막 떠들어댈 필요 따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미덕, 그리고 적극적인 보호작용을 한다. 나는 그것을 교양이라고 부른다. 크라우스는 자기 나이 또래의 남자아이들에게 무뚝뚝하며 때로는 거칠게 대하기도 한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나는 그를 너무나도 좋아한다. 그점이 그가 잔인하고 경솔한 배신 같은 것은 전혀 할 줄 모르며, 할 수도 없다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충실하고 예의바르다. 비열한 친절을 베풀면서 자신의 이웃, 동료, 형제를 속이고, 끔직스런 방식으로 그들의 이름과 삶을 망쳐놓곤 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던가. 크라우스는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결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항상 자신이 세운 어떤 규율들을 따르며 산다. 나는 그것을 교양이라고 부른다.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깊은 애정과 충만한 생각, 그것이 교양이다.

 

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 야콥 폰 군텐이야기>>, 홍길표 옮김, 문학동네, 2012, 88-89쪽

 

---------------

 

 

프란츠 카프카가 사랑한 작가 로베르트 발저의 <<야콥 폰 군텐이야기>>에는 '미미한' 사람들의 존엄함이 나타나 있다. 위에 말한 교양은 근대의 교양하고는 다르다. 근대의 교양이 개인의 자아를 넓혀가서 자신의 개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영웅적인 개인을 향한 -빌헬름과 바이런,파우스트나 짜라투스트라..데미안- 길이라면, 발저가 말한 교양은 '자아소멸'이라는 자아실현을 위해 떠나는 반영웅적인 개인을 향한 길이다. 자신을 숨기고 낮추며 드러나지 않게 사는 사람들의 교양을 '크라우스'를 통해 들고 있다. 카프카가 개인의 이름을 지우고 K라는 기호를 가져온 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이 아니다. 탈개인, 탈근대를 향한다해서 그것을 개인의 소멸에 대한 고발로 읽을 필요는 없다.

발저의 야콥 쿤데를 읽으면 스스로 보통사람이 되고자 하는 길을 택하는 것은, 즉 자발적인 몰락 역시 주체의식의 발로이다. '자발적 평범', 그 또한 위대한 철학이 아니겠는가!!!

 

크라우스의 교양은 지식과는 무관한 아무리 미천한 사람이라도 가질 수 있는, 그러나 그런 사람이 드문 그런 교양이다. 수선스럽지 않고 신뢰할 수 있으며, 타인의 비밀을 존중하며, 자신의 원칙을 가지고 사는 것...한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생활 방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찬 예찬 시리즈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예찬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어떤 아름다운 음악가, 한 마리 우아한 말, 어떤 장엄한 풍경,

심지어는 지옥처럼 웅장한 공포 앞에서 완전히 손들어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예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비참한 사람이다.

그와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다.

우정은 함께 예찬하는 가운데서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예찬> 서문에서

 

예찬이란 무엇인가? 놀람과 경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놀람과 경이야말로 철학적 사색의 원천이다. 그리스 철학에서 예찬은 바로 '존재를 존재로 있게 하는 무엇'이었다. 투르니에가 자신의 철학적 단상을 묶어 '예찬'이란 이름으로 낸 것은 이런 철학적 배경에 근거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역사소설은 정사보다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흔적을 더 잘 설명해준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사람들에게 있어서 문학은 철학을 더 잘 이해하게 하는 매개체일 수 있다. 미셸 투르니에는 한 시대를 풍미한 질 들뢰즈, 미셸 푸코와 같이 철학을 공부한 철학도로서 철학선생의 길을 가다가 문학으로 전환한 사람이란 점에서, 프랑스 문학의 묘미를 다른 누구보다 잘 드러낼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면 웬만한 책에서는 감흥을 느끼기 힘들고, 나보다 젊은 사람의 글에는 덜 손이 가는 법이다. 특히 수필집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해서 철학자나 소설가들이 노년기에 쓴 글을 일부러 찾아보게 된다. 러셀의 <행복의 정복>, 박이문의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루쉰의 서간집과 수필집,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강의> 등등이 그러하다. 홍수처럼 쏟아진 책 속에서 <예찬>을 고른 것은 철학을 전공한 아카데미 콩쿠르의 종신회원의 노년기 작품이라서 삶에 대한 지혜의 한자락이라도 얻어 볼까 하는 요량에서 였다. 덧붙여 평소에 존경의 념을 갖고 있던 김화영선생의 번역이란 점도 크게 한 몫했다. 내가 이 책을 읽을 당시만 해도 투르니에는 우리나라에 소개되긴 했어도 지금처럼 신문의 한 면에 인터뷰가 실릴 정도로 조명되진 않을 때였으니, 이 책을 찾아낸 흥분은 대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투르니에의 우리나라로의 소개는 프랑스에서 유학한 김화영선생과 프랑스특파원이었던 박해현기자의 공이 크다). <예찬>에 실린 82편의 짧은 글에는 다양한 일상의 사물을 보는 작가의 독특한 관점과 번뜩이는 기지, 철학적 통찰력이 담겨져 있다. 시골의 한 목사관에서 기거하면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그의 모습들 또한 삶에 대한 자세를 곧추게 만든다.

 

이 책에 반해서 미셸투르니에의 모든 책을 사서 읽게 되었는 데, 독서노트인 <흡혈귀의 비상>, <내면일기>, <외면일기>,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추천하고 싶다. 나머지 <생각의 거울>은 모티브는 좋았으나 치열한 사색이 담기지 않아 서평만큼은 인상적이지 못했다.

 

<예찬>의 내용 중 몇몇을 맛보기로 소개한다.

 

* 나무와 숲:

<나무는 한 그루만 따로 심어 놓았을 때 만 멋지게 자란다. 나무들은 서로 증오한다.나무들은 좋은 의미에서 개체주의적이고 고독하고 에고이스트다....숲이야 말로 집단 수용소의 강제적인 혼합 그 자체다. 밀집해 자라는 나무들은 고통스러워하고 서로를 미워한다. 숲속의 공기는 그 식물적 증오로 가득차 있다.>

투르니에는 인공적인 국유림을 확대하는 것에 반대하고, 나무들의 자생, 잡초들이 자라는 정원 등을 식물학적 지식을 들어 권장한다.

 

* 뱀에 대한 풀이

 

<뱀에는 독이 있는 뱀과 목을 감는 뱀, 두 종류가 있다. 독이 있는 뱀은 키스로 죽인다. 목을 감는 뱀은 포옹으로 죽인다. 전자는 온통 입 뿐이다. 후자는 온통 팔 뿐이다. 그러나 양자가 다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죽인다.>

 

*격세유전

<격세유전이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덕분에 하마터면 우리들의 직접적인 부모가 우리를 마치 판에 빅은 듯이 찍어서 만들어 놓을 수 있는 유전적인 덩어리가 수많은 작은 조각으로 분쇄되기 때문이다. 격세유전에 의해 유전은 한 세대에서 다음세대로 옮겨지는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개인적인 성좌를 구성하기위해 가지는 먼지처럼 많은 별들과 도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곧 인간에게는 엄청난 발전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은 각 세대마다 개인들에게 자질을 제공한 존재의 수를 배가시킴으로써 유전적 자질을 무한한 수의 가루로 빻아놓으니 말이다.>

 

결국 투르니에의 생각은 돌연변이가 인류의 진보에 관여한다는 유전 법칙과 상통한다. 역사는 이렇게 우연에 의해서 진보하고 풍부해지는 것이다.

 

* 싱거운 것과 양념친 것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자면, 소금과 설탕은 무미건조한 물질의 '속성'이고 조미료는 '우유성(遇

有性)에 불과하다. 그러나 모든 문화는 우유성들, 즉 희귀하고 값이 비싸지만 무용한 부(富)로 이루어져 있다. 문명은 필요성이고 문화는 사치다.>

 

이렇듯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철학적인 화두에 이르는 투르니에의 솜씨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 같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 주변에도 예찬할 거리와 철학의 길에 이르는 실마리들이 널려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실마리에서 하나의 지혜를 얻는 것은 지적 통찰력을 통해서 임을, 그리고 그 사물을 보는 독특한 능력은 하루 아침에 쌓아지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겠다.

 

 

(2006.05.14 20: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길 위에서 버린 생각
김명렬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01년 8월
평점 :
절판


김명렬이란 이름은 제가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이름입니다. 대체로 사람이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제가 잊지않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상적인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80년대 중반, 대학원 초기에 저는 경제학도들이 주축이 된 <유한과 무한>란 동경대강의를 읽고 토론하는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그분을 뵈었지요. 오래된 일이라 전후관계는 희미한데, 아무튼  그런 인연으로 저는 그분이 쓴 시를 일주일에 한 번씩 받아보는 행운을 누렸답니다. 글이나 시를 잘 써서 스스로 복사해 시집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돌렸는데 그 사제 시집의 글들이 범상치 않았어요. 독자층도 두터웠고요. 그러다 그분이 드문 드문 보이다 자취를 감췄지요. 신문사에 합격했다던가 말았던가 하는 후문을 들었지만, 연락처라도 알아 놓을 걸 하는 아쉬움을 가졌어요. 그만큼 글이 저를 매혹시켰어요.

이를테면, 개인적인 인연이 아니라 글때문에 기억하고 있는 이름이니 얼마나 글을 잘 쓴 분이겠어요. 아마 그 시집의 애독자들은 다 그러할거예요. 그후 언론계통의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는데도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이 드물어서 참 아깝다 했지요. 서점에서 시집을 찾아봐도 동명이인의 것만 있었고요. 그런데, 한 친구가 제게 책을 선물했는데 바로 이 책이었지 뭐예요. 역시 글쟁이로 기자로 먹고 살았더군요. 재능은 다 알아서 자기 길을 가지요.

 

훌륭한 여행기이자 산문집입니다. 길을 가면서 만나는 풍경이나 인물속에서 느끼는 감회나 단상을 적은 글인데 깊은 사색으로 꽉차 있어요. 곽재구 선생의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을 떠오르게 하더군요. 문장과 사색이 둘 다 뛰어나단 점에서요. 글읽는 재미를 느낄 것입니다. 물론 풍경의 이야긴 아닙니다. 여행과 관련한 내면의 이야기지요. 김병총의 <화첩기행>이나 유홍준의 <나의 문화답사기>는 객관적 사료나 취재 대상이 있는 이야기므로 이책과는 구별됩니다.그 분들의 산문집은 순수하게 내면의 기록이라고만 볼 수 없어요. <길위에서 버린 생각>, 이 책은 오히려 생텍쥐베리의 <바람, 모래 그리고 별>이나 장 그르니에의 <섬>, <지중해의 영감>에 비견된다고 볼까요. 참, 저자도 여행을 하면서 이 책을 옆에 끼고 다녔다더군요. 저도 그랬거든요, 젊은 날. 하나 더 추가하자면 그르니에의 <모래톱>까지요. 그래서 그런지 저랑 참 비슷한 생각을 풀어놓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제가 쓴 글을 읽는 느낌 말입니다. 작가 칭찬을 해 놓고 저와 비슷하다 쓰면 자화자찬이 되어 작가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것이 될까 우려되네요. 물론 저보다 당연히 한 수 윈데 읽는 기분이 그렇다는 거지요. 글을 참 정감있게 잘씁니다. 맛보기로 한 문장을 소개합니다.

 

<그렇게 배낭을 꾸려 길을 떠나면 시간은, 그리고 존재는 '정지된 무용'으로서의 산하를 다시 일깨워 함께 춤추며 걸어간다. 그럴 때 굳이 여행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미리 생각할 필요는 없다. 여행은 얻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고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며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투신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을 던지면서 표현으로 충만한 여행길에서 돌아와 배낭을 정리하다 보면 텅비어 가벼운 줄 알았던 배낭안에 어느새 여행이 몰래 집어넣어준 묵직한 선물이 가듣 들어있기는 하다.

 

개인적으로는 까뮈의 산문집의 한 구절을 슬쩍 변형시킨 "낯선 곳에 가서 살고 싶다"라는 말을 오랫동안 화두로 짊어지고 다녔다. 낯선 시간,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 속으로의 갑작스런 공간이동. 그리고 그 속에서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남행하는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졸다가 깨다가 읽다가 하던 중 문득 차와 나란히 달리고 있는 나지막한 언덕을 보았을 때, 그리고 붉은 치맛자락이 홀연히 문틈으로 사라지듯 그 언덕 위로 조그만 오솔길이홀연히 넘어가 사라졌을 때, 지금 만약 내가 이 차에서 내려 저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며 한 번 밟았던 길을 절대로 되밟지 않는 여정을 추구한다면 과연 내 삶의 앞에는 어떤 드라마가 펼쳐질지 꿈꾸었다.

 

돌아오지 않는 여행.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꿈인줄은 알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 꿈은 불가능한 것일까. 때로 일상의 잡담에 허덕일 때 문득 배낭을 꾸려 구례구역으로 향하는 23시 50분 마지막 기차에 간신히 오른날, 그 다음날 나는 아무런 인적이 없는 지리산 세석평전에 누워 정오의 따뜻한 햇볕으로 온몸의 피를 데우고 있었다. >p.21

 

 

갑자기 여행이 떠나고 싶을 때, 목적지 없이 기차를 타고 마음을 뺏는 이름모를 들녘이나 소도시에 내려 걸어보세요. 저는 그런 여행이 가고 싶어요. 밖으로의 여행이 아니라 나를 향하는 여행요. 물론 이 책을 옆구리에 끼고요. 어느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도, 밟고 있는 땅이나 눈에 담는 풍경이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을거예요. 불쑥 오래된 벗에게 전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 겁니다. 사람을 떠났는데 사람이 다시 그리워지는 따뜻한 책이지요. 작가를 따라 길을 나서보세요. 버리고 비우러 가는 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