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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버린 생각
김명렬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01년 8월
평점 :
절판
김명렬이란 이름은 제가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이름입니다. 대체로 사람이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제가 잊지않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상적인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80년대 중반, 대학원 초기에 저는 경제학도들이 주축이 된 <유한과 무한>란 동경대강의를 읽고 토론하는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그분을 뵈었지요. 오래된 일이라 전후관계는 희미한데, 아무튼 그런 인연으로 저는 그분이 쓴 시를 일주일에 한 번씩 받아보는 행운을 누렸답니다. 글이나 시를 잘 써서 스스로 복사해 시집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돌렸는데 그 사제 시집의 글들이 범상치 않았어요. 독자층도 두터웠고요. 그러다 그분이 드문 드문 보이다 자취를 감췄지요. 신문사에 합격했다던가 말았던가 하는 후문을 들었지만, 연락처라도 알아 놓을 걸 하는 아쉬움을 가졌어요. 그만큼 글이 저를 매혹시켰어요.
이를테면, 개인적인 인연이 아니라 글때문에 기억하고 있는 이름이니 얼마나 글을 잘 쓴 분이겠어요. 아마 그 시집의 애독자들은 다 그러할거예요. 그후 언론계통의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는데도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이 드물어서 참 아깝다 했지요. 서점에서 시집을 찾아봐도 동명이인의 것만 있었고요. 그런데, 한 친구가 제게 책을 선물했는데 바로 이 책이었지 뭐예요. 역시 글쟁이로 기자로 먹고 살았더군요. 재능은 다 알아서 자기 길을 가지요.
훌륭한 여행기이자 산문집입니다. 길을 가면서 만나는 풍경이나 인물속에서 느끼는 감회나 단상을 적은 글인데 깊은 사색으로 꽉차 있어요. 곽재구 선생의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을 떠오르게 하더군요. 문장과 사색이 둘 다 뛰어나단 점에서요. 글읽는 재미를 느낄 것입니다. 물론 풍경의 이야긴 아닙니다. 여행과 관련한 내면의 이야기지요. 김병총의 <화첩기행>이나 유홍준의 <나의 문화답사기>는 객관적 사료나 취재 대상이 있는 이야기므로 이책과는 구별됩니다.그 분들의 산문집은 순수하게 내면의 기록이라고만 볼 수 없어요. <길위에서 버린 생각>, 이 책은 오히려 생텍쥐베리의 <바람, 모래 그리고 별>이나 장 그르니에의 <섬>, <지중해의 영감>에 비견된다고 볼까요. 참, 저자도 여행을 하면서 이 책을 옆에 끼고 다녔다더군요. 저도 그랬거든요, 젊은 날. 하나 더 추가하자면 그르니에의 <모래톱>까지요. 그래서 그런지 저랑 참 비슷한 생각을 풀어놓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제가 쓴 글을 읽는 느낌 말입니다. 작가 칭찬을 해 놓고 저와 비슷하다 쓰면 자화자찬이 되어 작가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것이 될까 우려되네요. 물론 저보다 당연히 한 수 윈데 읽는 기분이 그렇다는 거지요. 글을 참 정감있게 잘씁니다. 맛보기로 한 문장을 소개합니다.
<그렇게 배낭을 꾸려 길을 떠나면 시간은, 그리고 존재는 '정지된 무용'으로서의 산하를 다시 일깨워 함께 춤추며 걸어간다. 그럴 때 굳이 여행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미리 생각할 필요는 없다. 여행은 얻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고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며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투신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을 던지면서 표현으로 충만한 여행길에서 돌아와 배낭을 정리하다 보면 텅비어 가벼운 줄 알았던 배낭안에 어느새 여행이 몰래 집어넣어준 묵직한 선물이 가듣 들어있기는 하다.
개인적으로는 까뮈의 산문집의 한 구절을 슬쩍 변형시킨 "낯선 곳에 가서 살고 싶다"라는 말을 오랫동안 화두로 짊어지고 다녔다. 낯선 시간,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 속으로의 갑작스런 공간이동. 그리고 그 속에서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남행하는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졸다가 깨다가 읽다가 하던 중 문득 차와 나란히 달리고 있는 나지막한 언덕을 보았을 때, 그리고 붉은 치맛자락이 홀연히 문틈으로 사라지듯 그 언덕 위로 조그만 오솔길이홀연히 넘어가 사라졌을 때, 지금 만약 내가 이 차에서 내려 저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며 한 번 밟았던 길을 절대로 되밟지 않는 여정을 추구한다면 과연 내 삶의 앞에는 어떤 드라마가 펼쳐질지 꿈꾸었다.
돌아오지 않는 여행.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꿈인줄은 알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 꿈은 불가능한 것일까. 때로 일상의 잡담에 허덕일 때 문득 배낭을 꾸려 구례구역으로 향하는 23시 50분 마지막 기차에 간신히 오른날, 그 다음날 나는 아무런 인적이 없는 지리산 세석평전에 누워 정오의 따뜻한 햇볕으로 온몸의 피를 데우고 있었다. >p.21
갑자기 여행이 떠나고 싶을 때, 목적지 없이 기차를 타고 마음을 뺏는 이름모를 들녘이나 소도시에 내려 걸어보세요. 저는 그런 여행이 가고 싶어요. 밖으로의 여행이 아니라 나를 향하는 여행요. 물론 이 책을 옆구리에 끼고요. 어느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도, 밟고 있는 땅이나 눈에 담는 풍경이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을거예요. 불쑥 오래된 벗에게 전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 겁니다. 사람을 떠났는데 사람이 다시 그리워지는 따뜻한 책이지요. 작가를 따라 길을 나서보세요. 버리고 비우러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