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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찬 ㅣ 예찬 시리즈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0년 10월
평점 :
< 예찬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어떤 아름다운 음악가, 한 마리 우아한 말, 어떤 장엄한 풍경,
심지어는 지옥처럼 웅장한 공포 앞에서 완전히 손들어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예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비참한 사람이다.
그와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다.
우정은 함께 예찬하는 가운데서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예찬> 서문에서
예찬이란 무엇인가? 놀람과 경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놀람과 경이야말로 철학적 사색의 원천이다. 그리스 철학에서 예찬은 바로 '존재를 존재로 있게 하는 무엇'이었다. 투르니에가 자신의 철학적 단상을 묶어 '예찬'이란 이름으로 낸 것은 이런 철학적 배경에 근거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역사소설은 정사보다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흔적을 더 잘 설명해준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사람들에게 있어서 문학은 철학을 더 잘 이해하게 하는 매개체일 수 있다. 미셸 투르니에는 한 시대를 풍미한 질 들뢰즈, 미셸 푸코와 같이 철학을 공부한 철학도로서 철학선생의 길을 가다가 문학으로 전환한 사람이란 점에서, 프랑스 문학의 묘미를 다른 누구보다 잘 드러낼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면 웬만한 책에서는 감흥을 느끼기 힘들고, 나보다 젊은 사람의 글에는 덜 손이 가는 법이다. 특히 수필집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해서 철학자나 소설가들이 노년기에 쓴 글을 일부러 찾아보게 된다. 러셀의 <행복의 정복>, 박이문의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루쉰의 서간집과 수필집,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강의> 등등이 그러하다. 홍수처럼 쏟아진 책 속에서 <예찬>을 고른 것은 철학을 전공한 아카데미 콩쿠르의 종신회원의 노년기 작품이라서 삶에 대한 지혜의 한자락이라도 얻어 볼까 하는 요량에서 였다. 덧붙여 평소에 존경의 념을 갖고 있던 김화영선생의 번역이란 점도 크게 한 몫했다. 내가 이 책을 읽을 당시만 해도 투르니에는 우리나라에 소개되긴 했어도 지금처럼 신문의 한 면에 인터뷰가 실릴 정도로 조명되진 않을 때였으니, 이 책을 찾아낸 흥분은 대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투르니에의 우리나라로의 소개는 프랑스에서 유학한 김화영선생과 프랑스특파원이었던 박해현기자의 공이 크다). <예찬>에 실린 82편의 짧은 글에는 다양한 일상의 사물을 보는 작가의 독특한 관점과 번뜩이는 기지, 철학적 통찰력이 담겨져 있다. 시골의 한 목사관에서 기거하면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그의 모습들 또한 삶에 대한 자세를 곧추게 만든다.
이 책에 반해서 미셸투르니에의 모든 책을 사서 읽게 되었는 데, 독서노트인 <흡혈귀의 비상>, <내면일기>, <외면일기>,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추천하고 싶다. 나머지 <생각의 거울>은 모티브는 좋았으나 치열한 사색이 담기지 않아 서평만큼은 인상적이지 못했다.
<예찬>의 내용 중 몇몇을 맛보기로 소개한다.
* 나무와 숲:
<나무는 한 그루만 따로 심어 놓았을 때 만 멋지게 자란다. 나무들은 서로 증오한다.나무들은 좋은 의미에서 개체주의적이고 고독하고 에고이스트다....숲이야 말로 집단 수용소의 강제적인 혼합 그 자체다. 밀집해 자라는 나무들은 고통스러워하고 서로를 미워한다. 숲속의 공기는 그 식물적 증오로 가득차 있다.>
투르니에는 인공적인 국유림을 확대하는 것에 반대하고, 나무들의 자생, 잡초들이 자라는 정원 등을 식물학적 지식을 들어 권장한다.
* 뱀에 대한 풀이
<뱀에는 독이 있는 뱀과 목을 감는 뱀, 두 종류가 있다. 독이 있는 뱀은 키스로 죽인다. 목을 감는 뱀은 포옹으로 죽인다. 전자는 온통 입 뿐이다. 후자는 온통 팔 뿐이다. 그러나 양자가 다 사랑의 행동을 통해서 죽인다.>
*격세유전
<격세유전이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덕분에 하마터면 우리들의 직접적인 부모가 우리를 마치 판에 빅은 듯이 찍어서 만들어 놓을 수 있는 유전적인 덩어리가 수많은 작은 조각으로 분쇄되기 때문이다. 격세유전에 의해 유전은 한 세대에서 다음세대로 옮겨지는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개인적인 성좌를 구성하기위해 가지는 먼지처럼 많은 별들과 도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곧 인간에게는 엄청난 발전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은 각 세대마다 개인들에게 자질을 제공한 존재의 수를 배가시킴으로써 유전적 자질을 무한한 수의 가루로 빻아놓으니 말이다.>
결국 투르니에의 생각은 돌연변이가 인류의 진보에 관여한다는 유전 법칙과 상통한다. 역사는 이렇게 우연에 의해서 진보하고 풍부해지는 것이다.
* 싱거운 것과 양념친 것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자면, 소금과 설탕은 무미건조한 물질의 '속성'이고 조미료는 '우유성(遇
有性)에 불과하다. 그러나 모든 문화는 우유성들, 즉 희귀하고 값이 비싸지만 무용한 부(富)로 이루어져 있다. 문명은 필요성이고 문화는 사치다.>
이렇듯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철학적인 화두에 이르는 투르니에의 솜씨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 같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 주변에도 예찬할 거리와 철학의 길에 이르는 실마리들이 널려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실마리에서 하나의 지혜를 얻는 것은 지적 통찰력을 통해서 임을, 그리고 그 사물을 보는 독특한 능력은 하루 아침에 쌓아지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겠다.
(2006.05.14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