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기 전에 들은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 많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의도적으로 그런 얘기들을 듣지 않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스토리를 알고 가면 마지막에 김이 샌다고 하길래 혹시라도 스포일러가 의심되는 글은 보질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린 얘기는, 영화는 한국영화의 쾌거라고 할만큼 괜찮지만 무척 하드코어해서 기분이 나빠진다는 것이었다.
보고난 직후에는 뭐 괜찮지만 그리 열광할 정도는 아니다 정도의 느낌이었지만, 장시간에 걸친 친구와의 대화를 통해 이런저런 마음에 안 드는 점들이 정리가 되었다.
1. 미도의 경우
여주인공이 너무 알맹이가 없었다. 나름대로 우여곡절이 많았을텐데, 그리고 왜 일식 요리사가 되었는가 등등에 관한 역사도 있었을텐데 너무 설명이 되지 않았다. 마치 이우진(유지태)의 복수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다. 특히 영화 끝자락에 아빠의 네 살때 생일선물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아빠의 존재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리거나 증오하고 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 게다가 딱히 과묵하거나 속내를 남에게 얘기하지 않는 성격도 아닌 것 같은데 어째서 오대식(최민식)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일까.
영화의 가장 큰 약점이라고 여겨졌다. 이런 부분들이 치밀하게 설계되었다면 근사한 영화가 되었을텐데.
이것 때문에 영화가 우연으로만 점철된 설화구조에 여전히 의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외에도 미도와 오대식이 만나 사랑하게 되는 장치가 최면술이라는 것도 김빠지는 설명이었다.
2. 왜 이우진은 혼자 죽어야 했을까
이우진은 오대식에게 오랜 세월에 걸쳐 복수를 하면서 오대식에게 일종의 동질감을 느낀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 보면 비슷한 사람들이다. 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둘다 오랜 세월 외롭게 살아왔다. 즉 이우진은 오대식과 일종의 쌍둥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대사로만 처리될 뿐이다. 영화 막판에서 이우진이 오대식의 머리를 끌어안고 두 명의 머리가 일렬로 놓이도록 한 다음에 오대식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 이우진이 총을 발사했더라면 더 멋지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총알이 두 명의 머리를 관통하면서 살인이 자살이 되는 훌륭한 은유가 연출될 수 있었을 터인데.
3. 시덥지 않은 동정심
2번의 연장이다. 결국 이우진은 오대식을 살려준다. 그런데 왜? 어떻게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한 동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왜냐하면 오대식은 이우진의 거울 이미지니까? 아니면 끝간 데까지 간 복수일까? 하지만 후자의 가설은, 결국 미도에게 상자를 열어보지 않아도 좋게 만듦으로써 얘기 성립이 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자신에 대한 자비를 베풀었거나 오대식을 용서해준 모양인데, 이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얘기하듯이 썩 하드코어하다고 여겨지진 않았다. 혀를 자른다거나 하는 정도로 외시적인 묘사를 가지고만 하드코어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4. 감독의 악취미
굳이 붙이지 않아도 좋았다고 여겨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오대식은 다시 최면술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다. 그런데 이 문제해결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오대식이 저지르는 가장 나쁜짓이다. 사실, 오대식은 15년 씩이나 갇혀 지낼만큼의 죄를 지은 적이 없고, 그 후에 겪은 괴로운 일들을 당할 만한 일을 한 적도 없다. 하지만 이 마지막에 저지르는 일로서 끝간데 까지 간 인간이 된다. 이건 줄줄 길게 설명하기 좋아하고 뭐든지 완결을 짓고 싶어하는 감독의 특성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아나리의 생각인데, 여기에 덧붙여 나는 이런 식의 결론을 이끌어낸 것은 정말 악취미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전체적으로 영화는 한편의 소년물 만화(특히 일본 만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국의 현재가 아니더라도, 세계 어느나라에 갖다놓고 어느 시대에 갖다놓더라도 이야기가 성립되는 가상의 시공간도 그랬고, 얼핏 억지스러워 보이는 설정(한번의 실수, 그로 인한 파국적 결과, 또 이에 대한 보복으로서 행해지는 여러 행위들)이 그랬다. 어쩌면 이 영화는 현실이라는 걸 담을 생각이 전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게 연출에 나타나 있다. 특히 이우진의 펜트하우스를 제외하면, 감금실, 미도의 집, 미도와 오대수가 묵는 여관방 등은 색과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비슷한 패턴의 벽지였다. 그건 이우진이 보내는 상자의 패턴도 마찬가지였다. 가상공간이라는 걸 보여주는 결정적 장치라고 생각한다. 좀 다른 얘기지만, 미술이 아주 좋았다. 남루하지만 미묘하게 이국적인 분위기, 튀지않는 독특함을 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배우를 얘기하자면, 유지태의 연기는 무척 좋았다. 깨끗한 발음, 지적인 듯한 인상, 유약한듯 보이지만 돈 많고 잘 배운 사람 특유의 자신감, 그리고 외로움 등이 캐릭터로서 아주 잘 표현되었다. 놀라운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최민식의 경우는, 뭐 언제나 최고의 연기를 한다고 평가받는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