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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천황상의 형성
야스마루 요시오 지음, 박진우 옮김 / 논형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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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제 국가의 지배원리
후지타 쇼조 지음, 김석근 옮김 / 논형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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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제 코드
조용래 지음 / 논형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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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제 근대국가의 탄생- 일본
함동주 지음 / 창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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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조원의 육체산업 - AV 시장을 해부하다
이노우에 세쓰코 지음, 임경화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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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 교보에서 구입.  

이 책을 구매하여 읽은 이유는 일단 남자라면 당연히 가지게 되는 AV에 대한 관심사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AV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나름의 생각 정리를 위해서였다. 나는 성매매를 일종의 서비스로 간주하는 매매춘 페미니스트들의 관념, 그리고 개인의 직업의 자유, 교환으로 인한 효용 증대라는 몇 가지를 논거로 하여 성매매를 법적으로 허용해야 한다는,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는 꽤나 라디칼한 성매매에 대한 관점을 고수하고 있는데, 성매매를 '성적 쾌락을 얻기 위해 금전적 대가를 지불하는 행위'로 조금 넓게 정의한다면 AV 역시 성매매 산업의 일종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 나의 기본 입장을 관철시키는 것에 논리적 모순이나 실제적 문제점이 없는가를 이 책을 통해 검토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 읽고 나서 나서 드는 생각은 딱히 보람찬 독서는 아니었다는 것.  

   저자는 거칠게 말해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 책에서는 AV 그 자체에 대해서 혐오감을 내비치지는 않는다. AV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성매매라고 할 수 있는데, 페미니스트가 AV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성매매에 대한 나의 견해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다만 저자가 이 책에서 AV의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i)AV 배우들의 인권, ii)내용으로 강간물 등이 인기를 끄는 경향.  요컨대 저자의 입장에서는 이 두 가지가 해결된다면 "성인 비디오도 새로운 성 문화의 하나로서, 그리고 하위 문화로서, 변혁을 실천하고 제 몫을 다한다면 소멸의 위기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p.188)고 하여, AV를 성문화의 하나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결국 저자의 관점은 내 관점과 같은 방향에 있다는 것을 책을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외에 일본 AV의 역사라든가, 산업 규모, AV 배우의 캐스팅 과정 등이 소개되어 있지만, 한국에 사는 나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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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매춘과 페미니즘, 새로운 담론을 위하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1
이성숙 지음 / 책세상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1. 내가 이 책을 읽은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성매매에 대한 나의 입장에 일종의 전거(典據)를 얻고자 함에 있다. 나는 개인의 신체 처분의 자유와 계약당사자의 효용증대라는 근거를 바탕으로 성매매를 법적으로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입장은 사실은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도덕관념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과연 나는 이러한 견해를 공개적으로 강의실에서 천명했다가 성매매를 반대하는 측의 집중적인 포화를 얻어맞았으며, 이준구 선생님께는 사후에 '난 니가 처음엔 또라이인 줄 알았다'는 말씀까지 듣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전방위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까지는 내 의견을 바꿀 생각이 없다. 그 이유는 첫째로 성매매를 반대하는 측의 사람들이 나의 견해를 제대로 논박하지 못하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성매매를 반대하는 것이 오히려 매춘 여성을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와 같은 강호의 시정잡배가 아무리 떠들어봤자 '성매매는 금지되어야 한다'는 일견 그럴듯해보이는 도덕규범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귀기울여 들을 리가 없기에 뭔가 그럴 듯한 권위에 기대어 타인을 설득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같이 사형제도의 폐지를 주장해도 내가 말하는 것과 까뮈가 말하는 것의 무게감은 아무래도 다르니 말이다.

2. 이 책의 목적은 "매매춘은 근본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매매춘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 이론에 대한 비평서"이다.(p.8) 매매춘에 대한 페미니스트 이론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 매매춘과 매춘여성을 분리해 논의를 전개한다. 매매춘은 본질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제도이므로 추방되고 폐지되어야 할 대상이라 규정하는 한편, 매매춘 성립의 주체인 매춘 여성을 옹호하는 것이다."(pp.8-9) 성매매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내가 대학에 들어온 이후 만난 많은 대학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성매매라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데, 성매매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보통은 경제적 사정 등으로 인한 경우로) 성매매라는 비윤리적 행위를 할 수 밖에 없기에 성매매를 하는 개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매매춘에 대한 페미니스트 이론의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i)매매춘과 매춘여성을 분리한다.
ii)실제 매매춘 종사자들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상술한 것처럼 페미니스트 이론은 성매매 행위 자체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나 행위주체인 성매매 여성에 대해서는 옹호한다. 저자는 이러한 시각이 모순적인 것이며, "전통적인 이중규범의 다른 형태에 불과하다"(p.9)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성매매를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성매매 여성을 옹호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중적인 태도를 취할 때, 그 결과로 도출되는 것은 구분이다. 성매매 여성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이쪽(페미니스트들이 위치하는)의 인간이 아니라, 문제가 있는 저쪽의 인간이다. 따라서 그 결과 그들은 소통의 대상이기라기보다는 구원의 대상이며, 그들은 우리들의 노력에 의해서 도덕적인 안전지대인 이쪽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러한 결론은 페미니스트 이론에 실제 매매춘 종사자들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두 번째 문제점을 낳는다. 페미니스트 이론의 관점에 의할 때, 그들은 매매춘 종사라는, 그들이 처해 있는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에서 끄집어내어져야 할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 매매춘 종사자들은 과연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에 빠져 있는가? 저자에 의하면 페미니스트 이론가와 실제 매매춘 종사자들의 성매매에 대한 시각은 완전히 다르다: "페미니스트들은 섹스 노동자들을 가리켜 여성의 육체를 시장에 내다파는 성 노예라고 주장하는 반면, 매춘 여성들은 매춘을 성적인 서비스 또는 성적인 친밀성을 판매하는 성 노동이라고 주장한다."(p.86) 

   몸을 파는 자라는 관점과 서비스 제공자라는 관점, 이 양자의 간극은 지극히 넓은 것이다. 일반인이 매매춘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몸을 파는 것'에 대한 불쾌감에 있다. 즉 성매매는 몸을 파는 행위이기 때문에 부도덕하며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저자는 이를 '도덕적 매매춘 페미니즘'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저자는 반문한다: "사실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과 술을 마시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 ... 매매춘이 본질적으로 부도덕하다고 주장하는 것으 사실상 깊이 있는 논의를 회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매매춘의 도덕 중심주의 논리는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 지점에서 논의를 끝내버리는 것에 불과한 무책임한 짓이며, 이야말로 부도덕한 짓일지 모른다."(p.35)

   이러한 관념에 대한 매매춘 종사자들(정확하게는 매춘 페미니스트들)의 대응전략은 성매매의 의미를 몸을 파는 것에서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1986 브뤼셀에서 합의된 매춘 여성이 단지 "가장 오래된 직업"을 가진 여성 임금 노동자들 가운데 일부분일 뿐이라는 매춘 여성에 대한 개념의 재정립은 이러한 노력의 대표적인 것인데, 이러한 매매춘 페미니스트들의 전략이 추구하는 것은 결국 매매춘을 탈도덕화하여 가치중립적인 노동의 일환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 하에서는 "성 노동자로서의 매춘 여성과 다른 직종의 노동자나 서비스 판매자 간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매춘부는 단지 자신의 신체상 재산에 대해 외적 관계에 서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매춘 여성은 자신의 신체와 자아를 파는 것이 아니며, 그녀의 서비스를 원하는 고객과 아무 손해 없이 거래할 수 있는 노동자들이다."(p.20) 결국 매매춘을 가치중립적인 노동으로 취급하자는 이러한 주장은 저자가 지적한 페미니스트 이론의 문제점 중 첫 번째, 매매춘행위와 종사 여성을 분리하는 태도를 공격하는 것이다. 양자를 분리하는 태도는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 매매춘이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라는 가정과 매매춘 여성을 옹호하는 태도 양자를 공히 포기하지 않는 것의 결과인데, 만약 매매춘이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가 아니며 가치중립적인 노동이라면 행위와 행위자를 구태여 분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성매매라는 행위에 대한 이러한 대립적 관점은 사실 논증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논증 이전의 공리에 가깝다. 이러한 공리의 타당성은 결국 그 공리를 취함으로써 얻게 되는 결과가 얼마나 개인과 사회의 행복에 기여하는가에 의해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파시스트들의 가치관을 옳지 않다고 할때, 그 이유는 그들의 가치관이 이론적 정합성, 합리성이 없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파시즘이 전면적으로 대두할 때 개인과 사회가 파국적인 결말로 치닫는다는 것을 역사적 체험을 통하여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매매를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로 보는 관념은 개인과 사회의 행복 증진에 기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성매매를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보는 태도가 도덕적 위선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한다. 성매매 여성들을 구석으로 내모는 것은 궁극적으로 성매매를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 우리들의 편견이다.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인권착취와 같은 행위들은 이러한 편견의 결과에 불과하다: "여성의 인권을 노골적으로 말살하는 이 부조리한 상황이 가능한 요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매매춘을 본질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는 여러 가지 가설과 담론들의 경고와 관련 있다. 매춘 여성들의 인권을 탄압하는 주범은 특정 사회의 개인과 집단이 갖고 있는 적대적이며 위선적인 태도들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적대적인 태도는, 섹스 자본가들이 매춘 여성 노동자를 계속 착취하도록 승인하는 것과 같으며, 매매춘에서 남녀의 불평등한 관계 형성은 물론이고 여성성을 경멸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조건이 된다."(p.91)

3.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성매매에 대한 나의 견해를 상당 부분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성매매를 법적으로 금지하여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는 변함이 없지만, 글을 읽기 전에 나는 성매매를 하는 행위 자체는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라는 전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요컨대 종래의 나의 주장은 거칠게 말하자면 성매매가 좋지는 않지만 안하고 굶어죽는 것보다는 몸이라도 팔고 먹고 사는 게 낫다는 것이었는데, 성매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수용한다면 성매매 행위는 신체 처분의 자유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근로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매매를 법의 테두리 안에 끌어들이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그것이 가치중립적인 행위이기도 하지만, 합법의 영역으로의 포섭을 통해 성매매에 대한 사회 성원의 관념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유엔은 매춘 여성을 조직적으로 착취하는 것을 방지하고 그들의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매매춘이 합법화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유엔의 이 같은 결정으로 각국이 매춘 여성을 법적 규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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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2009-10-06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논의 잘 읽었습니다. 그저 제 직관상 평을 하자면,
성매매의 윤리적 평가/ 성매매 합법화 인정여부 의 두가지로 나누어서 생각들 해봐야 한다고 보여지네요.

전자의 경우는,
먼저 성매매를 성서비스의 단계로 나아가고자 할 때, 과연 성이 수단적으로만 온전히 써 질 수 있는가.
성 그자체를 서비스화하면서 곧 존엄이 상실되는 여지가 있다면, 비록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자의에 의한다고
말할지라도, 그 내면 깊은 곳에서 그것인 진의인가, 진의 아닌 자발적 의지만으로 그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하다 말할 수 있을 만큼 성적자기 결정권 혹은 성이라는 인간 존엄의 훼손의 침해가 미미한 가..
그런 것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고,

둘째로,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기의 효용적 처분의 강제적 제한은, 과연 국가가 제한해야할
공익적 목적이 있는 가에 대해서 판단해봐야 한다고 보는데요.
저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 관념적인 존재로만 보지 않고 몸 그자체도
인간이라고 봅니다. 예컨대, 팔은 나다. 몸은 나다. 다리는 나다. 라고 봅니다. 나는 다리를 가졌다.
나는 팔을 가졌다, 가 아니라요. 우리는 물건을 매매하는 것 자체는 상품교환적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시장질서로 받아들이지만, 인간을 매매하게 놨둘 경우 벌어지는 인간의 물화현상이 과연, 관념적, 도덕적
측면에서의 당위평가에서만 작동하는 지, 아니면 그 이상의 해악을 지니는 지, 잘 생각해 봐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사실 저같은 아나키적 입장에서는, 화는 나지만, 국가라는 개념을 추상체로 파악하고, 국가를 만들기 위해
계약하지 않은 자들 역시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에, 성매매 종사자들의 자발적 의지와 더불어 착취 없는 좋은 형태의 노동조건(순전히 자본주의적 시선에서 볼 때)이 있다면, 그들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싶구요. 다만 이들의 성매매를 막기 위한 시민적 차원의 대대적인 교육이라던가, 저항운동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결국 정치적 불매 운동이
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횡설수설입니다. ㅎㅎ


마요러브 2009-10-10 12:59   좋아요 0 | URL
댓글 잘 읽었습니다. 주신 의견에 대해서 저도 이야기해보자면

1.
'내면 깊은 곳에서 온전히 진의'인 행동은 사람에게 있어서 얼마 없지요. 간단하게 직장생활만 하더라도, 그것을 100% 완전한 자발적 의지로서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죠. 사람의 행동은 대부분 자기목적적이 아니라 수단적인 것이지요.

2.
몸 자체를 인간이라고 보는 관점에 의하면 이성숙의 견해는 받아들일 여지가 없습니다. 그는 성매매를 단순한 서비스업으로 보는 관점을 전제하고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기에 말이지요. 결국 우리는 양자택일해야 할 겁니다. 성매매를 몸파는 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서비스업으로 볼 것인가. 어떤 공리(公理)를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을지에 대한 판단기준은 어느 공리가 사회적으로 이득인가에 의해 결정되어야 할 것이고, 저자가 지적하듯이 성매매를 몸파는 일로 보는 순간 성매매는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성매매를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보는 이상,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요원한 것이 되어버리죠.

결국 이성숙은 그래서 파천황적인 제안을 하는 것이지요. 그건 성매매를 가치중립적으로 파악하자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는, 우리에게 이런 관념의 전환이 없는 이상, 성매매에 대한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불가능합니다.

음... 2009-10-11 0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요컨대 신체적 존엄이냐, 노동의 열매냐의 양자택일의 문제라는 거지요? 개인적으로는 신체적 존엄을 지키면서 노동의 열매를 얻을 수 있는 제 3의 대안에 대해서 우리가 진심으로 진정성있게 고민해 보았나, 같이 연대해서 그 무게를 짊어지려 해봤나 하는 생각이 드는 군요. 그런 점에서 님께서 말씀하신 사회적 '이득'이란 것이 정확히 어떤 개념일 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저도 솔직히 쉽게 돈 벌 수 있다면 술집따위를 나가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지만, 또 제곁의 친한 지인들 중 누군가는 그런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건 김규항씨가 던진 질문이 떠오르는 군요.

"하고 싶지 않은 상대와 섹스하지 않고도 비슷한 돈을 벌 수 있다면 세상에 누가 제 존엄을 팔아 살겠는가? "

마요러브 2009-10-18 04:41   좋아요 0 | URL
저도 김규항씨의 말에는 동의합니다. 성매매를 하지 않고도 비슷한 돈을 벌 수 있는 상태가 더 좋은 상태라는 것에는. (너무 딱딱해질지는 모르지만..) 도식화해보겠습니다. 선택지는 3가지입니다. 수치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1)성매매를 하지 않고, 0원의 소득을 얻는다.
2)성매매를 하고, 100원의 소득을 얻는다.
3)성매매 외의 다른 일을 하고, 100원의 소득을 얻는다.

김규항씨의 말은 2)보다 3)이 더 좋음을 역설하고 있지요. 그런데 실제로 매춘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3)은 불가능한 선택지인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존엄을 팔지 않고도 비슷한 돈을 벌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좋음에도, 성매매를 한다는 것은 그 비슷한 돈을 벌 수 있는 가능성이 행위자에게 막혀 있기 때문일 겁니다.

정리하자면, 저는 김규항씨의 말에 동의합니다. 다만, 3)의 선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2)의 선택조차도 할 수 없게 만들어 1)의 상태에 강제적으로 빠뜨리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뿐이지요.

성매매를 하지 않고도 비슷한 돈을 벌 수 있다면, 성매매를 어차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성매매의 규제는 불필요합니다. 반면, 성매매를 하지 않고는 그 돈을 벌 수 없다면, 성매매를 할 자유는 열어두는 것이 바람직하기에 성매매를 규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이게 지금의 제 견해이지요.
 
미국의 정치 문명
권용립 지음 / 삼인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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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권용립의 <<미국의 정치 문명>>을 서평도서로 결정하게 된 이유는 이 책이 미국의 정치를 제도나 사건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고찰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었다. 대학에 들어오고 난 후 지금까지의 미국 행정부는 부시의 공화당 정권이었고, 따라서 내가 제대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미국 역시 부시 정권 하의 미국이었다. 그런데 미 정권이 보여주었던 행동과 입에 담았던 말들은 대단히 특이한 것들이었다. 이란, 북한, 이라크 등 끊임없이 자신들의 외부에 적을 상정하는 태도, ‘악의 축’ 발언 등을 통하여 드러나는 선악의 대결구도, 정교 분리를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 없이 암시되는 기독교적 태도 등 부시 행정부가 보여주었던 행동들은 세계의 다른 국가들의 행정부와는 사뭇 다른 것들이었다.

   물론 현재 미국은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이며 따라서 발생하는 트러블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많은 트러블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각각 그럴 듯한 답변을 제시하였다. 이란이나 북한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핵무기 때문이며, 이라크에 대한 침공은 석유 때문이라는 등의 답이 그것들이다. 물론 그 대답들은 상당한 현실 설명력을 지닌다. 그러나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미국의 행위를 그 기저에 놓인 일관된 사상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많은 것을 하나의 틀로서 파악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우리는 미국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역시 들었다. 한쪽에서는 미국을 마냥 찬양하고, 한쪽에서는 제국이라든가 세상의 모든 악의 근원인양 묘사한다. 그러나 이 양쪽 모두 ‘미국은 왜 그런 행위를 하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내어놓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전자는 관심이 없어 보이며, 후자는 탐욕 때문이라는 막연한 말을 할 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물론 국가는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움직일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라는 국가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가치관이라든가,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 등은 존재하여 그것에 맞추어서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그 프레임이 무엇인가라는 것인데, 권용립의 책은 그 틀로서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저자에 따르면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은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그리고 캘빈주의라는 미국 건국에 있어서 중요한 세 이념의 융합물이며, 이는 미국의 정치와 외교에 있어서 기본적인 이념이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전반부는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의 기원을, 그리고 후반부는 미국의 정치와 외교에서 이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 어떻게 반복하여 표출되어 왔는지를 살핀다. 이 서평은 주로 전자, 즉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 어떠한 배경 하에서 성립되었고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정리하는 데에 그 주된 목적이 있으며, 이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 어떻게 표출되어 왔나에 대해서는 미국의 평등관, 그리고 신보수주의를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

2.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선결적으로 검토되어야 하는 것이 미국의 주도적인 역사학인 합의 사학(Consensus History)이다. 권용립에 의하면 이 합의 사학은 미국이 그 내부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으로서, 미국이 그 성립과정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일한 이념을 지도적인 정치 이념으로 삼아 왔으며, 따라서 미국 내에서의 정치적인 대립과 투쟁은 서로 상이한 비전(vision)을 실현하기 위한 대립이 아니라 합의되었던 토대 이념의 실현을 위한 방법론적 투쟁에 불과하다고 보는 관점이다. 다만 미국 건국에서 주도적이었으며 지금까지도 미국을 주도하고 있는 정치적인 이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자유주의 합의 사학과 공화주의 합의 사학이 대립한다.
  
   자유주의 합의 사학은 지금도 미국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는 관점으로, 자유주의를 미국의 합의된 토대 이념으로 보는 관점이다. 여기서의 자유주의는 존 로크의 자유주의로, 재산권의 보장을 근간으로 하여 국가는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만 존재하며 따라서 국가가 국민의 권리에 부당한 침해를 가할 때 국민은 국가에 저항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다. 결국 로크의 자유주의는 경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자유주의라고 할 것인데,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무절제한 자기 이익을 위한 철학이 아니라 일종의 ‘덕성’을 요구하는 사상이다. 이러한 로크의 자유주의가 18세기 스코틀랜드 사상, 대표적으로 아담 스미스의 사상과 결합하여 미국의 건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반면 공화주의가 미국 건국에서 중심적인 이념이었다는 것이 공화주의 합의 사학이다. 공화주의는 “덕성과 타락간의 팽팽한 긴장을 전제로 해서 정치를 파악하는 정치 윤리이며 정치 도덕이다.”(p.104)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i)법에 의한 지배, ii)공화주의적 자유, iii)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공공 정치체(commonwealth), iv)인민에 의한 정부 사상, v)혼합 정체의 다섯 개의 기본 관념을 중심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공화주의 사상의 핵심 윤리는 공민적 덕성(Civil virtue)이며 사치와 타락의 경계인데, 포칵, 베일린 등 공화주의 합의 사학자들에 의하면 미국의 건국 시조들은 덕성과 타락의 대립을 설정하고 공민적 덕성을 정치의 핵심으로 보는 고대의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건국 시조들은 영국이 시간 속에서 타락을 면할 수 없으며 따라서 타락을 회피하고 ‘최선의 과거’를 보존하기 위해 미국을 건립하였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 합의 사학과 공화주의 합의 사학은 한 가지 전제를 공유한다. 그것은 미국의 건국에 있어서 주도적인 이념이 하나라는 점, 즉 미국은 단일한 이념 하에 성립된 국가이며 그 단일한 이념이 지금까지 정치 문명으로서의 미국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 대립은 ‘미국의 예외성’과 또 ‘원초적 이념’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미국적 사고 방식 안에서의 대립인 것이다.(p.331) 저자는 이러한 전제를 “합의 콤플렉스”라고 이름 붙인다. 미국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누려온 합의 사학은 왜 이렇게 합의된 이념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일까? 이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가지는 특수한 성격에 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서유럽 문명권의 국가는 피를 나눈 역사적 민족과 그 집단적 기억이 교직되면서 형성된 민족 국가인데 반해서 미국은 국가와 이념을 먼저 설계해 놓고 그 이후에 받아들인 여러 인종으로 민족과 그 기억을 제조해 온 나라”(p.8)이며, 이러한 미국의 특성, 즉 삶이 우선하고 국가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신대륙이라는 공간에서 인위적으로 국가가 먼저 설계되고 집단적 기억을 제조해 온 국가라는 특성이 미국인들에게 합의 콤플렉스를 갖게 한 것이 아닐까? 어떤 집단이든지간에 그것이 구체적으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어떤 중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중심은 일단 집단이나 조직체가 형성된 이후에는 그들이 가지는 정체성의 기반이 된다. 다른 국가에서는 공유된 기억, 즉 역사가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한국인은 고조선 이래로부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의 집단적인 기억을 공유하며, 중국은 한(漢)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한다. 그러나 미국은 그러한 기억을 가지지 못한 나라이다.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미국과 미국의 정체성을 얻어내기 위해서 의지하게 되는 것이 이른바 ‘건국 이념’, 즉 건국 당시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상들이고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욕구가 무의식적으로 표출된 것이 이러한 합의에 대한 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자신이 ‘미국인’임을 자랑하는, 즉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짐을 유별나게 강조하는 것이 미국 사람들이고, 이러한 강조는 오히려 공유하는 기억을 갖지 못하는 결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가진 것을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심정이니 말이다.

3.
자유주의 합의 사학과 공화주의 합의 사학은 각각 나름의 설득력을 갖는다. 양자가 보여주는 건국 과정에서의 자유주의의 영향과 공화주의의 영향을 받은 예들은 모두 각각의 설명틀을 지지하며, 따라서 사실은 건국 과정에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는 모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합의의 가정을 과도하게 주장하게 되면 건국 과정을 주도하였다고 보는 이념과 합치하지 않는 역사적인 사실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자유주의 합의 사학이 미국에 존재하였던 반자유주의의 전통을 역사 서술에서 차례차례로 빠뜨리고, 제퍼슨이 자신이 소유한 노예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미국 내부의 욕구가 불러온 이 합의 콤플렉스를 벗어나면 미국 성립 과정에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가 기여한 부분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될 것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 정치 문명으로서의 미국의 기저에 깔려 있는 기본적 토대로서의 관념을 보다 더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보수적 아메리카니즘’(Conservative Americanism)'은 저자의 독창적인 개념으로서, 이는 “자유주의뿐만 아니라 공화주의, 캘빈주의 등 미국사를 지배해 왔던 주요 이념들의 내부적 융합과 긴장의 결과 생성된 독특한 형태의 미국적 보수성을 지칭하기 위한 개념”(p.19)이다. 즉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은 우선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융합에 의하여 형성된 이념이며 그 융합은 보수적으로 행하여졌다. 그런데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는 융합이 가능한 이념들인가? 자유주의는 사익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인간을 상정하고 그 이념을 전개하는 반면, 공화주의에서의 인간상은 공민적 덕성을 실행하는, 다시 말하면 사적 이익보다 공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인간이다. 상이한 인간관에서 출발하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가 18세기에 미국에서 융합할 수 있었던 단서를 저자는 근대성에서 찾는다. “자유주의와 공화주의가 당시의 근대성을 기준으로 해서 만났다면 고대와 근대의 간극을 뛰어넘는 상호 융합의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p.146)
 
   그렇다면 근대성이란 무엇일까?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면서 인간의 정신적 영역에는 많은 변모가 일어났지만 무엇보다 근대 최고의 성취 중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개인’의 발견이다. "공화주의는 인민(people)을 내부적 갈등이나 대립이 없는 균질적인(homogeneous) 집단으로 인식"(p.108)하였고, 개인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로마에서 사회나 경제의 기본 단위는 가(家)였으며, 개인은 자기보다 큰 집단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게 인식되었다. 반면 데카르트가 사유하는 자아를 발견한 이후 근대의 사상은 개인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로크의 자유주의는 재산권을 중심으로 하는 개인의 제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국가의 권력을 축소하여야 한다는 사상이며, 아담 스미스는 개인의 이익 추구가 공익에 합치함을 <<국부론>>에서 논증했다. 이러한 경향을 반영하여 "도덕철학으로 시작된 자유주의가 사사로운 이익만 추구하는 '사익 이데올로기'로 변모하면서 근대화했고 공화주의 또한 사익 이데올로기의 시대적 필연성을 인정하면서 근대화했다고 보면, 두 전통은 결국 '근대성'이라는 접점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p.108)
 
   저자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모두 근대화를 겪으면서 접근해 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더 많은 변모를 겪은 것은 공화주의인 것으로 보인다. 공화주의적인 덕성은 공익을 위하여 사익을 희생하는 것이며 사익의 추구가 일상화되는 것을 ‘타락’으로 파악했지만, 실제로 인간이 사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관념이 보편화되고 인간이 공공적인 특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당파적 존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공화주의는 현실과의 타협점을 찾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는 “공화주의적 덕성에 대한 환상에 매달리는 대신 ‘이기적 인간’으로 ‘덕성의 사회’를 이룰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었다.”(p.149) 즉 이기적 인간과 공민적 덕성의 양립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공화주의의 근대화’일 것인데, 독립 혁명 직후부터 고전적 덕성의 존속 가능성에 대한 회의가 발생했으며, 공화주의자들은 정치적 자유와 상업적 번영이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인식의 전환을 이룬다.
 
   공화주의는 근대적 현실을 수용하기 위해서 그 자신이 근거하고 있던 인간관을 변경하였다. 그렇다면 공화주의는 자유주의에게 이념으로서의 주도적인 지위를 내준 것일까? 저자는 “‘근대적’ 자유주의와 ‘근대화한’ 공화주의가 만난 지점의 좌표는 정치 윤리로 보면 자유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공화주의에 가까운 것이었다”(p.175)라고 말한다. 공화주의가 이기적 인간관을 수용했지만 여전히 고전적 덕성의 달성이라는 목적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융합 이후 이념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전히 덕성의 국가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융합은 공화주의적 윤리의 틀 안에서 진행되었으며 그렇다면 결국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융합은 보수적인 방향으로 귀결되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공화주의란 타락을 경계하는 이념이며 논리 필연적으로 타락하지 않았던 온전한 과거를 보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마치 공자가 춘추전국시대를 개탄하며 주(周)로의 회귀를 꿈꾼 것처럼 공화주의 역시 기본적으로는 과거로의 회귀 경향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공화주의와 자유주의의 보수적 융합의 기반 위에 퓨리터니즘, 즉 캘빈주의가 가세한다. 아메리카대륙으로의 이민자 중 중요한 구성원이 신교도들이었기에 미국의 성립 이전부터 캘빈주의는 구성원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가졌을 것이다. 캘빈주의 교리의 내용 중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천년 왕국 사상, 즉 지상에 신의 왕국이 도래할 것이라는 사상이다. 퓨리터니즘의 지도자들은 미국으로의 이민 행렬이야말로 천년 왕국을 실현하려는 신의 의지를 증명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신대륙에 건설된 국가, 즉 미국은 신의 의지가 구현된 국가이며 궁극적으로 미국 정치와 외교에서 드러나는 선민 의식, 그리고 팽창을 정당화 하는 소명 의식의 근원이 된다. 미국은 선택받은 국가이며 따라서 미국인은 다른 국가에도 신의 왕국을 구현할 역사적 사명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캘빈주의의 천년 왕국 사상은 덕성의 보존이라고 하는 미국 건국 시조들의 목표와도 기묘하게 부합한다. 즉, 타락한 구세계를 경계하고, 타락 이전의 고전적 덕성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이 건국되었다는 논리와, 타락한 구세계를 떠나 새로운 땅에 신의 왕국을 건설한다는 논리는 덕성, 고결함과 타락의 대립구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치하며, 이 점에서 칼빈주의가 공화주의와 자유주의의 융합물과 얽혀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은 사적, 상업적 인간이라는 전제 하에서 덕성의 보존이라는 궁극적, 보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자유주의, 공화주의, 캘빈주의의 융합이다.

4.
자유주의, 공화주의, 캘빈주의의 융합은 보수적인 방향으로 귀결되었고, 이렇게 해서 형성된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은 이후의 미국의 정치와 외교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애초에, 독립 혁명부터가 보수적이다. 혁명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독립 혁명의 본질은 영국 체제의 원형을 지키려는 것이었으며, "연방헌법은 자유주의적 근대성을 포용하면서도 '세월'로 인한 정치 체제의 변질 가능성을 최소화시킬 제도적 장치로 고안된 것이다."(p.186)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 대통령, 상원, 하원은 3자 견제하며, 헌법의 개정은 극도로 어렵게 되어 있다. 또한 미국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매카시즘 등의 우익 이데올로기는 근본적으로 미국의 원초적 가치가 '비미국적'인 영향 때문에 변질되는 데 대한 경계심, 즉 보수적 회귀 의식이 깔려 있다. 이외에도 저자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융합과 긴장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음을 역사적 사례들을 들어 보여주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른바 ‘미국적 평등관’이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융합에 의해서 생성된 것이라는 점이었다. “즉 캘빈주의, 공화주의, 자유주의는 모두 ‘기회 균등’의 필연적 산물인 ‘결과의 불평등’을 당연시한다는 점에서 일치”(p.221)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화주의적 의미에서의 평등이 사람의 자질과 능력에 합당한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며, 따라서 “미국의 평등관은 동일한 출발선, 즉 기회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서 인습적인 여러 특권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하되, 그 대신 경쟁의 결과로 생기는 자연 귀족과 나머지 사이의 불평등은 당연하게 보는 것이다.”(p.227) 이러한 공화주의적 평등관은 캘빈주의의 중요한 교리인 예정설, 즉 신은 구원받을 자를 정해놓고 있으며 현세에서 노력하여 성공을 이루었다는 것은 자신이 선택받았음을 입증하는 것이라는 논리와 맞아 떨어진다. 나는 ‘이론적으로는’ 이러한 평등관에 완전히 동의한다. 그러나 과연 ‘출발선에서의 완전한 평등’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제퍼슨은 균등한 교육 기회, 즉 무상 교육 등을 통하여 이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는 지금은 불가능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평등관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미국의 평등관이 이렇게 관념적인 색채를 띠게 된 것도 미국이 관념에 의하여 건설된 국가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신보수’에 대한 언급도 인상 깊었다. 저자에 의하면 신보수는 20세기 중반 이후 대두된 급진적 평등주의, 즉 기회의 평등만을 중시하는 기존의 미국적 평등관에 반발하여 결과와 원인을 도치시켜 결과의 불평등으로부터 기회의 불평등을 귀납적으로 추론하는 분위기에 대한 보수 측의 대응이다. 따라서 신보수는 결국 공화주의적 전통에 기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예전에 막연했던 것이 좀 더 명확히 보였다. 샤디아 드러리는 대표적인 신보수주의 사상가인 레오 스트라우스가 니체와 칼 슈미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고 있다. 박성래가 그의 저서인 <<레오 스트라우스>>에서 정리한 그의 견해에 의하면, 니체가 신을 죽였고 따라서 도덕의 근거가 사라졌는데, 레오 스트라우스는 이를 받아들였으나 무지한 대중들이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사회의 기반이 무너지고 서구 문명에 재앙이 닥칠 것이므로 이를 내버려 두면 곤란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스트라우스는 계속 덕성을 강조하고, 그의 제자인 하비 맨스필드는 마키아벨리의 덕성 개념을 연구한 책을 내는 등 네오콘들은 끊임 없이 덕성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네오콘들의 주장은 결국 공화주의에서 말하는 타락의 저지를 다시 한번 반복한 것이다. 즉 스트라우스는 신이라는 절대적인 도덕과 윤리의 근거가 니체에 의해 사라진 이상, 시민들이 맞이할 것은 ‘타락’밖에 없다고 보고 이에 맞서 ‘덕성’을 보존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 보존의 방식이 전쟁 등이라는 곤란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저자가 제시한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은 미국의 정치행위에 일관된 패턴을 부여하려는 시도이며, 이는 상당 부분 성공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개념이 정치현실을 단순화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권용립 역시 이를 시인한다. "미국 정치 문명으로서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은 결국하나의 지적 구조물(intellectual construction)이다.즉 물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상, 보수적 아메리카니즘도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 어쩌면 사상과 역사를 통해서 집단 정신의 모습을 그리는 일은 구르는 낙엽을 보고 바람의 모습을 짐작하는 일과 같다."(pp.336-337) 물론 정치적 현실은 급변하고, 이를 하나의 틀로서 잡아내려는 시도는 오류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을 해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틀이 필요한 것 역시 사실이다. 특히 한국처럼 미국에 대한 상반된 시각이 극한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나라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미국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일일 것이며, 그 파악을 위한 도구로서의 권용립의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라는 개념은 대단히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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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유혹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2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최후의 유혹>>은 카톨릭 교회로부터 '신성을 모독했다'는 비난을 받고 1954년에 금서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왜일까 궁금하였지만, 소설을 천천히 읽은 후에는 카톨릭 교회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 이해가 되었다. 카잔차키스의 이 소설은 성서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리스도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예수상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에서의 그리스도는 그야말로 구세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예언자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 이후 이루어낸 수많은 기적, 명료한 비유로서의 설명,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리고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즉 자신의 앞에 닥친 운명에 대한 나지막하지만 확신에 찬 어조 등. 종종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든가,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거둘 때 한 그 유명한 "주여,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등 실존적 고뇌를 드러내는 몇몇 표현이 있지만 신약의 4대 복음에 의해서 그려진 예수의 언행으로 미루어 볼 때 내게 있어 예수의 이미지는 예정된 운명을 충분히 인식하고,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초인의 이미지였고, 내가 가지고 있던 이러한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가 그리스도교가 가지고 있는 예수의 신성일 것이다.

   신적인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단적으로 말해서, 신성성은 인간적인 것을 거세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신약성서에 그려진 예수의 모습은 예수가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을 거의 겪지 않은 것처럼 묘사되는데, 이러한 묘사는 기본적으로 예수가 인간이 아니라 조물주의 아들임을 전제로 하여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예수는 그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게 될 때까지 하느님에 의해 안배된 그의 운명에 대하여 어떠한 인간적인 고뇌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카잔차키스는 이 점에 주목하여 그리스도가 가졌을 법한 인간적인 고뇌를 상상력에 의하여 복원해낸다. 즉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에 불과한 자도 아니며, 인간성이 완전히 배제된 신과 같은 존재도 아니고, "인간으로서 신에 이르려는, 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신에게로 돌아가서 인간 자신과 신을 동일시하려는 너무나 인간적이고도 너무나 초인간적인", 따라서 "이원적 본질"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고뇌는 영과 육의 투쟁이며,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지상에 화려하게 만발한 함정들을 극복한 승리"가 된다. 

   <<최후의 유혹>>의 등장인물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예수, 성모, 막달라 마리아, 사도들 등이다. 그러나 카잔차키스가 이들을 묘사하는 방식은 통념과 다르다. 성모 마리아는 결혼 당일 요셉이 벼락을 맞아 반신불수가 되었음을 한탄하고, 자신의 자식인 예수가 인간적인 행복-목수 일을 하고, 반려를 찾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오손도손 사는-을 누리기를 꿈꾼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와의 약혼이 실패한 후 절망적으로 만인에게 몸을 파는 창녀로 그려지며, 사도들은 보잘 것 없고 기회주의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사도들은 심판의 날에 누가 그리스도의 왼편과 오른편에 앉을지에 대해서 서로 자신이라 우겨대며, 제베대오의 부인 살로메는 자신의 두 아들을 앉히라고 그리스도에게 부탁한다. 토마는 예수가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메시아라는 생각이 들자, '도박을 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팔던 물건을 나누어 주고 예수에게 가담한다. 한 마디로 카찬차키스는 12사도나 성모 마리아등을 생활에 찌들은 소박한 필부에 불과한 자들로 그리고 있는데,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이는 받아들이기 힘든 해석임에는 틀림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자면 이는 굉장히 합리적인 해석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이 소박한 마음으로 예수를 따랐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소설 초반부, 즉 예수가 자신의 운명을 수긍하기 전에 보였던 모습에 있을 것이다. "야위고, 햇볕에 그을리고, 온통 붉으락푸르락한 채찍 자국이 뒤덮인 몸"으로 묘사되는 예수의 비루한 모습은 성화에서 통상 그려지는, 후광에 휩싸인 예수의 몸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예수는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할 뿐이며, 그는 "좋은 음식과 술과 웃음을 사랑"하며,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싶어"한다.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갈망할 뿐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가 행복해지려 가장 소박한 인간의 기쁨들을 누릴 기회가 찾아오기만 하면, 열 개의 발톱이 당장 그를 후벼 팠고, 그의 욕망은 사라지고 말았다." 예수는 이러한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기 위해 십자가를 만든다. 그리고 예수가 만들어낸 십자가에는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던 사람들이 매달린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기다리던 메시아상은 로마의 지배를 몰아내고 이스라엘 민족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 사람이었는데, 예수는 십자가를 만드는 행위를 통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구세주로서의 운명을 밀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의 안배를 예수가 어찌할 수는 없는 법이니, 결국 예수는 고뇌를 그만두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길을 걸어간다. 다만,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민족을 압제에서 구하기보다는 모든 인간을 형제라 부르고, 단지 "서로 사랑할 것"을 말한다. 즉 예수에 있어서 하느님의 뜻은 사랑이다.

   가리옷 사람 유다는 이러한 예수와 계속 맞부딛친다. 유다는 예수가 도끼와 불로 로마인을 모두 몰아내기를 바란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하기 위한 비밀 결사의 회원이며, 민족의 반역자를 처단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십자가를 만들어내는 예수를 죽이려고까지 했던 그에게 있어서 예수의 아가페는 못마땅할 뿐이다. "이스라엘 사람과 로마 사람은 형제가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들끼리도 형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그 강한 마음 때문에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으며, 예수는 예정된 운명의 실현을 위해 유다에게 자신을 배반할 것을 부탁한다. 이러한 카잔차키스의 해석은 기존의 유다에 대한 관념을 뒤흔든다. 유다는 종래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배신자로서 수천년동안 악명을 뒤집어 써왔다. 하지만 나는 유다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가 희생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유다는 자유의지로서 게쎄마니에서 예수를 팔아넘긴 것일까?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 예정된 수순이라면, 유다는 그 과정에서 단지 중요한 하나의 말로써 기능한 것에 불과한 것이며, 따라서 오히려 유다는 운명에의 희생자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카잔차키스의 소설에서 유다가 적극적인 그리스도의 조력자로 그려지는 점 역시 인상깊었다.

   예수는 인간적인 행복을 원했으나,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신성을 획득한다. 카잔차키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육체에 대한 영혼의 승리일 것이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최후의 유혹. 십자가에 못박힌 순간, 모든 것이 환상으로 변하고 그는 두 아내를 거느린 가장으로 살아간다. 예수는 이에 대해 만족하나, 최후의 순간 그는 이 마지막 유혹마저 극복하고 십자가에 매달린 자신을 발견한다. 예수는 그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한 구세주가 아니라, 주어진 운명에 때로는 대항하고, 때로는 유혹에 굴복하기도 하며, 위태롭게 조금씩 앞으로 전진해 최후에 승리를 얻었다. 이 책이 감동을 주는 것은 예수의 최후의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 과정에서의 위태로움에 있으며, 예수의 고뇌에 의해서 비로소 예수의 말씀과 사랑은 진정으로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다가 가장 가슴 벅찼던 부분은, 예수가 돌아와서 복음서에 실려 있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는 장면들인데, 단순히 복음서를 읽을 때는 '공자님 말씀'으로 들리던 이야기들이 인간적인 예수의 입에서 나올 때에는 정말 아름다운 비유로써 다가오는 것이었다. 이러한 체험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가장 값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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