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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유혹 1 ㅣ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2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최후의 유혹>>은 카톨릭 교회로부터 '신성을 모독했다'는 비난을 받고 1954년에 금서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왜일까 궁금하였지만, 소설을 천천히 읽은 후에는 카톨릭 교회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 이해가 되었다. 카잔차키스의 이 소설은 성서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리스도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예수상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에서의 그리스도는 그야말로 구세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예언자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 이후 이루어낸 수많은 기적, 명료한 비유로서의 설명,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리고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즉 자신의 앞에 닥친 운명에 대한 나지막하지만 확신에 찬 어조 등. 종종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든가,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거둘 때 한 그 유명한 "주여,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등 실존적 고뇌를 드러내는 몇몇 표현이 있지만 신약의 4대 복음에 의해서 그려진 예수의 언행으로 미루어 볼 때 내게 있어 예수의 이미지는 예정된 운명을 충분히 인식하고,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초인의 이미지였고, 내가 가지고 있던 이러한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가 그리스도교가 가지고 있는 예수의 신성일 것이다.
신적인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단적으로 말해서, 신성성은 인간적인 것을 거세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신약성서에 그려진 예수의 모습은 예수가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을 거의 겪지 않은 것처럼 묘사되는데, 이러한 묘사는 기본적으로 예수가 인간이 아니라 조물주의 아들임을 전제로 하여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예수는 그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게 될 때까지 하느님에 의해 안배된 그의 운명에 대하여 어떠한 인간적인 고뇌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카잔차키스는 이 점에 주목하여 그리스도가 가졌을 법한 인간적인 고뇌를 상상력에 의하여 복원해낸다. 즉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에 불과한 자도 아니며, 인간성이 완전히 배제된 신과 같은 존재도 아니고, "인간으로서 신에 이르려는, 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신에게로 돌아가서 인간 자신과 신을 동일시하려는 너무나 인간적이고도 너무나 초인간적인", 따라서 "이원적 본질"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고뇌는 영과 육의 투쟁이며,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지상에 화려하게 만발한 함정들을 극복한 승리"가 된다.
<<최후의 유혹>>의 등장인물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예수, 성모, 막달라 마리아, 사도들 등이다. 그러나 카잔차키스가 이들을 묘사하는 방식은 통념과 다르다. 성모 마리아는 결혼 당일 요셉이 벼락을 맞아 반신불수가 되었음을 한탄하고, 자신의 자식인 예수가 인간적인 행복-목수 일을 하고, 반려를 찾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오손도손 사는-을 누리기를 꿈꾼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와의 약혼이 실패한 후 절망적으로 만인에게 몸을 파는 창녀로 그려지며, 사도들은 보잘 것 없고 기회주의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사도들은 심판의 날에 누가 그리스도의 왼편과 오른편에 앉을지에 대해서 서로 자신이라 우겨대며, 제베대오의 부인 살로메는 자신의 두 아들을 앉히라고 그리스도에게 부탁한다. 토마는 예수가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메시아라는 생각이 들자, '도박을 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팔던 물건을 나누어 주고 예수에게 가담한다. 한 마디로 카찬차키스는 12사도나 성모 마리아등을 생활에 찌들은 소박한 필부에 불과한 자들로 그리고 있는데,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이는 받아들이기 힘든 해석임에는 틀림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자면 이는 굉장히 합리적인 해석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이 소박한 마음으로 예수를 따랐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소설 초반부, 즉 예수가 자신의 운명을 수긍하기 전에 보였던 모습에 있을 것이다. "야위고, 햇볕에 그을리고, 온통 붉으락푸르락한 채찍 자국이 뒤덮인 몸"으로 묘사되는 예수의 비루한 모습은 성화에서 통상 그려지는, 후광에 휩싸인 예수의 몸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예수는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할 뿐이며, 그는 "좋은 음식과 술과 웃음을 사랑"하며,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싶어"한다.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갈망할 뿐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가 행복해지려 가장 소박한 인간의 기쁨들을 누릴 기회가 찾아오기만 하면, 열 개의 발톱이 당장 그를 후벼 팠고, 그의 욕망은 사라지고 말았다." 예수는 이러한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기 위해 십자가를 만든다. 그리고 예수가 만들어낸 십자가에는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던 사람들이 매달린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기다리던 메시아상은 로마의 지배를 몰아내고 이스라엘 민족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 사람이었는데, 예수는 십자가를 만드는 행위를 통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구세주로서의 운명을 밀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의 안배를 예수가 어찌할 수는 없는 법이니, 결국 예수는 고뇌를 그만두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길을 걸어간다. 다만,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민족을 압제에서 구하기보다는 모든 인간을 형제라 부르고, 단지 "서로 사랑할 것"을 말한다. 즉 예수에 있어서 하느님의 뜻은 사랑이다.
가리옷 사람 유다는 이러한 예수와 계속 맞부딛친다. 유다는 예수가 도끼와 불로 로마인을 모두 몰아내기를 바란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하기 위한 비밀 결사의 회원이며, 민족의 반역자를 처단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십자가를 만들어내는 예수를 죽이려고까지 했던 그에게 있어서 예수의 아가페는 못마땅할 뿐이다. "이스라엘 사람과 로마 사람은 형제가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들끼리도 형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그 강한 마음 때문에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으며, 예수는 예정된 운명의 실현을 위해 유다에게 자신을 배반할 것을 부탁한다. 이러한 카잔차키스의 해석은 기존의 유다에 대한 관념을 뒤흔든다. 유다는 종래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배신자로서 수천년동안 악명을 뒤집어 써왔다. 하지만 나는 유다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가 희생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유다는 자유의지로서 게쎄마니에서 예수를 팔아넘긴 것일까?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 예정된 수순이라면, 유다는 그 과정에서 단지 중요한 하나의 말로써 기능한 것에 불과한 것이며, 따라서 오히려 유다는 운명에의 희생자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카잔차키스의 소설에서 유다가 적극적인 그리스도의 조력자로 그려지는 점 역시 인상깊었다.
예수는 인간적인 행복을 원했으나,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신성을 획득한다. 카잔차키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육체에 대한 영혼의 승리일 것이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최후의 유혹. 십자가에 못박힌 순간, 모든 것이 환상으로 변하고 그는 두 아내를 거느린 가장으로 살아간다. 예수는 이에 대해 만족하나, 최후의 순간 그는 이 마지막 유혹마저 극복하고 십자가에 매달린 자신을 발견한다. 예수는 그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한 구세주가 아니라, 주어진 운명에 때로는 대항하고, 때로는 유혹에 굴복하기도 하며, 위태롭게 조금씩 앞으로 전진해 최후에 승리를 얻었다. 이 책이 감동을 주는 것은 예수의 최후의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 과정에서의 위태로움에 있으며, 예수의 고뇌에 의해서 비로소 예수의 말씀과 사랑은 진정으로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다가 가장 가슴 벅찼던 부분은, 예수가 돌아와서 복음서에 실려 있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는 장면들인데, 단순히 복음서를 읽을 때는 '공자님 말씀'으로 들리던 이야기들이 인간적인 예수의 입에서 나올 때에는 정말 아름다운 비유로써 다가오는 것이었다. 이러한 체험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가장 값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