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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매춘과 페미니즘, 새로운 담론을 위하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1
이성숙 지음 / 책세상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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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이 책을 읽은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성매매에 대한 나의 입장에 일종의 전거(典據)를 얻고자 함에 있다. 나는 개인의 신체 처분의 자유와 계약당사자의 효용증대라는 근거를 바탕으로 성매매를 법적으로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입장은 사실은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도덕관념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과연 나는 이러한 견해를 공개적으로 강의실에서 천명했다가 성매매를 반대하는 측의 집중적인 포화를 얻어맞았으며, 이준구 선생님께는 사후에 '난 니가 처음엔 또라이인 줄 알았다'는 말씀까지 듣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전방위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까지는 내 의견을 바꿀 생각이 없다. 그 이유는 첫째로 성매매를 반대하는 측의 사람들이 나의 견해를 제대로 논박하지 못하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성매매를 반대하는 것이 오히려 매춘 여성을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와 같은 강호의 시정잡배가 아무리 떠들어봤자 '성매매는 금지되어야 한다'는 일견 그럴듯해보이는 도덕규범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귀기울여 들을 리가 없기에 뭔가 그럴 듯한 권위에 기대어 타인을 설득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같이 사형제도의 폐지를 주장해도 내가 말하는 것과 까뮈가 말하는 것의 무게감은 아무래도 다르니 말이다.

2. 이 책의 목적은 "매매춘은 근본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매매춘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 이론에 대한 비평서"이다.(p.8) 매매춘에 대한 페미니스트 이론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 매매춘과 매춘여성을 분리해 논의를 전개한다. 매매춘은 본질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제도이므로 추방되고 폐지되어야 할 대상이라 규정하는 한편, 매매춘 성립의 주체인 매춘 여성을 옹호하는 것이다."(pp.8-9) 성매매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내가 대학에 들어온 이후 만난 많은 대학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성매매라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데, 성매매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보통은 경제적 사정 등으로 인한 경우로) 성매매라는 비윤리적 행위를 할 수 밖에 없기에 성매매를 하는 개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매매춘에 대한 페미니스트 이론의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i)매매춘과 매춘여성을 분리한다.
ii)실제 매매춘 종사자들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상술한 것처럼 페미니스트 이론은 성매매 행위 자체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나 행위주체인 성매매 여성에 대해서는 옹호한다. 저자는 이러한 시각이 모순적인 것이며, "전통적인 이중규범의 다른 형태에 불과하다"(p.9)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성매매를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 성매매 여성을 옹호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중적인 태도를 취할 때, 그 결과로 도출되는 것은 구분이다. 성매매 여성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이쪽(페미니스트들이 위치하는)의 인간이 아니라, 문제가 있는 저쪽의 인간이다. 따라서 그 결과 그들은 소통의 대상이기라기보다는 구원의 대상이며, 그들은 우리들의 노력에 의해서 도덕적인 안전지대인 이쪽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러한 결론은 페미니스트 이론에 실제 매매춘 종사자들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두 번째 문제점을 낳는다. 페미니스트 이론의 관점에 의할 때, 그들은 매매춘 종사라는, 그들이 처해 있는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에서 끄집어내어져야 할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 매매춘 종사자들은 과연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에 빠져 있는가? 저자에 의하면 페미니스트 이론가와 실제 매매춘 종사자들의 성매매에 대한 시각은 완전히 다르다: "페미니스트들은 섹스 노동자들을 가리켜 여성의 육체를 시장에 내다파는 성 노예라고 주장하는 반면, 매춘 여성들은 매춘을 성적인 서비스 또는 성적인 친밀성을 판매하는 성 노동이라고 주장한다."(p.86) 

   몸을 파는 자라는 관점과 서비스 제공자라는 관점, 이 양자의 간극은 지극히 넓은 것이다. 일반인이 매매춘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몸을 파는 것'에 대한 불쾌감에 있다. 즉 성매매는 몸을 파는 행위이기 때문에 부도덕하며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저자는 이를 '도덕적 매매춘 페미니즘'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저자는 반문한다: "사실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과 술을 마시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 ... 매매춘이 본질적으로 부도덕하다고 주장하는 것으 사실상 깊이 있는 논의를 회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매매춘의 도덕 중심주의 논리는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 지점에서 논의를 끝내버리는 것에 불과한 무책임한 짓이며, 이야말로 부도덕한 짓일지 모른다."(p.35)

   이러한 관념에 대한 매매춘 종사자들(정확하게는 매춘 페미니스트들)의 대응전략은 성매매의 의미를 몸을 파는 것에서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1986 브뤼셀에서 합의된 매춘 여성이 단지 "가장 오래된 직업"을 가진 여성 임금 노동자들 가운데 일부분일 뿐이라는 매춘 여성에 대한 개념의 재정립은 이러한 노력의 대표적인 것인데, 이러한 매매춘 페미니스트들의 전략이 추구하는 것은 결국 매매춘을 탈도덕화하여 가치중립적인 노동의 일환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 하에서는 "성 노동자로서의 매춘 여성과 다른 직종의 노동자나 서비스 판매자 간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매춘부는 단지 자신의 신체상 재산에 대해 외적 관계에 서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매춘 여성은 자신의 신체와 자아를 파는 것이 아니며, 그녀의 서비스를 원하는 고객과 아무 손해 없이 거래할 수 있는 노동자들이다."(p.20) 결국 매매춘을 가치중립적인 노동으로 취급하자는 이러한 주장은 저자가 지적한 페미니스트 이론의 문제점 중 첫 번째, 매매춘행위와 종사 여성을 분리하는 태도를 공격하는 것이다. 양자를 분리하는 태도는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이 매매춘이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라는 가정과 매매춘 여성을 옹호하는 태도 양자를 공히 포기하지 않는 것의 결과인데, 만약 매매춘이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가 아니며 가치중립적인 노동이라면 행위와 행위자를 구태여 분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성매매라는 행위에 대한 이러한 대립적 관점은 사실 논증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논증 이전의 공리에 가깝다. 이러한 공리의 타당성은 결국 그 공리를 취함으로써 얻게 되는 결과가 얼마나 개인과 사회의 행복에 기여하는가에 의해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파시스트들의 가치관을 옳지 않다고 할때, 그 이유는 그들의 가치관이 이론적 정합성, 합리성이 없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파시즘이 전면적으로 대두할 때 개인과 사회가 파국적인 결말로 치닫는다는 것을 역사적 체험을 통하여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매매를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로 보는 관념은 개인과 사회의 행복 증진에 기여한다고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성매매를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보는 태도가 도덕적 위선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한다. 성매매 여성들을 구석으로 내모는 것은 궁극적으로 성매매를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 우리들의 편견이다.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인권착취와 같은 행위들은 이러한 편견의 결과에 불과하다: "여성의 인권을 노골적으로 말살하는 이 부조리한 상황이 가능한 요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매매춘을 본질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는 여러 가지 가설과 담론들의 경고와 관련 있다. 매춘 여성들의 인권을 탄압하는 주범은 특정 사회의 개인과 집단이 갖고 있는 적대적이며 위선적인 태도들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적대적인 태도는, 섹스 자본가들이 매춘 여성 노동자를 계속 착취하도록 승인하는 것과 같으며, 매매춘에서 남녀의 불평등한 관계 형성은 물론이고 여성성을 경멸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조건이 된다."(p.91)

3.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성매매에 대한 나의 견해를 상당 부분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성매매를 법적으로 금지하여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는 변함이 없지만, 글을 읽기 전에 나는 성매매를 하는 행위 자체는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라는 전제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요컨대 종래의 나의 주장은 거칠게 말하자면 성매매가 좋지는 않지만 안하고 굶어죽는 것보다는 몸이라도 팔고 먹고 사는 게 낫다는 것이었는데, 성매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수용한다면 성매매 행위는 신체 처분의 자유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근로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매매를 법의 테두리 안에 끌어들이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그것이 가치중립적인 행위이기도 하지만, 합법의 영역으로의 포섭을 통해 성매매에 대한 사회 성원의 관념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유엔은 매춘 여성을 조직적으로 착취하는 것을 방지하고 그들의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 매매춘이 합법화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유엔의 이 같은 결정으로 각국이 매춘 여성을 법적 규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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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2009-10-06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논의 잘 읽었습니다. 그저 제 직관상 평을 하자면,
성매매의 윤리적 평가/ 성매매 합법화 인정여부 의 두가지로 나누어서 생각들 해봐야 한다고 보여지네요.

전자의 경우는,
먼저 성매매를 성서비스의 단계로 나아가고자 할 때, 과연 성이 수단적으로만 온전히 써 질 수 있는가.
성 그자체를 서비스화하면서 곧 존엄이 상실되는 여지가 있다면, 비록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자의에 의한다고
말할지라도, 그 내면 깊은 곳에서 그것인 진의인가, 진의 아닌 자발적 의지만으로 그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하다 말할 수 있을 만큼 성적자기 결정권 혹은 성이라는 인간 존엄의 훼손의 침해가 미미한 가..
그런 것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고,

둘째로,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기의 효용적 처분의 강제적 제한은, 과연 국가가 제한해야할
공익적 목적이 있는 가에 대해서 판단해봐야 한다고 보는데요.
저는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 관념적인 존재로만 보지 않고 몸 그자체도
인간이라고 봅니다. 예컨대, 팔은 나다. 몸은 나다. 다리는 나다. 라고 봅니다. 나는 다리를 가졌다.
나는 팔을 가졌다, 가 아니라요. 우리는 물건을 매매하는 것 자체는 상품교환적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시장질서로 받아들이지만, 인간을 매매하게 놨둘 경우 벌어지는 인간의 물화현상이 과연, 관념적, 도덕적
측면에서의 당위평가에서만 작동하는 지, 아니면 그 이상의 해악을 지니는 지, 잘 생각해 봐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사실 저같은 아나키적 입장에서는, 화는 나지만, 국가라는 개념을 추상체로 파악하고, 국가를 만들기 위해
계약하지 않은 자들 역시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에, 성매매 종사자들의 자발적 의지와 더불어 착취 없는 좋은 형태의 노동조건(순전히 자본주의적 시선에서 볼 때)이 있다면, 그들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싶구요. 다만 이들의 성매매를 막기 위한 시민적 차원의 대대적인 교육이라던가, 저항운동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결국 정치적 불매 운동이
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횡설수설입니다. ㅎㅎ


마요러브 2009-10-10 12:59   좋아요 0 | URL
댓글 잘 읽었습니다. 주신 의견에 대해서 저도 이야기해보자면

1.
'내면 깊은 곳에서 온전히 진의'인 행동은 사람에게 있어서 얼마 없지요. 간단하게 직장생활만 하더라도, 그것을 100% 완전한 자발적 의지로서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죠. 사람의 행동은 대부분 자기목적적이 아니라 수단적인 것이지요.

2.
몸 자체를 인간이라고 보는 관점에 의하면 이성숙의 견해는 받아들일 여지가 없습니다. 그는 성매매를 단순한 서비스업으로 보는 관점을 전제하고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기에 말이지요. 결국 우리는 양자택일해야 할 겁니다. 성매매를 몸파는 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서비스업으로 볼 것인가. 어떤 공리(公理)를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을지에 대한 판단기준은 어느 공리가 사회적으로 이득인가에 의해 결정되어야 할 것이고, 저자가 지적하듯이 성매매를 몸파는 일로 보는 순간 성매매는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성매매를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보는 이상,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요원한 것이 되어버리죠.

결국 이성숙은 그래서 파천황적인 제안을 하는 것이지요. 그건 성매매를 가치중립적으로 파악하자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는, 우리에게 이런 관념의 전환이 없는 이상, 성매매에 대한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불가능합니다.

음... 2009-10-11 0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요컨대 신체적 존엄이냐, 노동의 열매냐의 양자택일의 문제라는 거지요? 개인적으로는 신체적 존엄을 지키면서 노동의 열매를 얻을 수 있는 제 3의 대안에 대해서 우리가 진심으로 진정성있게 고민해 보았나, 같이 연대해서 그 무게를 짊어지려 해봤나 하는 생각이 드는 군요. 그런 점에서 님께서 말씀하신 사회적 '이득'이란 것이 정확히 어떤 개념일 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저도 솔직히 쉽게 돈 벌 수 있다면 술집따위를 나가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지만, 또 제곁의 친한 지인들 중 누군가는 그런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건 김규항씨가 던진 질문이 떠오르는 군요.

"하고 싶지 않은 상대와 섹스하지 않고도 비슷한 돈을 벌 수 있다면 세상에 누가 제 존엄을 팔아 살겠는가? "

마요러브 2009-10-18 04:41   좋아요 0 | URL
저도 김규항씨의 말에는 동의합니다. 성매매를 하지 않고도 비슷한 돈을 벌 수 있는 상태가 더 좋은 상태라는 것에는. (너무 딱딱해질지는 모르지만..) 도식화해보겠습니다. 선택지는 3가지입니다. 수치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1)성매매를 하지 않고, 0원의 소득을 얻는다.
2)성매매를 하고, 100원의 소득을 얻는다.
3)성매매 외의 다른 일을 하고, 100원의 소득을 얻는다.

김규항씨의 말은 2)보다 3)이 더 좋음을 역설하고 있지요. 그런데 실제로 매춘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3)은 불가능한 선택지인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존엄을 팔지 않고도 비슷한 돈을 벌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좋음에도, 성매매를 한다는 것은 그 비슷한 돈을 벌 수 있는 가능성이 행위자에게 막혀 있기 때문일 겁니다.

정리하자면, 저는 김규항씨의 말에 동의합니다. 다만, 3)의 선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2)의 선택조차도 할 수 없게 만들어 1)의 상태에 강제적으로 빠뜨리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뿐이지요.

성매매를 하지 않고도 비슷한 돈을 벌 수 있다면, 성매매를 어차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성매매의 규제는 불필요합니다. 반면, 성매매를 하지 않고는 그 돈을 벌 수 없다면, 성매매를 할 자유는 열어두는 것이 바람직하기에 성매매를 규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이게 지금의 제 견해이지요.
 
미국의 정치 문명
권용립 지음 / 삼인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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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권용립의 <<미국의 정치 문명>>을 서평도서로 결정하게 된 이유는 이 책이 미국의 정치를 제도나 사건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고찰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었다. 대학에 들어오고 난 후 지금까지의 미국 행정부는 부시의 공화당 정권이었고, 따라서 내가 제대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미국 역시 부시 정권 하의 미국이었다. 그런데 미 정권이 보여주었던 행동과 입에 담았던 말들은 대단히 특이한 것들이었다. 이란, 북한, 이라크 등 끊임없이 자신들의 외부에 적을 상정하는 태도, ‘악의 축’ 발언 등을 통하여 드러나는 선악의 대결구도, 정교 분리를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 없이 암시되는 기독교적 태도 등 부시 행정부가 보여주었던 행동들은 세계의 다른 국가들의 행정부와는 사뭇 다른 것들이었다.

   물론 현재 미국은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이며 따라서 발생하는 트러블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많은 트러블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각각 그럴 듯한 답변을 제시하였다. 이란이나 북한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핵무기 때문이며, 이라크에 대한 침공은 석유 때문이라는 등의 답이 그것들이다. 물론 그 대답들은 상당한 현실 설명력을 지닌다. 그러나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미국의 행위를 그 기저에 놓인 일관된 사상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많은 것을 하나의 틀로서 파악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우리는 미국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역시 들었다. 한쪽에서는 미국을 마냥 찬양하고, 한쪽에서는 제국이라든가 세상의 모든 악의 근원인양 묘사한다. 그러나 이 양쪽 모두 ‘미국은 왜 그런 행위를 하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내어놓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전자는 관심이 없어 보이며, 후자는 탐욕 때문이라는 막연한 말을 할 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물론 국가는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움직일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라는 국가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가치관이라든가,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 등은 존재하여 그것에 맞추어서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그 프레임이 무엇인가라는 것인데, 권용립의 책은 그 틀로서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저자에 따르면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은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그리고 캘빈주의라는 미국 건국에 있어서 중요한 세 이념의 융합물이며, 이는 미국의 정치와 외교에 있어서 기본적인 이념이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전반부는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의 기원을, 그리고 후반부는 미국의 정치와 외교에서 이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 어떻게 반복하여 표출되어 왔는지를 살핀다. 이 서평은 주로 전자, 즉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 어떠한 배경 하에서 성립되었고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정리하는 데에 그 주된 목적이 있으며, 이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 어떻게 표출되어 왔나에 대해서는 미국의 평등관, 그리고 신보수주의를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

2.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선결적으로 검토되어야 하는 것이 미국의 주도적인 역사학인 합의 사학(Consensus History)이다. 권용립에 의하면 이 합의 사학은 미국이 그 내부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으로서, 미국이 그 성립과정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일한 이념을 지도적인 정치 이념으로 삼아 왔으며, 따라서 미국 내에서의 정치적인 대립과 투쟁은 서로 상이한 비전(vision)을 실현하기 위한 대립이 아니라 합의되었던 토대 이념의 실현을 위한 방법론적 투쟁에 불과하다고 보는 관점이다. 다만 미국 건국에서 주도적이었으며 지금까지도 미국을 주도하고 있는 정치적인 이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자유주의 합의 사학과 공화주의 합의 사학이 대립한다.
  
   자유주의 합의 사학은 지금도 미국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는 관점으로, 자유주의를 미국의 합의된 토대 이념으로 보는 관점이다. 여기서의 자유주의는 존 로크의 자유주의로, 재산권의 보장을 근간으로 하여 국가는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만 존재하며 따라서 국가가 국민의 권리에 부당한 침해를 가할 때 국민은 국가에 저항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다. 결국 로크의 자유주의는 경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자유주의라고 할 것인데,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무절제한 자기 이익을 위한 철학이 아니라 일종의 ‘덕성’을 요구하는 사상이다. 이러한 로크의 자유주의가 18세기 스코틀랜드 사상, 대표적으로 아담 스미스의 사상과 결합하여 미국의 건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반면 공화주의가 미국 건국에서 중심적인 이념이었다는 것이 공화주의 합의 사학이다. 공화주의는 “덕성과 타락간의 팽팽한 긴장을 전제로 해서 정치를 파악하는 정치 윤리이며 정치 도덕이다.”(p.104)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i)법에 의한 지배, ii)공화주의적 자유, iii)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공공 정치체(commonwealth), iv)인민에 의한 정부 사상, v)혼합 정체의 다섯 개의 기본 관념을 중심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공화주의 사상의 핵심 윤리는 공민적 덕성(Civil virtue)이며 사치와 타락의 경계인데, 포칵, 베일린 등 공화주의 합의 사학자들에 의하면 미국의 건국 시조들은 덕성과 타락의 대립을 설정하고 공민적 덕성을 정치의 핵심으로 보는 고대의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건국 시조들은 영국이 시간 속에서 타락을 면할 수 없으며 따라서 타락을 회피하고 ‘최선의 과거’를 보존하기 위해 미국을 건립하였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 합의 사학과 공화주의 합의 사학은 한 가지 전제를 공유한다. 그것은 미국의 건국에 있어서 주도적인 이념이 하나라는 점, 즉 미국은 단일한 이념 하에 성립된 국가이며 그 단일한 이념이 지금까지 정치 문명으로서의 미국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 대립은 ‘미국의 예외성’과 또 ‘원초적 이념’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미국적 사고 방식 안에서의 대립인 것이다.(p.331) 저자는 이러한 전제를 “합의 콤플렉스”라고 이름 붙인다. 미국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누려온 합의 사학은 왜 이렇게 합의된 이념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일까? 이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가지는 특수한 성격에 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서유럽 문명권의 국가는 피를 나눈 역사적 민족과 그 집단적 기억이 교직되면서 형성된 민족 국가인데 반해서 미국은 국가와 이념을 먼저 설계해 놓고 그 이후에 받아들인 여러 인종으로 민족과 그 기억을 제조해 온 나라”(p.8)이며, 이러한 미국의 특성, 즉 삶이 우선하고 국가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신대륙이라는 공간에서 인위적으로 국가가 먼저 설계되고 집단적 기억을 제조해 온 국가라는 특성이 미국인들에게 합의 콤플렉스를 갖게 한 것이 아닐까? 어떤 집단이든지간에 그것이 구체적으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어떤 중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중심은 일단 집단이나 조직체가 형성된 이후에는 그들이 가지는 정체성의 기반이 된다. 다른 국가에서는 공유된 기억, 즉 역사가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한국인은 고조선 이래로부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의 집단적인 기억을 공유하며, 중국은 한(漢)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한다. 그러나 미국은 그러한 기억을 가지지 못한 나라이다.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미국과 미국의 정체성을 얻어내기 위해서 의지하게 되는 것이 이른바 ‘건국 이념’, 즉 건국 당시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상들이고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욕구가 무의식적으로 표출된 것이 이러한 합의에 대한 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자신이 ‘미국인’임을 자랑하는, 즉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짐을 유별나게 강조하는 것이 미국 사람들이고, 이러한 강조는 오히려 공유하는 기억을 갖지 못하는 결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가진 것을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심정이니 말이다.

3.
자유주의 합의 사학과 공화주의 합의 사학은 각각 나름의 설득력을 갖는다. 양자가 보여주는 건국 과정에서의 자유주의의 영향과 공화주의의 영향을 받은 예들은 모두 각각의 설명틀을 지지하며, 따라서 사실은 건국 과정에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는 모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합의의 가정을 과도하게 주장하게 되면 건국 과정을 주도하였다고 보는 이념과 합치하지 않는 역사적인 사실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자유주의 합의 사학이 미국에 존재하였던 반자유주의의 전통을 역사 서술에서 차례차례로 빠뜨리고, 제퍼슨이 자신이 소유한 노예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미국 내부의 욕구가 불러온 이 합의 콤플렉스를 벗어나면 미국 성립 과정에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가 기여한 부분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될 것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 정치 문명으로서의 미국의 기저에 깔려 있는 기본적 토대로서의 관념을 보다 더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보수적 아메리카니즘’(Conservative Americanism)'은 저자의 독창적인 개념으로서, 이는 “자유주의뿐만 아니라 공화주의, 캘빈주의 등 미국사를 지배해 왔던 주요 이념들의 내부적 융합과 긴장의 결과 생성된 독특한 형태의 미국적 보수성을 지칭하기 위한 개념”(p.19)이다. 즉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은 우선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융합에 의하여 형성된 이념이며 그 융합은 보수적으로 행하여졌다. 그런데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는 융합이 가능한 이념들인가? 자유주의는 사익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인간을 상정하고 그 이념을 전개하는 반면, 공화주의에서의 인간상은 공민적 덕성을 실행하는, 다시 말하면 사적 이익보다 공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인간이다. 상이한 인간관에서 출발하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가 18세기에 미국에서 융합할 수 있었던 단서를 저자는 근대성에서 찾는다. “자유주의와 공화주의가 당시의 근대성을 기준으로 해서 만났다면 고대와 근대의 간극을 뛰어넘는 상호 융합의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p.146)
 
   그렇다면 근대성이란 무엇일까?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면서 인간의 정신적 영역에는 많은 변모가 일어났지만 무엇보다 근대 최고의 성취 중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개인’의 발견이다. "공화주의는 인민(people)을 내부적 갈등이나 대립이 없는 균질적인(homogeneous) 집단으로 인식"(p.108)하였고, 개인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로마에서 사회나 경제의 기본 단위는 가(家)였으며, 개인은 자기보다 큰 집단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게 인식되었다. 반면 데카르트가 사유하는 자아를 발견한 이후 근대의 사상은 개인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로크의 자유주의는 재산권을 중심으로 하는 개인의 제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국가의 권력을 축소하여야 한다는 사상이며, 아담 스미스는 개인의 이익 추구가 공익에 합치함을 <<국부론>>에서 논증했다. 이러한 경향을 반영하여 "도덕철학으로 시작된 자유주의가 사사로운 이익만 추구하는 '사익 이데올로기'로 변모하면서 근대화했고 공화주의 또한 사익 이데올로기의 시대적 필연성을 인정하면서 근대화했다고 보면, 두 전통은 결국 '근대성'이라는 접점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p.108)
 
   저자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모두 근대화를 겪으면서 접근해 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더 많은 변모를 겪은 것은 공화주의인 것으로 보인다. 공화주의적인 덕성은 공익을 위하여 사익을 희생하는 것이며 사익의 추구가 일상화되는 것을 ‘타락’으로 파악했지만, 실제로 인간이 사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관념이 보편화되고 인간이 공공적인 특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당파적 존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공화주의는 현실과의 타협점을 찾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는 “공화주의적 덕성에 대한 환상에 매달리는 대신 ‘이기적 인간’으로 ‘덕성의 사회’를 이룰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었다.”(p.149) 즉 이기적 인간과 공민적 덕성의 양립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공화주의의 근대화’일 것인데, 독립 혁명 직후부터 고전적 덕성의 존속 가능성에 대한 회의가 발생했으며, 공화주의자들은 정치적 자유와 상업적 번영이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인식의 전환을 이룬다.
 
   공화주의는 근대적 현실을 수용하기 위해서 그 자신이 근거하고 있던 인간관을 변경하였다. 그렇다면 공화주의는 자유주의에게 이념으로서의 주도적인 지위를 내준 것일까? 저자는 “‘근대적’ 자유주의와 ‘근대화한’ 공화주의가 만난 지점의 좌표는 정치 윤리로 보면 자유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공화주의에 가까운 것이었다”(p.175)라고 말한다. 공화주의가 이기적 인간관을 수용했지만 여전히 고전적 덕성의 달성이라는 목적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융합 이후 이념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전히 덕성의 국가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융합은 공화주의적 윤리의 틀 안에서 진행되었으며 그렇다면 결국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융합은 보수적인 방향으로 귀결되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공화주의란 타락을 경계하는 이념이며 논리 필연적으로 타락하지 않았던 온전한 과거를 보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마치 공자가 춘추전국시대를 개탄하며 주(周)로의 회귀를 꿈꾼 것처럼 공화주의 역시 기본적으로는 과거로의 회귀 경향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공화주의와 자유주의의 보수적 융합의 기반 위에 퓨리터니즘, 즉 캘빈주의가 가세한다. 아메리카대륙으로의 이민자 중 중요한 구성원이 신교도들이었기에 미국의 성립 이전부터 캘빈주의는 구성원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가졌을 것이다. 캘빈주의 교리의 내용 중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천년 왕국 사상, 즉 지상에 신의 왕국이 도래할 것이라는 사상이다. 퓨리터니즘의 지도자들은 미국으로의 이민 행렬이야말로 천년 왕국을 실현하려는 신의 의지를 증명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신대륙에 건설된 국가, 즉 미국은 신의 의지가 구현된 국가이며 궁극적으로 미국 정치와 외교에서 드러나는 선민 의식, 그리고 팽창을 정당화 하는 소명 의식의 근원이 된다. 미국은 선택받은 국가이며 따라서 미국인은 다른 국가에도 신의 왕국을 구현할 역사적 사명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캘빈주의의 천년 왕국 사상은 덕성의 보존이라고 하는 미국 건국 시조들의 목표와도 기묘하게 부합한다. 즉, 타락한 구세계를 경계하고, 타락 이전의 고전적 덕성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이 건국되었다는 논리와, 타락한 구세계를 떠나 새로운 땅에 신의 왕국을 건설한다는 논리는 덕성, 고결함과 타락의 대립구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치하며, 이 점에서 칼빈주의가 공화주의와 자유주의의 융합물과 얽혀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은 사적, 상업적 인간이라는 전제 하에서 덕성의 보존이라는 궁극적, 보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자유주의, 공화주의, 캘빈주의의 융합이다.

4.
자유주의, 공화주의, 캘빈주의의 융합은 보수적인 방향으로 귀결되었고, 이렇게 해서 형성된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은 이후의 미국의 정치와 외교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애초에, 독립 혁명부터가 보수적이다. 혁명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독립 혁명의 본질은 영국 체제의 원형을 지키려는 것이었으며, "연방헌법은 자유주의적 근대성을 포용하면서도 '세월'로 인한 정치 체제의 변질 가능성을 최소화시킬 제도적 장치로 고안된 것이다."(p.186)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 대통령, 상원, 하원은 3자 견제하며, 헌법의 개정은 극도로 어렵게 되어 있다. 또한 미국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매카시즘 등의 우익 이데올로기는 근본적으로 미국의 원초적 가치가 '비미국적'인 영향 때문에 변질되는 데 대한 경계심, 즉 보수적 회귀 의식이 깔려 있다. 이외에도 저자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융합과 긴장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음을 역사적 사례들을 들어 보여주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른바 ‘미국적 평등관’이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융합에 의해서 생성된 것이라는 점이었다. “즉 캘빈주의, 공화주의, 자유주의는 모두 ‘기회 균등’의 필연적 산물인 ‘결과의 불평등’을 당연시한다는 점에서 일치”(p.221)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화주의적 의미에서의 평등이 사람의 자질과 능력에 합당한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며, 따라서 “미국의 평등관은 동일한 출발선, 즉 기회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서 인습적인 여러 특권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하되, 그 대신 경쟁의 결과로 생기는 자연 귀족과 나머지 사이의 불평등은 당연하게 보는 것이다.”(p.227) 이러한 공화주의적 평등관은 캘빈주의의 중요한 교리인 예정설, 즉 신은 구원받을 자를 정해놓고 있으며 현세에서 노력하여 성공을 이루었다는 것은 자신이 선택받았음을 입증하는 것이라는 논리와 맞아 떨어진다. 나는 ‘이론적으로는’ 이러한 평등관에 완전히 동의한다. 그러나 과연 ‘출발선에서의 완전한 평등’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제퍼슨은 균등한 교육 기회, 즉 무상 교육 등을 통하여 이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는 지금은 불가능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평등관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미국의 평등관이 이렇게 관념적인 색채를 띠게 된 것도 미국이 관념에 의하여 건설된 국가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신보수’에 대한 언급도 인상 깊었다. 저자에 의하면 신보수는 20세기 중반 이후 대두된 급진적 평등주의, 즉 기회의 평등만을 중시하는 기존의 미국적 평등관에 반발하여 결과와 원인을 도치시켜 결과의 불평등으로부터 기회의 불평등을 귀납적으로 추론하는 분위기에 대한 보수 측의 대응이다. 따라서 신보수는 결국 공화주의적 전통에 기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예전에 막연했던 것이 좀 더 명확히 보였다. 샤디아 드러리는 대표적인 신보수주의 사상가인 레오 스트라우스가 니체와 칼 슈미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고 있다. 박성래가 그의 저서인 <<레오 스트라우스>>에서 정리한 그의 견해에 의하면, 니체가 신을 죽였고 따라서 도덕의 근거가 사라졌는데, 레오 스트라우스는 이를 받아들였으나 무지한 대중들이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사회의 기반이 무너지고 서구 문명에 재앙이 닥칠 것이므로 이를 내버려 두면 곤란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스트라우스는 계속 덕성을 강조하고, 그의 제자인 하비 맨스필드는 마키아벨리의 덕성 개념을 연구한 책을 내는 등 네오콘들은 끊임 없이 덕성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네오콘들의 주장은 결국 공화주의에서 말하는 타락의 저지를 다시 한번 반복한 것이다. 즉 스트라우스는 신이라는 절대적인 도덕과 윤리의 근거가 니체에 의해 사라진 이상, 시민들이 맞이할 것은 ‘타락’밖에 없다고 보고 이에 맞서 ‘덕성’을 보존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 보존의 방식이 전쟁 등이라는 곤란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저자가 제시한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은 미국의 정치행위에 일관된 패턴을 부여하려는 시도이며, 이는 상당 부분 성공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개념이 정치현실을 단순화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권용립 역시 이를 시인한다. "미국 정치 문명으로서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은 결국하나의 지적 구조물(intellectual construction)이다.즉 물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상, 보수적 아메리카니즘도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 어쩌면 사상과 역사를 통해서 집단 정신의 모습을 그리는 일은 구르는 낙엽을 보고 바람의 모습을 짐작하는 일과 같다."(pp.336-337) 물론 정치적 현실은 급변하고, 이를 하나의 틀로서 잡아내려는 시도는 오류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을 해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틀이 필요한 것 역시 사실이다. 특히 한국처럼 미국에 대한 상반된 시각이 극한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나라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미국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일일 것이며, 그 파악을 위한 도구로서의 권용립의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라는 개념은 대단히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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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유혹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2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최후의 유혹>>은 카톨릭 교회로부터 '신성을 모독했다'는 비난을 받고 1954년에 금서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왜일까 궁금하였지만, 소설을 천천히 읽은 후에는 카톨릭 교회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 이해가 되었다. 카잔차키스의 이 소설은 성서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리스도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예수상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에서의 그리스도는 그야말로 구세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예언자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한 이후 이루어낸 수많은 기적, 명료한 비유로서의 설명,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리고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즉 자신의 앞에 닥친 운명에 대한 나지막하지만 확신에 찬 어조 등. 종종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든가,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거둘 때 한 그 유명한 "주여,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등 실존적 고뇌를 드러내는 몇몇 표현이 있지만 신약의 4대 복음에 의해서 그려진 예수의 언행으로 미루어 볼 때 내게 있어 예수의 이미지는 예정된 운명을 충분히 인식하고,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초인의 이미지였고, 내가 가지고 있던 이러한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가 그리스도교가 가지고 있는 예수의 신성일 것이다.

   신적인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단적으로 말해서, 신성성은 인간적인 것을 거세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신약성서에 그려진 예수의 모습은 예수가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을 거의 겪지 않은 것처럼 묘사되는데, 이러한 묘사는 기본적으로 예수가 인간이 아니라 조물주의 아들임을 전제로 하여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예수는 그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게 될 때까지 하느님에 의해 안배된 그의 운명에 대하여 어떠한 인간적인 고뇌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카잔차키스는 이 점에 주목하여 그리스도가 가졌을 법한 인간적인 고뇌를 상상력에 의하여 복원해낸다. 즉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에 불과한 자도 아니며, 인간성이 완전히 배제된 신과 같은 존재도 아니고, "인간으로서 신에 이르려는, 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신에게로 돌아가서 인간 자신과 신을 동일시하려는 너무나 인간적이고도 너무나 초인간적인", 따라서 "이원적 본질"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고뇌는 영과 육의 투쟁이며,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지상에 화려하게 만발한 함정들을 극복한 승리"가 된다. 

   <<최후의 유혹>>의 등장인물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예수, 성모, 막달라 마리아, 사도들 등이다. 그러나 카잔차키스가 이들을 묘사하는 방식은 통념과 다르다. 성모 마리아는 결혼 당일 요셉이 벼락을 맞아 반신불수가 되었음을 한탄하고, 자신의 자식인 예수가 인간적인 행복-목수 일을 하고, 반려를 찾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오손도손 사는-을 누리기를 꿈꾼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와의 약혼이 실패한 후 절망적으로 만인에게 몸을 파는 창녀로 그려지며, 사도들은 보잘 것 없고 기회주의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사도들은 심판의 날에 누가 그리스도의 왼편과 오른편에 앉을지에 대해서 서로 자신이라 우겨대며, 제베대오의 부인 살로메는 자신의 두 아들을 앉히라고 그리스도에게 부탁한다. 토마는 예수가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메시아라는 생각이 들자, '도박을 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팔던 물건을 나누어 주고 예수에게 가담한다. 한 마디로 카찬차키스는 12사도나 성모 마리아등을 생활에 찌들은 소박한 필부에 불과한 자들로 그리고 있는데,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이는 받아들이기 힘든 해석임에는 틀림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자면 이는 굉장히 합리적인 해석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살았던 평범한 사람들이 소박한 마음으로 예수를 따랐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소설 초반부, 즉 예수가 자신의 운명을 수긍하기 전에 보였던 모습에 있을 것이다. "야위고, 햇볕에 그을리고, 온통 붉으락푸르락한 채찍 자국이 뒤덮인 몸"으로 묘사되는 예수의 비루한 모습은 성화에서 통상 그려지는, 후광에 휩싸인 예수의 몸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예수는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할 뿐이며, 그는 "좋은 음식과 술과 웃음을 사랑"하며,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싶어"한다.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갈망할 뿐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가 행복해지려 가장 소박한 인간의 기쁨들을 누릴 기회가 찾아오기만 하면, 열 개의 발톱이 당장 그를 후벼 팠고, 그의 욕망은 사라지고 말았다." 예수는 이러한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기 위해 십자가를 만든다. 그리고 예수가 만들어낸 십자가에는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던 사람들이 매달린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기다리던 메시아상은 로마의 지배를 몰아내고 이스라엘 민족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 사람이었는데, 예수는 십자가를 만드는 행위를 통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구세주로서의 운명을 밀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의 안배를 예수가 어찌할 수는 없는 법이니, 결국 예수는 고뇌를 그만두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길을 걸어간다. 다만,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민족을 압제에서 구하기보다는 모든 인간을 형제라 부르고, 단지 "서로 사랑할 것"을 말한다. 즉 예수에 있어서 하느님의 뜻은 사랑이다.

   가리옷 사람 유다는 이러한 예수와 계속 맞부딛친다. 유다는 예수가 도끼와 불로 로마인을 모두 몰아내기를 바란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하기 위한 비밀 결사의 회원이며, 민족의 반역자를 처단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십자가를 만들어내는 예수를 죽이려고까지 했던 그에게 있어서 예수의 아가페는 못마땅할 뿐이다. "이스라엘 사람과 로마 사람은 형제가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들끼리도 형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그 강한 마음 때문에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으며, 예수는 예정된 운명의 실현을 위해 유다에게 자신을 배반할 것을 부탁한다. 이러한 카잔차키스의 해석은 기존의 유다에 대한 관념을 뒤흔든다. 유다는 종래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배신자로서 수천년동안 악명을 뒤집어 써왔다. 하지만 나는 유다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가 희생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유다는 자유의지로서 게쎄마니에서 예수를 팔아넘긴 것일까?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 예정된 수순이라면, 유다는 그 과정에서 단지 중요한 하나의 말로써 기능한 것에 불과한 것이며, 따라서 오히려 유다는 운명에의 희생자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카잔차키스의 소설에서 유다가 적극적인 그리스도의 조력자로 그려지는 점 역시 인상깊었다.

   예수는 인간적인 행복을 원했으나,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신성을 획득한다. 카잔차키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육체에 대한 영혼의 승리일 것이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최후의 유혹. 십자가에 못박힌 순간, 모든 것이 환상으로 변하고 그는 두 아내를 거느린 가장으로 살아간다. 예수는 이에 대해 만족하나, 최후의 순간 그는 이 마지막 유혹마저 극복하고 십자가에 매달린 자신을 발견한다. 예수는 그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한 구세주가 아니라, 주어진 운명에 때로는 대항하고, 때로는 유혹에 굴복하기도 하며, 위태롭게 조금씩 앞으로 전진해 최후에 승리를 얻었다. 이 책이 감동을 주는 것은 예수의 최후의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 과정에서의 위태로움에 있으며, 예수의 고뇌에 의해서 비로소 예수의 말씀과 사랑은 진정으로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다가 가장 가슴 벅찼던 부분은, 예수가 돌아와서 복음서에 실려 있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는 장면들인데, 단순히 복음서를 읽을 때는 '공자님 말씀'으로 들리던 이야기들이 인간적인 예수의 입에서 나올 때에는 정말 아름다운 비유로써 다가오는 것이었다. 이러한 체험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가장 값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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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료 윤리학
김상득 지음 / 철학과현실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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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신중절을 반대하는 가장 기초적인 논리는 이렇다.

(1)무고한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2)수태된 배아나 태아는 무고하며 살아 있는 인간이다.
(3)그러므로 배아나 태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나는 주변의 사람들과 임신중절의 정당화 가능성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 중에는 임신중절을 찬성하는 사람 역시 많았고, 그들은 수많은 찬성의 논거를 내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많은 논거에도 불구하고 나는 임신중절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내어놓는 저 형식 논리가 그릇되었음을 증명하지 못하는 이상 임신중절이 합리화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태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 같았고, 태아가 사람이라면 그를 다른 목적을 위하여 죽인다는 것은 아무래도 허용되어서는 곤란할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고 내가 임신중절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였던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임신중절에 대한 저 형식논리에 대한 반대 의견을 듣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대화하였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저 형식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온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임신중절에 대한 담론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삼단 논법에 대한 전면적 반박이 필요하다. 즉, ‘태아는 사람인가?’에 대한 답변과 ‘태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어느 경우에나 그른 일인가?’라는 두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 필요한 것이다. 피터 싱어와 같이 “하나의 생명체가 인간이라는 점이 그렇게 대수로운 것인가??”고 말하며 전제 (1)을 공격하는 파격적인 주장을 할 수도 있겠으나, 무고한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그릇되다는 전제는 내게는 일종의 정언 명령처럼 느껴진다.

저자는 책의 제4 장과 제5 장에서 저 두 가지 의문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제4 장인 <인간의 출발점은 어디인가?>에서는 임신중절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탐색하며, 이어 제5 장인 <정당방위와 임신중절>에서는 일단 임신중절이 허용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그렇다면 임신중절은 어느 범위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를 검토하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제4 장과 제5 장의 논의를 정리하고, 저자가 도출한 결론들이 실제로 개인이 임신중절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의 판단 기준으로써 기능할 수 있을지의 여부를 살피는 데에 있다.


2.
제4 장의 논의는 인간의 출발점에 관한 것이다. 즉 정자와 난자로부터 시작되는 일련의 과정 중 어느 시점부터를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임신중절에 대한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간의 대립을 검토함으로써 의문에 대한 답을 탐색한다.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의 대립 중 핵심적인 쟁점은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형식 논리 중 (2)를 긍정할 것인지, 혹은 거부할 것인지의 여부에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태아가 무고한 인간이라는 전제 (2)를 부정함으로써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을 논박하고 임신중절의 도덕적인 정당성을 주장한다. 즉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태아는 인간이 아니며, 따라서 임신중절은 “윤리의 물음이 아니라 건강의 물음”(p.127)에 불과하다.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태아는 수정 순간부터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도덕적 지위’(moral standing)에 관한 물음이다. 즉 “누가 혹은 무엇이 도덕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가? 도덕적 권리를 갖기 위해 어떤 대상이 가져야 할 속성은 무엇인가? 도덕적 권리와 의무의 주체는 누구 혹은 무엇인가?”(p.127)

도덕적 지위를 엄밀히 정의하기는 쉽지 않으나 그 외연을 어렴풋이나마 그려내는 시도는 가능할 것이다. 학자들은 도덕적 지위를 지닌 존재는 죽임당하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 폭넓게 합의하며, 정상적인 성인이라면 누구나 도덕적인 지위를 가진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태아는 정상적인 성인이 아니기에 태아가 도덕적인 지위를 가진다는 결론이 주어진 전제에서 직접 도출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태아가 정상적인 성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생명권을 지니며, 따라서 임신중절이 허용될 수 없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보수주의자들이 이러한 반론에 대항하기 위하여 제시하는 주장이 바로 잠재성 논증(potentiality argument)이다. 잠재성 논증에 의하면 태아는 정상적인 성인이 될 잠재성을 지니며, 따라서 태아 역시 정상적인 성인과 동등한 도덕적 지위를 지닌다. 결국 이에 의하면 태아 역시 정상적인 성인과 동등한 생명권을 지니며 임신중절은 거부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잠재적인가? 저자의 지적대로 “태아는 잠재적인 인간일 뿐 아니라 잠재적인 실험대상이요, 심지어는 잠재적인 개의 밥”(p.132)일 수도 있다. 따라서 가능성이라는 의미에서의 광의의 잠재성 개념은 도덕적 논의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며, 잠재성의 개념을 보다 엄밀히 정의하여야 할 필요성이 발생한다. 이에 벅클(S. Buckle)은 협의의 잠재성 개념으로 ‘될 잠재성’(the potential to become)과 ‘산출할 잠재성’(the potential to produce)를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p.133) 전자는 잠재적 존재와 실제적 존재가 발달 단계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단일의 실제라는 개체 동일성을 바탕으로 한 잠재성 개념이며, 후자는 어떠한 결과를 산출하는 힘을 말한다. 따라서 산출할 잠재성 개념은 자아 동일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협의의 잠재성을 바탕으로 보수주의자들은 잠재성 논증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이 가하는 비판에 응답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왜 보수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실제적 존재와 동일한 도덕적 지위를 잠재적 존재에게 부여하여야 하는가를 의문시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는 이 둘의 구분을 인정한다.(p.130) 그렇다면, 실제적인 존재와 잠재적 존재가 명백히 구분됨에도 불구하고 왜 양자를 동일하게 취급하여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보수주의자들은 될 잠재성과 산출할 잠재성이라는 상이한 개념에서 출발하는 두 가지의 이유를 들어 실잠재적인 존재와 실제적인 존재의 양자를 도덕적으로 동일하게 취급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태아는 도덕적인 존재가 될 능력을 잠재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도덕적 존재는 아닐지라도 그와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즉 “도덕적 인격을 규정하는 최소한의 요구조건은 능력에 관한 것이지 그 실현에 관한 것이 아니다. 도덕적 인격이 될 잠재성이 곧 도덕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충분조건이라는 것이다.”(p.131) 이 견해가 딛고 있는 전제는 잠재적 존재와 그가 발전하여 이루어지는 실제적 존재가 자아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 견해는 잠재적 존재가 장래에 야기할 결과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 즉 이는 위에서 벅클이 규정한 협의의 잠재성 개념 중 첫 번째의 것인 될 잠재성 개념에 입각한 논리의 전개이며, 개체의 능력을 존중할 것을 요청한다. 두 번째 이유는 잠재적 존재가 야기할 결과에 주목한다. 즉 이는 두 번째의 산출할 잠재성을 전제로 하여 전개되는 이유이다. 현재의 능력은 미래의 현실태이고, 또 도덕적 행동이란 그 결과를 고려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현실태뿐만 아니라 미래의 현실태, 즉 잠재성도 고려해야 한다.(p.131) 이는 잠재적 존재가 장차 산출할 결과를 고려하는 견해이다. 벅클은 전자를 ‘개체의 능력 존중’(repect for capacities of individuals) 논증, 후자를 ‘결과론적’(concequentialist) 논증이라 명명한다.(p.134)

이 두 가지 논증 중 후자의 결과론적 논증은 잠재성 논증에 대한 자유주의자의 중요한 논박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유주의자들의 반론은 태아가 잠재적인 인간이기에 임신중절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정자와 난자 역시 성공적인 수정을 통하여 인간 존재를 만들어내기에 수정된 난세포와 동일한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데도 피임은 허용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의 반론은 일응 타당하다. 물론 잠재성 논증을 극단까지 밀고 나아가 피임 역시 허용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펼 수도 있다. 실제로 크리스트교는 인공적인 피임 역시 인정될 수 없다는 주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입장은 실제적으로 취하기 곤란하며, 일반적으로 피임은 인구 정책적 측면 등 여러 면에서 권장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보수주의자는 피임이 허용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임신중절이 정당화되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야 하며, 필연적으로 정자와 난자, 그리고 그 둘이 결합한 난세포와의 의미 있는 차이점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과론적 논증에 입각해서는 양자 간에 의미 있는 차이점을 찾아내기 힘들다. 결과론적 논증에 의하면 도덕적 가치는 현재의 잠재성이 아니라 미래의 현실태에 놓여 있다. 즉, 현재의 잠재성은 단지 가능한 미래 인간 존재의 도덕적 가치에 의해 도덕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p.134) 정자와 난자 역시 그 최종적인 결과는 현실태로서의 인간이며, 수정된 난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양자 간의 도덕적 지위에는 차이가 없으며, 잠재성 이론에 의하면 피임이 허용되고 임신중절은 불허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인과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전자의 개체의 능력 존중 논증에 입각할 수밖에 없다. 될 잠재성을 전제로 하는 이 논증은 태아와 인간 간에 자아 동일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정자와 난자는 인간존재를 낳는 데 도움이 되는 잠재성은 지니나, 인간존재가 될 잠재성은 지니지 않는다.”(p.135) 저자는 이러한 일련의 논증을 통하여 태아와 인간존재 사이에는 자아 동일성이 전제된다는 잠정적 결론에 이른다.(p.136) 이에 따르면 인간의 개별적 동일성은 수정으로부터 시작된다.

보수주의자가 도달한 수정시점으로부터 시작하는 개별적인 인간이라는 결론은 하지만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도전받는다. 키메라나 일란성 쌍둥이의 예로부터도 알 수 있듯이 하나의 수정란으로부터 하나의 인간이 반드시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개별성이 발생하는 시점은 세포영역의 분절이 끝나는 때라고 주장하는 분절 논증이 나타나며, 이에 의하면 착상이 끝나는 14일경에 개별적인 자아 동일성이 확립된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이 분절 논증에 동의하고 있으며, 따라서 착상이 끝나는 2주경을 인간의 시작점으로 보고 있다.

착상을 잠재적 인간 존재의 시작점으로 보는 저자의 견해에 의하면 태아가 무고하다는 가정 하에서는 실제적으로 임신중절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 된다. 저자는 임신의 확인 가능성을 착상을 시작점으로 보는 또 다른 이유로 언급하고 있다. “도덕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관련되는 한, 그 존재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확인되지 않는 존재에 대해 생명권을 부여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p.143) 즉 착상에 의해 임신이 확인 가능하며, 임신이 확인 가능하면 태아는 잠재적인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가진다. 그렇다면 임신 중절은 임신 이후에 비로소 문제가 되는 현상이기 때문에 임신 중절은 원천적으로 도덕적 정당화 가능성이 사라진다. 따라서 무고한 수정란이 발생한 경우 선택지는 두 가지 뿐이다. 착상 전에 수정 후 피임하거나, 혹은 출산하거나. 임신 후 임신중절의 선택지는 봉쇄된다.

저자는 배아실험의 허용가능성을 위하여도 착상을 인간 생명의 출발점으로 고려하여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배아를 이용한 실험을 윤리적으로 허용하기 위하여 인간의 시작점을 착상으로 본다는 것은 특수한 목적을 위하여 인간을 자의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배아실험의 윤리적 허용 여부는 오히려 어느 시점부터 태아를 인간으로 규정지을 것인가가 확정지어진 다음에 논의할 수 있는 문제이다. 따라서 인과관계의 전후는 바뀌어야 한다. 즉 착상을 기준으로 태아를 인간으로 볼 수 있다는 명제가 성립한다면 배아실험은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 배아실험은 잠재적 인간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혹은, 만일 수정시부터 인간 존재가 성립한다면 그 논리적 결과로서 배아실험은 허용될 수 없다. 그것은 잠재적 인간을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3.
몇몇 논거들의 부적절함에도 불구하고 착상시를 인간의 시작점으로 잡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착상 후의 태아를 인간 존재로 인정함에 따라 전면적인 임신중절은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전술한 바와가 같이 태아가 인간이라는 점에서 임신중절이 항상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만약 태아가 ‘무고’하지 않다면 아직 임신중절을 허용할 여지는 남아있다. 태아는 어떤 경우에 무고하지 않으며, 따라서 임신중절이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있을까? 저자는 제5 장에서 태아가 도덕적인 지위를 가진다고 전제한 후, 임신중절이 도덕적으로 허용 가능한 한계범위를 고찰한다. 다만 산모와 태아의 생명이라는 두 권리가 충돌하는 상황에 한정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정당방위에 의한 임신중절이 허용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를 막론하고 폭넓은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표준적인 정당방위상황에서는 몇 가지 특성이 발견된다. 1)방어자가 무고하다는 점, 2)공격자가 정당한 이유 없이 고의적으로 방어자를 죽이려 한다는 점, 3)공격자를 죽이지 않으면 방어자가 죽는다는 점이 그것이다.(p.151) 하지만 임신중절은 태아가 의도적으로 산모의 생명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당방위의 표준적인 형태에서는 벗어나 있다.

여기서 ‘무고성’(innocence) 개념을 확장함으로써 태아의 행위를 부당한 공격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무고성 조건은 도덕적인 행위 능력을 전제로 하여 인간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는 도덕적(moral) 의미의 무고성과 다만 ‘위협이 되지 않는’의 의미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적인(technical) 무고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기술적인 무고성은 도덕적인 행위능력을 전제하지 않고 행위의 결과에 초점을 맞춘다. 결과적으로 누군가에게 위협을 가하게 되면 기술적으로 무고하지 않다. 태아는 도덕적인 행위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무고성 개념을 전자의 것으로 파악하게 되면 정당방위로서의 임신중절은 정당화되지 못한다. 그러나 기술적 의미의 무고성 개념을 수용한다면 정당방위가 인정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저자는 정당방위에서의 무고성 개념으로 기술적 의미의 무고성을 수용한다. 생명권이 침해당한 인간은 그 침해행위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수 있는 것인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정당방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이다. “무고성은 어떤 최종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서 단지 하나의 고려사항이지, 그 자체가 최종판단인 것은 아니다.”(p.154) "도덕적 의미의 무고성 개념을 강조하면 정당방위의 권리는 그 외연이 너무 좁아 실질적인 내용이 없는 공허한 권리에 불과“(p.154)하게 되며, 따라서 ”무고성은 도덕적 의미가 아니라 기술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정당방위의 권리가 우리들의 생명에 위협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처리 내지 죽일 자격을 우리들에게 부여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합리적이다.“(p.154) 이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표준적인 정당방위의 경우에는 공격자와 희생자의 비대칭성이 인정될 수 있으나 무고한 위협자의 경우에는 비대칭성이 성립되지 않음에도 왜 후자의 경우 정당방위가 허용될 수 있는가? 즉 정당방위에 의한 임신중절은 어느 경우에 한하여 허용될 수 있는가?

저자는 이에 대하여 태아의 체외 생존 가능성(viability)을 기준으로 하는 두 가지 경우를 상정하여 논의를 진전시킨다. 우선 태아의 체외 생존 가능성이 없는 경우의 문제가 있다. 이 경우 역시 두 경우로 다시 세분할 수 있는데, 태아가 산모의 생명을 위협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경우와 단순한 방관자에 불과한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태아가 직접적 위협자이기 때문에 정당방위에 의해 임신중절이 설명 가능하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정당방위로는 임신중절의 정당성이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이 경우에는 산모와 태아의 비대칭성에 의해 임신중절이 설명될 수 있다. 즉 태아는 체외 생존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산모가 죽으면 어차피 태아도 죽으므로 둘 다 죽는 것보다는 태아 홀로 죽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체외 생존 가능성을 지닌 상태 역시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는데, 둘 다 살릴 수 있는 경우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는 극단적 페미니스트를 제외하고는 태아를 죽일 권리가 산모에게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문제는 후자의 경우인데, 태아가 위협자라면 정당방위가 성립한다. 그러나 태아가 방관자라면 역시 여기에서 정당방위는 성립할 수 없다. 다만 동일한 가치를 갖는 두 생명 간에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을 뿐이다.

저자는 이 딜레마적 상황에 봉착하여 일단 두 가지의 선택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이고, 나머지는 딜레마를 그대로 인정하는 길이다. 그러나 전자는 산모가 태아가 동등한 생명권을 지닌다고 가정할 경우 딜레마를 해결 불가능하다는 문제점에 빠진다.(p.164) 따라서 저자는 남은 한 가지의 선택지, 도덕적 딜레마를 그대로 남겨두는 입장을 취한다.(p.165) 즉, 어느 하나의 도덕적 요구사항이 다른 요구 사항을 압도하지 못하며, 따라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는 개인적인 서열화나 삶의 양식에 의하여 결정된다. “도덕적인 딜레마의 경우에도 도덕적인 행동이 둘이고 그 양자가 양립 불가능한 경우, 결정을 인도하는 것은 반드시 도덕적인 고려사항만인 것은 아니다. 다른 요소-그 행위자의 삶의 양식-도 들어올 수 있다.”(p.168) "도덕규칙이 할 수 있는 것은 해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표준적인 상황에서의 일반적인 안내지침을 제공할 따름“(p.169)이며, 도덕적 갈등이 대칭적일 경우 ”해결의 토대가 반드시 도덕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p.169) 왜냐 하면 “도덕규칙은 실천적으로 효율적”(p.169)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저자의 결론대로라면 산모가 임신중절을 선택하는 이유는 그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산모는 “나의 생명은 나에게 타인의 생명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님을 타인이 인정해 줄 것을 요구”(p.171)할 뿐이다.

저자는 산모와 산모의 생명권이 충돌하는 경우로 논의를 한정시킨다. 그에게 있어서는 도덕적 딜레마의 문제가 되는 영역, 즉 태아의 체외 생존이 가능하고 양측 중 한 쪽만 선택 가능한 경우가 결국 임신중절이 가능한 한계영역이 될 것이다. 어쨌든 저자는 산모의 생명이 문제될 경우에 한하여 임신중절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모자보건법 상으로도 산모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임신중절이 허용되고 있기 때문에 저자의 이러한 결론은 결국 임신중절에 대하여 대단히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 된다. 도덕적 딜레마 개념을 보다 확장시킨다고 하더라도, 윤리적으로는 자신의 쾌적한 삶을 타인의 생명보다 소중하다고 그 개인이 생각한다고 해서 타인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는 식의 논리를 전개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결론적으로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사회 경제적인 사유로 인한 임신중절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결국 저자의 논의 역시 현재 실제적으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임신중절의 정당화 여부에 대한 기준을 내게 제시해 주지는 못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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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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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가 <<단두대에 대한 성찰>>에서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듯이 사형제도는 그것이 관습적으로 존재해 왔기에 유지되는 것 뿐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듯이,사형제도가 제도로서 존속해야 할 합리적인 근거는 없다. 허약하기 짝이 없는 사형제도의 논리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그것이 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존속하는 이유는 그것을 지탱하는 것이 '극악무도한 짓을 한 놈은 죽어야 한다'는 명제, 요컨대 응보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네거티브한 감정의 강렬함이 사형제도를 '필요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착각시킨다.

   그런데 사형이 감정적인 것에 그 존재 근거를 갖는다는 점이 논의를 어렵게 한다. "나쁜 짓을 한 놈은 죽어야 한다"는 명제는 어떠한 로직(logic)의 결론으로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가 하나의 도덕적 공리(axiom)로서 논리의 출발점이며, 따라서 합리적으로 반박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다만 그것을 전제로서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존치론자가 말하는 가장 많은 문장이 "니 주변 사람이 그런 일 당했어도 그럴 거냐?"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점은 확실해진다. 따라서 사형제도를 찬성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최종적이고 유일한 방식은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다. 논박이 아니라 공감과 설득만이 해결책이다. "나쁜 짓을 했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명제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언어를 통하여서는 오로지 문학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은 머리보다 마음을 먼저 울리는 법이니까 말이다.

   나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공지영이 감정적인 설득 작업을 하였을 것으로 기대하고 이 책을 읽었다. 나는 사형제도가 제도로서의 효용성은 전혀 없다는 점을 확신하지만, 정말로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때는 가슴 한켠에서 분노가 치밀어오르기도 한다. 이 분노는 정당한 것이며, 따라서 이 분노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사형은 존속해야 하는가, 아니면 분노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제도가 정당할 수는 없는 것인가. 요컨대 나는 '나쁜 짓을 한 놈은 죽어야 한다'는 명제를 공리로서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결론을 얻는 데에 이 책이 도움을 주리라 믿었다. 정윤수는 강간살해범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사형을 언도받은 나쁜 놈이다. 문유정은 그를 만나고 그와 인간적으로 교감한다. 처음에 둘은 사형수와 봉사자로 만나지만, 나중에는 정윤수와 문유정으로 서로에게 다가간다. 모든 치장과 편견을 벗겨버리면, 즉, 정윤수가 극악무도한 강간살해범이라도, 결국 그도 하나의 불쌍한 인간일 뿐이다. 죽이는 것은 너무하지 않느냐, 문유정이 모니카 수녀에게 윤수의 사형집행이 결정되었다는 전화를 받는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런데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뒤 문유정의 손에 쥐어진 <블루 노트>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다. 블루 노트에 쓰인 정윤수의 자전적 고백은 그가 누명을 쓰고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된 것이었다는 결말을 알려준다. 결국 그는 실제로는 무죄의 인간이었던 셈이다. 그는 나쁜 놈이 아니며, 따라서 죽어야 하는 사람도 아니다. 공지영은 그러니까 끝까지 밀고 나아가지는 못한 셈이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은 죽어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명제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의 것이다. 블루 노트의 내용을 공개함으로써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응보로서의 사형의 정당성이라는 도덕적 명제에 대한 성찰을 회피해 버린 셈이 되었다. 그것이 빠졌을 때 남아 있는 것은 아픔을 지닌 두 사람의 인간적인 치유의 모습 뿐이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나. 가장 중요한 윤리적 성찰을 외면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그저 그런 통속소설에 불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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