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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료 윤리학
김상득 지음 / 철학과현실사 / 2000년 2월
평점 :
품절
1.
임신중절을 반대하는 가장 기초적인 논리는 이렇다.
(1)무고한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2)수태된 배아나 태아는 무고하며 살아 있는 인간이다.
(3)그러므로 배아나 태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그릇된 일이다.
나는 주변의 사람들과 임신중절의 정당화 가능성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 중에는 임신중절을 찬성하는 사람 역시 많았고, 그들은 수많은 찬성의 논거를 내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많은 논거에도 불구하고 나는 임신중절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내어놓는 저 형식 논리가 그릇되었음을 증명하지 못하는 이상 임신중절이 합리화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태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 같았고, 태아가 사람이라면 그를 다른 목적을 위하여 죽인다는 것은 아무래도 허용되어서는 곤란할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고 내가 임신중절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였던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임신중절에 대한 저 형식논리에 대한 반대 의견을 듣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대화하였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저 형식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온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임신중절에 대한 담론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삼단 논법에 대한 전면적 반박이 필요하다. 즉, ‘태아는 사람인가?’에 대한 답변과 ‘태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어느 경우에나 그른 일인가?’라는 두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 필요한 것이다. 피터 싱어와 같이 “하나의 생명체가 인간이라는 점이 그렇게 대수로운 것인가??”고 말하며 전제 (1)을 공격하는 파격적인 주장을 할 수도 있겠으나, 무고한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그릇되다는 전제는 내게는 일종의 정언 명령처럼 느껴진다.
저자는 책의 제4 장과 제5 장에서 저 두 가지 의문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제4 장인 <인간의 출발점은 어디인가?>에서는 임신중절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탐색하며, 이어 제5 장인 <정당방위와 임신중절>에서는 일단 임신중절이 허용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그렇다면 임신중절은 어느 범위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를 검토하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제4 장과 제5 장의 논의를 정리하고, 저자가 도출한 결론들이 실제로 개인이 임신중절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의 판단 기준으로써 기능할 수 있을지의 여부를 살피는 데에 있다.
2.
제4 장의 논의는 인간의 출발점에 관한 것이다. 즉 정자와 난자로부터 시작되는 일련의 과정 중 어느 시점부터를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임신중절에 대한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간의 대립을 검토함으로써 의문에 대한 답을 탐색한다.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의 대립 중 핵심적인 쟁점은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형식 논리 중 (2)를 긍정할 것인지, 혹은 거부할 것인지의 여부에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태아가 무고한 인간이라는 전제 (2)를 부정함으로써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을 논박하고 임신중절의 도덕적인 정당성을 주장한다. 즉 극단적인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태아는 인간이 아니며, 따라서 임신중절은 “윤리의 물음이 아니라 건강의 물음”(p.127)에 불과하다.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태아는 수정 순간부터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도덕적 지위’(moral standing)에 관한 물음이다. 즉 “누가 혹은 무엇이 도덕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가? 도덕적 권리를 갖기 위해 어떤 대상이 가져야 할 속성은 무엇인가? 도덕적 권리와 의무의 주체는 누구 혹은 무엇인가?”(p.127)
도덕적 지위를 엄밀히 정의하기는 쉽지 않으나 그 외연을 어렴풋이나마 그려내는 시도는 가능할 것이다. 학자들은 도덕적 지위를 지닌 존재는 죽임당하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 폭넓게 합의하며, 정상적인 성인이라면 누구나 도덕적인 지위를 가진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태아는 정상적인 성인이 아니기에 태아가 도덕적인 지위를 가진다는 결론이 주어진 전제에서 직접 도출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태아가 정상적인 성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생명권을 지니며, 따라서 임신중절이 허용될 수 없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보수주의자들이 이러한 반론에 대항하기 위하여 제시하는 주장이 바로 잠재성 논증(potentiality argument)이다. 잠재성 논증에 의하면 태아는 정상적인 성인이 될 잠재성을 지니며, 따라서 태아 역시 정상적인 성인과 동등한 도덕적 지위를 지닌다. 결국 이에 의하면 태아 역시 정상적인 성인과 동등한 생명권을 지니며 임신중절은 거부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잠재적인가? 저자의 지적대로 “태아는 잠재적인 인간일 뿐 아니라 잠재적인 실험대상이요, 심지어는 잠재적인 개의 밥”(p.132)일 수도 있다. 따라서 가능성이라는 의미에서의 광의의 잠재성 개념은 도덕적 논의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며, 잠재성의 개념을 보다 엄밀히 정의하여야 할 필요성이 발생한다. 이에 벅클(S. Buckle)은 협의의 잠재성 개념으로 ‘될 잠재성’(the potential to become)과 ‘산출할 잠재성’(the potential to produce)를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p.133) 전자는 잠재적 존재와 실제적 존재가 발달 단계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단일의 실제라는 개체 동일성을 바탕으로 한 잠재성 개념이며, 후자는 어떠한 결과를 산출하는 힘을 말한다. 따라서 산출할 잠재성 개념은 자아 동일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협의의 잠재성을 바탕으로 보수주의자들은 잠재성 논증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이 가하는 비판에 응답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왜 보수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실제적 존재와 동일한 도덕적 지위를 잠재적 존재에게 부여하여야 하는가를 의문시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는 이 둘의 구분을 인정한다.(p.130) 그렇다면, 실제적인 존재와 잠재적 존재가 명백히 구분됨에도 불구하고 왜 양자를 동일하게 취급하여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보수주의자들은 될 잠재성과 산출할 잠재성이라는 상이한 개념에서 출발하는 두 가지의 이유를 들어 실잠재적인 존재와 실제적인 존재의 양자를 도덕적으로 동일하게 취급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태아는 도덕적인 존재가 될 능력을 잠재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도덕적 존재는 아닐지라도 그와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즉 “도덕적 인격을 규정하는 최소한의 요구조건은 능력에 관한 것이지 그 실현에 관한 것이 아니다. 도덕적 인격이 될 잠재성이 곧 도덕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충분조건이라는 것이다.”(p.131) 이 견해가 딛고 있는 전제는 잠재적 존재와 그가 발전하여 이루어지는 실제적 존재가 자아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 견해는 잠재적 존재가 장래에 야기할 결과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다. 즉 이는 위에서 벅클이 규정한 협의의 잠재성 개념 중 첫 번째의 것인 될 잠재성 개념에 입각한 논리의 전개이며, 개체의 능력을 존중할 것을 요청한다. 두 번째 이유는 잠재적 존재가 야기할 결과에 주목한다. 즉 이는 두 번째의 산출할 잠재성을 전제로 하여 전개되는 이유이다. 현재의 능력은 미래의 현실태이고, 또 도덕적 행동이란 그 결과를 고려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현실태뿐만 아니라 미래의 현실태, 즉 잠재성도 고려해야 한다.(p.131) 이는 잠재적 존재가 장차 산출할 결과를 고려하는 견해이다. 벅클은 전자를 ‘개체의 능력 존중’(repect for capacities of individuals) 논증, 후자를 ‘결과론적’(concequentialist) 논증이라 명명한다.(p.134)
이 두 가지 논증 중 후자의 결과론적 논증은 잠재성 논증에 대한 자유주의자의 중요한 논박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유주의자들의 반론은 태아가 잠재적인 인간이기에 임신중절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정자와 난자 역시 성공적인 수정을 통하여 인간 존재를 만들어내기에 수정된 난세포와 동일한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데도 피임은 허용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의 반론은 일응 타당하다. 물론 잠재성 논증을 극단까지 밀고 나아가 피임 역시 허용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펼 수도 있다. 실제로 크리스트교는 인공적인 피임 역시 인정될 수 없다는 주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입장은 실제적으로 취하기 곤란하며, 일반적으로 피임은 인구 정책적 측면 등 여러 면에서 권장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보수주의자는 피임이 허용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임신중절이 정당화되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야 하며, 필연적으로 정자와 난자, 그리고 그 둘이 결합한 난세포와의 의미 있는 차이점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결과론적 논증에 입각해서는 양자 간에 의미 있는 차이점을 찾아내기 힘들다. 결과론적 논증에 의하면 도덕적 가치는 현재의 잠재성이 아니라 미래의 현실태에 놓여 있다. 즉, 현재의 잠재성은 단지 가능한 미래 인간 존재의 도덕적 가치에 의해 도덕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p.134) 정자와 난자 역시 그 최종적인 결과는 현실태로서의 인간이며, 수정된 난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양자 간의 도덕적 지위에는 차이가 없으며, 잠재성 이론에 의하면 피임이 허용되고 임신중절은 불허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인과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전자의 개체의 능력 존중 논증에 입각할 수밖에 없다. 될 잠재성을 전제로 하는 이 논증은 태아와 인간 간에 자아 동일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정자와 난자는 인간존재를 낳는 데 도움이 되는 잠재성은 지니나, 인간존재가 될 잠재성은 지니지 않는다.”(p.135) 저자는 이러한 일련의 논증을 통하여 태아와 인간존재 사이에는 자아 동일성이 전제된다는 잠정적 결론에 이른다.(p.136) 이에 따르면 인간의 개별적 동일성은 수정으로부터 시작된다.
보수주의자가 도달한 수정시점으로부터 시작하는 개별적인 인간이라는 결론은 하지만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도전받는다. 키메라나 일란성 쌍둥이의 예로부터도 알 수 있듯이 하나의 수정란으로부터 하나의 인간이 반드시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개별성이 발생하는 시점은 세포영역의 분절이 끝나는 때라고 주장하는 분절 논증이 나타나며, 이에 의하면 착상이 끝나는 14일경에 개별적인 자아 동일성이 확립된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이 분절 논증에 동의하고 있으며, 따라서 착상이 끝나는 2주경을 인간의 시작점으로 보고 있다.
착상을 잠재적 인간 존재의 시작점으로 보는 저자의 견해에 의하면 태아가 무고하다는 가정 하에서는 실제적으로 임신중절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 된다. 저자는 임신의 확인 가능성을 착상을 시작점으로 보는 또 다른 이유로 언급하고 있다. “도덕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관련되는 한, 그 존재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확인되지 않는 존재에 대해 생명권을 부여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p.143) 즉 착상에 의해 임신이 확인 가능하며, 임신이 확인 가능하면 태아는 잠재적인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가진다. 그렇다면 임신 중절은 임신 이후에 비로소 문제가 되는 현상이기 때문에 임신 중절은 원천적으로 도덕적 정당화 가능성이 사라진다. 따라서 무고한 수정란이 발생한 경우 선택지는 두 가지 뿐이다. 착상 전에 수정 후 피임하거나, 혹은 출산하거나. 임신 후 임신중절의 선택지는 봉쇄된다.
저자는 배아실험의 허용가능성을 위하여도 착상을 인간 생명의 출발점으로 고려하여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배아를 이용한 실험을 윤리적으로 허용하기 위하여 인간의 시작점을 착상으로 본다는 것은 특수한 목적을 위하여 인간을 자의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배아실험의 윤리적 허용 여부는 오히려 어느 시점부터 태아를 인간으로 규정지을 것인가가 확정지어진 다음에 논의할 수 있는 문제이다. 따라서 인과관계의 전후는 바뀌어야 한다. 즉 착상을 기준으로 태아를 인간으로 볼 수 있다는 명제가 성립한다면 배아실험은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 배아실험은 잠재적 인간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혹은, 만일 수정시부터 인간 존재가 성립한다면 그 논리적 결과로서 배아실험은 허용될 수 없다. 그것은 잠재적 인간을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3.
몇몇 논거들의 부적절함에도 불구하고 착상시를 인간의 시작점으로 잡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착상 후의 태아를 인간 존재로 인정함에 따라 전면적인 임신중절은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전술한 바와가 같이 태아가 인간이라는 점에서 임신중절이 항상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만약 태아가 ‘무고’하지 않다면 아직 임신중절을 허용할 여지는 남아있다. 태아는 어떤 경우에 무고하지 않으며, 따라서 임신중절이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있을까? 저자는 제5 장에서 태아가 도덕적인 지위를 가진다고 전제한 후, 임신중절이 도덕적으로 허용 가능한 한계범위를 고찰한다. 다만 산모와 태아의 생명이라는 두 권리가 충돌하는 상황에 한정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정당방위에 의한 임신중절이 허용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를 막론하고 폭넓은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표준적인 정당방위상황에서는 몇 가지 특성이 발견된다. 1)방어자가 무고하다는 점, 2)공격자가 정당한 이유 없이 고의적으로 방어자를 죽이려 한다는 점, 3)공격자를 죽이지 않으면 방어자가 죽는다는 점이 그것이다.(p.151) 하지만 임신중절은 태아가 의도적으로 산모의 생명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당방위의 표준적인 형태에서는 벗어나 있다.
여기서 ‘무고성’(innocence) 개념을 확장함으로써 태아의 행위를 부당한 공격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무고성 조건은 도덕적인 행위 능력을 전제로 하여 인간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는 도덕적(moral) 의미의 무고성과 다만 ‘위협이 되지 않는’의 의미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적인(technical) 무고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기술적인 무고성은 도덕적인 행위능력을 전제하지 않고 행위의 결과에 초점을 맞춘다. 결과적으로 누군가에게 위협을 가하게 되면 기술적으로 무고하지 않다. 태아는 도덕적인 행위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무고성 개념을 전자의 것으로 파악하게 되면 정당방위로서의 임신중절은 정당화되지 못한다. 그러나 기술적 의미의 무고성 개념을 수용한다면 정당방위가 인정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저자는 정당방위에서의 무고성 개념으로 기술적 의미의 무고성을 수용한다. 생명권이 침해당한 인간은 그 침해행위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수 있는 것인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정당방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이다. “무고성은 어떤 최종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서 단지 하나의 고려사항이지, 그 자체가 최종판단인 것은 아니다.”(p.154) "도덕적 의미의 무고성 개념을 강조하면 정당방위의 권리는 그 외연이 너무 좁아 실질적인 내용이 없는 공허한 권리에 불과“(p.154)하게 되며, 따라서 ”무고성은 도덕적 의미가 아니라 기술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정당방위의 권리가 우리들의 생명에 위협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처리 내지 죽일 자격을 우리들에게 부여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합리적이다.“(p.154) 이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표준적인 정당방위의 경우에는 공격자와 희생자의 비대칭성이 인정될 수 있으나 무고한 위협자의 경우에는 비대칭성이 성립되지 않음에도 왜 후자의 경우 정당방위가 허용될 수 있는가? 즉 정당방위에 의한 임신중절은 어느 경우에 한하여 허용될 수 있는가?
저자는 이에 대하여 태아의 체외 생존 가능성(viability)을 기준으로 하는 두 가지 경우를 상정하여 논의를 진전시킨다. 우선 태아의 체외 생존 가능성이 없는 경우의 문제가 있다. 이 경우 역시 두 경우로 다시 세분할 수 있는데, 태아가 산모의 생명을 위협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경우와 단순한 방관자에 불과한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태아가 직접적 위협자이기 때문에 정당방위에 의해 임신중절이 설명 가능하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정당방위로는 임신중절의 정당성이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이 경우에는 산모와 태아의 비대칭성에 의해 임신중절이 설명될 수 있다. 즉 태아는 체외 생존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산모가 죽으면 어차피 태아도 죽으므로 둘 다 죽는 것보다는 태아 홀로 죽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체외 생존 가능성을 지닌 상태 역시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는데, 둘 다 살릴 수 있는 경우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는 극단적 페미니스트를 제외하고는 태아를 죽일 권리가 산모에게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문제는 후자의 경우인데, 태아가 위협자라면 정당방위가 성립한다. 그러나 태아가 방관자라면 역시 여기에서 정당방위는 성립할 수 없다. 다만 동일한 가치를 갖는 두 생명 간에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을 뿐이다.
저자는 이 딜레마적 상황에 봉착하여 일단 두 가지의 선택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이고, 나머지는 딜레마를 그대로 인정하는 길이다. 그러나 전자는 산모가 태아가 동등한 생명권을 지닌다고 가정할 경우 딜레마를 해결 불가능하다는 문제점에 빠진다.(p.164) 따라서 저자는 남은 한 가지의 선택지, 도덕적 딜레마를 그대로 남겨두는 입장을 취한다.(p.165) 즉, 어느 하나의 도덕적 요구사항이 다른 요구 사항을 압도하지 못하며, 따라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는 개인적인 서열화나 삶의 양식에 의하여 결정된다. “도덕적인 딜레마의 경우에도 도덕적인 행동이 둘이고 그 양자가 양립 불가능한 경우, 결정을 인도하는 것은 반드시 도덕적인 고려사항만인 것은 아니다. 다른 요소-그 행위자의 삶의 양식-도 들어올 수 있다.”(p.168) "도덕규칙이 할 수 있는 것은 해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표준적인 상황에서의 일반적인 안내지침을 제공할 따름“(p.169)이며, 도덕적 갈등이 대칭적일 경우 ”해결의 토대가 반드시 도덕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p.169) 왜냐 하면 “도덕규칙은 실천적으로 효율적”(p.169)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저자의 결론대로라면 산모가 임신중절을 선택하는 이유는 그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산모는 “나의 생명은 나에게 타인의 생명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님을 타인이 인정해 줄 것을 요구”(p.171)할 뿐이다.
저자는 산모와 산모의 생명권이 충돌하는 경우로 논의를 한정시킨다. 그에게 있어서는 도덕적 딜레마의 문제가 되는 영역, 즉 태아의 체외 생존이 가능하고 양측 중 한 쪽만 선택 가능한 경우가 결국 임신중절이 가능한 한계영역이 될 것이다. 어쨌든 저자는 산모의 생명이 문제될 경우에 한하여 임신중절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모자보건법 상으로도 산모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임신중절이 허용되고 있기 때문에 저자의 이러한 결론은 결국 임신중절에 대하여 대단히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 된다. 도덕적 딜레마 개념을 보다 확장시킨다고 하더라도, 윤리적으로는 자신의 쾌적한 삶을 타인의 생명보다 소중하다고 그 개인이 생각한다고 해서 타인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는 식의 논리를 전개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결론적으로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사회 경제적인 사유로 인한 임신중절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결국 저자의 논의 역시 현재 실제적으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임신중절의 정당화 여부에 대한 기준을 내게 제시해 주지는 못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