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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카뮈가 <<단두대에 대한 성찰>>에서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듯이 사형제도는 그것이 관습적으로 존재해 왔기에 유지되는 것 뿐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듯이,사형제도가 제도로서 존속해야 할 합리적인 근거는 없다. 허약하기 짝이 없는 사형제도의 논리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그것이 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존속하는 이유는 그것을 지탱하는 것이 '극악무도한 짓을 한 놈은 죽어야 한다'는 명제, 요컨대 응보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네거티브한 감정의 강렬함이 사형제도를 '필요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착각시킨다.
그런데 사형이 감정적인 것에 그 존재 근거를 갖는다는 점이 논의를 어렵게 한다. "나쁜 짓을 한 놈은 죽어야 한다"는 명제는 어떠한 로직(logic)의 결론으로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가 하나의 도덕적 공리(axiom)로서 논리의 출발점이며, 따라서 합리적으로 반박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다만 그것을 전제로서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존치론자가 말하는 가장 많은 문장이 "니 주변 사람이 그런 일 당했어도 그럴 거냐?"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점은 확실해진다. 따라서 사형제도를 찬성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최종적이고 유일한 방식은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다. 논박이 아니라 공감과 설득만이 해결책이다. "나쁜 짓을 했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명제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언어를 통하여서는 오로지 문학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은 머리보다 마음을 먼저 울리는 법이니까 말이다.
나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공지영이 감정적인 설득 작업을 하였을 것으로 기대하고 이 책을 읽었다. 나는 사형제도가 제도로서의 효용성은 전혀 없다는 점을 확신하지만, 정말로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때는 가슴 한켠에서 분노가 치밀어오르기도 한다. 이 분노는 정당한 것이며, 따라서 이 분노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사형은 존속해야 하는가, 아니면 분노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제도가 정당할 수는 없는 것인가. 요컨대 나는 '나쁜 짓을 한 놈은 죽어야 한다'는 명제를 공리로서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결론을 얻는 데에 이 책이 도움을 주리라 믿었다. 정윤수는 강간살해범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사형을 언도받은 나쁜 놈이다. 문유정은 그를 만나고 그와 인간적으로 교감한다. 처음에 둘은 사형수와 봉사자로 만나지만, 나중에는 정윤수와 문유정으로 서로에게 다가간다. 모든 치장과 편견을 벗겨버리면, 즉, 정윤수가 극악무도한 강간살해범이라도, 결국 그도 하나의 불쌍한 인간일 뿐이다. 죽이는 것은 너무하지 않느냐, 문유정이 모니카 수녀에게 윤수의 사형집행이 결정되었다는 전화를 받는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런데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뒤 문유정의 손에 쥐어진 <블루 노트>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다. 블루 노트에 쓰인 정윤수의 자전적 고백은 그가 누명을 쓰고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된 것이었다는 결말을 알려준다. 결국 그는 실제로는 무죄의 인간이었던 셈이다. 그는 나쁜 놈이 아니며, 따라서 죽어야 하는 사람도 아니다. 공지영은 그러니까 끝까지 밀고 나아가지는 못한 셈이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은 죽어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명제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의 것이다. 블루 노트의 내용을 공개함으로써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응보로서의 사형의 정당성이라는 도덕적 명제에 대한 성찰을 회피해 버린 셈이 되었다. 그것이 빠졌을 때 남아 있는 것은 아픔을 지닌 두 사람의 인간적인 치유의 모습 뿐이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나. 가장 중요한 윤리적 성찰을 외면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그저 그런 통속소설에 불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