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지 않은 날에도 괜찮은 척한 너에게 - 민감하고 섬세한 10대를 위한 자기 이해 수업
미사키 주리 지음, 이미정 옮김 / 길벗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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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HSP라고 말하는 저자는 '매우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HSP가 어떨 때 힘들어하는지, 대체 HSP는 무엇을 뜻하는지, 어떻게 하면 평온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민감하고 섬세한 십 대 자녀를 둔 부모라면, 혹은 그런 청소년이라면 이 다정한 이야기를 통해 그게 이상한 게 아니라는 안도, 그럼에도 괜찮다는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거다.


앞부분에 HSP 체크리스트가 있다. 중학교 2학년 딸에게 해보라고 했다. 26개의 질문 중, "예"라고 답한 질문이 14개 이상인 사람은 아마도 HSP 일 거라고 저자는 말했다. 아이는 딱 14개의 질문에 '예'라고 답했다.


저자는 아이와 함께 이 책을 읽는(을) 부모에게 부탁한다.

"아이가 HSP라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부모님 자신을 책망하거나 근심에 빠지기 마시길 바랍니다. 부모의 부정적인 감정은 아이에게도 자연스럽게 전해지거든요.(p37)"

아이의 결과를 보면 가장 먼저 든 생각이, "그럼 아이를 편안하게, 예민하지 않은 상황을 만들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아이가 그래서 친구들과의 관계를 힘들어하면 어쩌지?" 같은 걱정이었던 나는 저자의 부탁을 읽고 오히려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지도 모르다는 생각도 했다.


책은 'HSP'가 뭔지 알려주고, 그런 '나'를 알아가게 해주고, 민감하고 섬세한 나를 잘 활용하는 방법과, 그런 아이들의 고민을 상담해 주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노란색 컬러가 들어간 본문과 이미지를 활용해 이해하기 쉽게 표현해 주어서 아이들도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다. (글자도 크다. )

"괜찮아, 너만 그런 게 아니야.(p139)"

이 문장은 아이에게 꼭, 기억하면 좋겠다고 말해줬다.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을지 모르지만, 네 옆에 앉은 친구도, 뒤에 앉은 친구도 그럴 수 있다고. 이상한 게 아니라고.



아이의 책상에 올려져 있는 책 사진을 찍는데, 책상 위에는 요즘 빠져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사진, 굿즈, 같은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정신없이 쌓여 있는 물건들 사이에 놓여 있는 이 책이 지금 아이의 심리를 말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뭔가 어수선한 건 싫은데, 치우는 것도 싫은, 뭔가 늘어놓고 싶어 하면서도 그래서 안정되지 않는 것 같은 아이 마음을. 평소 같으면 "책상 정리 좀 하지?" 하고 말했을 텐데,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의 아이를 인정하는 연습은 매일매일 해야 하는 일 같은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섬세한 아이라서 그래.'라고 조금 편하게 생각하게 됐달까.

저는 'HSP'아이라면 기질상 '꾸준히 노력하고자'하는 아이일 거라고 했다. 그래서 선생님이 자신의 성적이나, 상황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할 때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고. 그럴 땐 '좋아하는 것이 마음껏 몰두하는 시간'을 갖길 추천했다. '충격의 원인과 잠시 거리를 두는 것도 예민한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생존 수단(p151)'이라고.

이 부분도 아이에게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메모해두었다. 아이가 앞으로 향후 5년간 중고등학교 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부딪치게 될 상황일 테니까. 그럴 때 채근하거나 더 열심히 하라고 조언하는 대신, 아이가 좋아하는 걸 할 수 있게 도와주자고.


"기분이 안정되지 않는 감각은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마음이 불편하다고 느끼는 까닭에 마음이 편안한 장소, 사람, 시간 등을 통해 감동하는 감각이 생기지. 이게 바로 풍부한 감수성이야. 네가 갖고 태어난 '너다움'이자 매우 멋진 능력이지. p171"

아이가 예민한 것처럼 느껴질 때 앞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풍부한 감수성을 가진 아이라고. 그게 아이의 멋진 능력이라고." 아이 역시 그걸 기억했으면 좋겠다.

사춘기를 겪고 있는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을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선생님, 부모님들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내가 좀 유별난가, 하며 고민한 적 있니?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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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들 - 마음의 고통과 읽기의 날들
수잰 스캔런 지음, 정지인 옮김 / 엘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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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대회]


살면서 한 번쯤은 누구나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그게 사람이든, 종교든, 음악이든, 영화든, 책이든... 자신을 구원하는 대상은 모두 다르겠지만, 누구에게나 기댈 곳은 있다고. 내겐 그게 책이었고, 책이고, 책일 것이다. 수잰 스캔런 역시 책이 자신을 구원했다고 썼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다르게 얘기해 보면, 단순히 물리적인 '책'이라고만 말하는 건 맞지 않을지 모른다. 버지니아 울프가, 조엔 디디온이, 실비아 플라스가,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있어야 하니까.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세계로 진입할 수 있었으니까.

한동안 내가 책을 통해 얻은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할 수 없어 답답했다. 책이 뭐냐고, 책으로 뭐가 되느냐고 물을 때, 반할 만큼 멋지게 말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수잰 스캔런의 입을 빌려 비로소 나는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책은 '구원'한다. 실의에 빠진 나를, 두려움이 빠진 나를, 억울해서 미칠 것 같은 나를, 답답함을 풀고 싶은 나를, 불공평을 까발리고 싶은 나를.


『의미들』은 수잰 스캘런 자신의 병력에 대한 회고이자, 그로부터 벗어나 '자살하지 않기로 결심' 하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 살아가는 삶에 대한 고백이다. 그러나 많은 여성의 회고이고, 고백이기도 하다. 그녀는 어릴 때 죽은 엄마와 정신 병원에서의 생활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작가가 된 것이라 생각했다. 책 속에는 두 이야기가 얽혀있으며 각각의 사건, 각각의 이야기로 들리기도 하지만 결국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 하나의 이야기는 바로 수잰 스캘런 자신이다.


어떤 책을 읽다가 울어본 적 있거나, 자신의 이야기 같아 흠뻑 빠져들어본 경험이 있다면 짐작하겠지만, 나는 책과 사람은 연이 있다고 믿는다. 같은 이야기를 오늘 읽을 때와 다음 날 읽을 때 느낌이 다른 건 오늘의 나와 다음 날의 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 경험의 의미를 작가는 '수용의 순간'이라고 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이 작가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그 책이 그런 책이 되는 것'(p96)을 작가가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그런 책이 있다. 스무 살에 읽은 양귀자의 <<모순>>(쓰다, 2023.4.)과 마흔다섯 살의 읽은 <<모순>>은 마치 다른 책인 것처럼 다가왔다. 이십 대의 나는 그 책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마흔이 넘은 나는 충분히 그것을 허락하고 받아들였다.

만약, 자신의 인생 책이 한 권쯤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수용성을 한 번쯤은 경험해 보지 않았을까. 그 순간의 짜릿함을 잊지 못하지 않을까.



우리가 병리라 부르는 것 중에는 그 무엇도 고립된 채 존재하는 건 없으며, 우리는 맥락 속에, 그 순간이라는 맥락과 서로의 존재라는 맥락 속에 존재한다는 것, 우리는 부서지기 쉬우며 유동적이라는 것은 꼭 말하고 싶다. 우리는 존재하는 방법을 배워간다.

- <나의 정신이상과 그 밖의 것들> 중에서, p52

병원에서 보내 몇 년의 시간이 자신을 설명할 수 없음을 작가는 알고 있었다. 책 속에 담긴 모든 기록은 그래서 처절하다. 자신에게 당도한 불행과 불안과 안쓰러운 시선과 '미친' 사람이라는 시선까지 받아내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에 '의미'를 찾아보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그녀는 점차적으로 자신의 원하는, 선택한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 간다. 언어를 통해서.


"독서와 글쓰기는 내가 살고 싶어 한다는 걸 스스로 인정할 수 있게 되기 훨씬 전부터 나에게 살아갈 길을 만들어 주었던 활동이다."

어쩌면 우리도 그럴지 모른다. 자신이 인지하기 이전부터 책으로부터 구원받고 있었는지도. 아니면 그 무엇으로라도 살아갈 방향을 찾았을지도.

극적인 순간이 닥치지 않으면 잘 모르니까. 바닥까지 내려갔다는 느낌이 아니라면 그럭저럭 모른 척하며 살기도 하니까.


아주 오랜만에,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며 읽은 책이다. 그건 이 책이 나와 수용의 순간이 만들어졌단 의미일 것이다.

나는 천천히 빠져들었고, 느리게 읽었으나 강렬한 느낌을 받으며 책을 덮었다. 아직 이 책을 펼치지 않은 누군가를 부러워하면서.

김지승의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마티, 2025.)를 읽을 때 샬럿 퍼킨스 길먼의 <누런 벽지>를 꼭 읽어야지 생각했는데, 수잰 스캘런의 글 속에도 어려번 <누런 벽지>가 언급된다.

그녀는 자신이 경험에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 길먼의 책을 다시 읽었다고 했다. "이런 작가들은 나에게 돌아갈 길, 의미를 밝혀낼 길, 시간을 멈추고 병원에 머물던 그 여자를 이해할 길을 내주었다. 그 젊은 여자는 거기서 뭘 하고 있었을까? 절대적 운명 같았던 것이 사실은 다른 무언가였을 수도 있었다. 내가 그걸 알아낼 수 있다면. 이 책 역시 그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다.(p205)"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읽고 쓰는 이유에 대해. 그러다 그녀의 문장들에 기대 '독서'가 나를 구원하고 있다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그 뒤에 이어지는 쓰기는 구원받은 자의 즐거움이라고.





나는 필사적으로, 동시에 전율을 느끼며 책을 읽었다. 책 읽기는 삶의 한 방식이, 혹은 사는 법을 찾으려는 탐색이 되었다. 젊은 여자가 책들의 영향, 독서의 영향을 받아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 형태를 만들어가는 일은 쉽게 경시되지만, 그럼에도. 책 읽기는 내가 가진 것이었고 내겐 그것뿐이었다.
- P55

책들을 읽는 일은 책에 안기는 일이었다. 그 처음 이후 나는 이 소설들을 여러 번 다시 읽었다. 각각의 독서가 저마다 중요하다. 수전 손택의 표현대로, 읽을 가치가 있는 건 무엇이든 다시 읽을 가치가 있다. 혹은 이탈로 칼비노의 말. 읽기와 디시 읽기 사이에는 아무 차이도 없다.
- P57

여러 해 동안 나에게는 나의 책 읽는 삶과 정신 질환의 삶이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둘은 나란히 함께 자랐다. 전자는 나를 문학의 삶으로 이끌었고, 문학의 삶이란 읽기와 쓰기의 삶이었다. 후자는 나를 막다를 골목으로, 나를 보호해 주지 않을 침묵으로 이끌었다. 나의 영원한 굶주림. 물론 나는 여러 크고 작은 방식으로 분명히 회복했으며, 나를 지탱해 준 것, 나에게 또 하나의 삶을 준 것은 읽기와 쓰기였다.
- P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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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서 멋져 - 다양성, 차이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태도 키우기 하이파이브 사회정서 학습 동화 5
지니 킴.한진아 지음, 해랑혜란 그림 / 길벗스쿨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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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서 멋져』는 '다양성'을 주제로 한다.


태어나고 자란 곳, 생김새, 살아가는 모습,

생각하고 느끼는 것, 잘하고 못하는 일 등이

제각기 다른 것을 '다양성'이라고 해.

- <다양성이란 무엇일까?>

다양성에 대해 알려주고, 이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지 들려준다.

가족들이 모습이 다르고,

좋아하는 게 다르고,

잘 하는 게 다르고,

장애가 있거나 없을 수도 있고,

성격도 다르고...

그러나 그 다른 사람들이 모여 결국 '함께' 살아가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도 배우지만, 아이를 보면서도 배운다.

어쩌면 책 속에서 말하는 모든 것들을 이미 아이는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른인 내가 더 배워야지.

아이들과 어른이 함께 읽기를 추천하는 그림책이다.

유치원 아이들부터 초등학생들까지 폭넓게 읽을 수 있고, 같이 이야기 나누기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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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길리 생추어리
장윤미 지음 / 아미가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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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미 장편소설 『숨길리 생추어리』는 인간과 동물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세상에서 받은 고통과,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던 내면의 상실을 함께 극복해 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버려진 동물을 돌보는 건 인간이 아니라 어쩌면 인간과 동물이 함께 하기 때문에 치유가 가능함을 따뜻하게 그린다.

돼지 축사에서 일하며 매일을 별 의미 없이 보내던 이십 대 청년 인진. 태국의 가족들을 위해 한국에 와서 힘든 노동과 멸시를 견뎌내는 외국인 노동자 꿍과 두리안. 엄마의 죽음 이후 아빠와 고향을 떠나 스스로의 삶을 살고자 애쓰는 해유. 그들을 한곳으로 불러들인 건 해유의 아버지 동찬이 만든 숨길리 생추어리다.

아버지를 미워했고, 아버지를 떠났으나 아버지의 죽음 이후 생추어리에 도착한 해유는 자신이 몰랐던, 모른 척하고 싶었던 아빠 동찬을 마주한다.

소설은 초반부 높은 값을 받기 위해 돼지들에게 가하는 폭력과, 돼지를 도축하는 장면들을 과감 없이 표현하며 독자들에게 낯설어서 살벌하게 느껴지는 장면들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구제역과, 살처분 같은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기후 환경을 급격히 무너뜨리는 패스트패션 문제를 드러내고, 외국인 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폭로하며 묵직한 주제를 던진다.

그러나, 소설은 무겁게만 흐르지 않는다. 작가는 등장인물을 연민과 연대, 우정과, 애정을 품은 인물들로 그려내면서 독자로 하여금 뜨뜻한 마음을 품게 한다.

그들 덕분에 소설을 읽는 일이 힘들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토닥이고 감싸안아주고 싶었다. 숨길리 생추어리가 존재한다면, 그곳은 누군가에게는 분명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줄 것 같았다.



해유는 도대체 아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물었다.

"사라지는 거."

아빠의 대답에 해유는 어이가 없었다.

"세상에."

아바는 말을 이어 갔다.

"사라지는 건 엄마가 마지막이야. 이걸 지키려면 품은리로 가야 해." - P132

"아저씨가 그랬어. 우리의 밤은 누군가에게는 낮이라고."

인진은 해유를 지그시 내려다보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가 밤까지 누리면 누군가의 낮을 뺏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 P244

"사라지지 않는 게 어딨어요."
"없지. 하지만 타인의 힘으로 사라지는 건 안 되지."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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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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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문학을 읽을 때면 떠난다는 것, 남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다른 곳으로 이주한 적 없는 나는, 낯선 땅으로 이주해 삶을 꾸려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텍스트로 듣고(읽고), 상상하고, 해석한다.

 

그 사이 대체로 많은 이야기들이 내 마음대로 오역되고, 받아들여지고, 이해된다.

 

때론 디아스포라 문학(소설)이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작은 틈새로 각기 다른 이미지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폴 윤 작가의 <<벌집과 꿀>>은 그동안 읽었던 디아스포라 소설과 또 다른 틈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건 적확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었다. 소설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주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선명하게 혹은 흐릿하게 그려지는 이미지를 천천히 쫓으며 소설 한 편 한 편을 읽게 했다.

 

 

작품집에 수록된 일곱 편의 소설은 다양한 공간, 다양한 시간, 다양한 시대적 배경을 아우른다.

 

잘 모르는 장소, 낯선 지명, 낯선 분위기에 헤맬 것 같다가도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문장과 그 문장이 그려내는 이미지들 사이를 유영하며 천천히 소설에 빠져들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짧게 혹은 길게, 자의로 혹은 타의로, 어딘가로 떠난다, 자꾸.

'떠남''남고자' 하는 마음과 비슷한 게 아닌가,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서, 나의 부모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내가 정착해야 할 곳이 어딘지 명확하지 않아서, 그리워서, 슬퍼서, 외로워서...

 

그들이 떠나는 이유는 너무 많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데에도 비슷한 이유가 필요할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불현듯 알게 된 게 있다면, 어떤 소설은 책을 덮은 뒤 스토리나 인물이 아니라 잔상이 남을 수도 있구나 하는 거였다.

물안개가 가득 낀 강가에 서 있는 것처럼 뿌연데 그게 답답하거나 축축하게 느껴지지 않고, 물안개가 걷히면 무언가 보이겠지, 희망을 갖게 했다. 편안하고 다정하게 떠났다 다시 돌아오는 이들을 환대하고 싶어졌다.

 

 

위에 언급했던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주민'일 지도 모른다고 쓴 건,

탈북 후 영국에 자리 잡은 부모를 둔 한인 2세 부부 이야기를 다룬 <크로머>, 사할린 점에 끌려온 할아버지를 둔 조선인 3, 십 대 소년의 이야기가 담긴 <고려인> 소설을 읽고 난 뒤였다. 나고 자란 곳에서 낯섦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쫓으면서 정착할 집이 없고, 머물고 있더라도 이방인 듯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태어난 곳에서 살고 있어도 집 없는 사람처럼 외롭고 내쳐지는 기분이 드는 순간, 떠나고 싶은 순간, 돌아갈 곳이 있을ᄁᆞ 되짚어 보는 어느 순간, 같이 있어도 외롭고, 슬픈 관계들 속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며 사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러 돌아오실 건지 궁금했어요. 하지만 돌아오실 생각이라면, 그러시지 않아도 돼요."

"내가 필요 없다는 거구나, 그렇지?" 아버지가 말한다.

"그래요." 막심이 말한다. "전 괜찮아요. 저 혼자서도 괜찮아요."

- <고려인> 중에서, p236

 

 

출소 후 다시 삶을 살기 위해 낯선 동네에 자리 잡으려는 청년이 등장하는 <보선>, 낯선 고려인 이주지에 임관한 장교 이야기를 담은 <벌집과 꿀>, 탈북한 뒤 스페인에서 청소 일을 하는 여자가 등장하는 <코마로프> 세 편의 소설은 특히 마음에 남았다.

 

소설이 왜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지, 우리가 읽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세상은 어떠한지...... 작가의 이야기를 따라 가며 마음껏 읽고, 듣고, 상상하시길.

 

 

# 그가 아는 한 그는 혼자였다. 이상한 동시에 전혀 이상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는 그들의 얼굴을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마주치던 상사와 다른 운전사들의 얼굴을. 그다음엔 카드 게임을 하던 바의 주방 직원들과 빨래방 할머니의 얼굴도 잊어버렸다.- <보선> 중에서, p15

 

# 저는 그에게서 늘 보아온 익숙한 분노의 폭발을 예상했지만, 놀랍게도 그의 얼굴은 온화하고 진지하면서도 상처받은 사람의 얼굴로 변해 있더군요. 그는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부탁이니 우리를 그냥 놔둬줘요. 우리는 아무도 원치 않고 관심도 없는 땅에서 ㅅ살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당신이 와서 이 땅을 다시 차지하려 들기 전까지는 모든 게 괜찮았다고요."- <벌집과 꿀> 중에서, p198

 

# 아버지, 저는 지금 당신이 어디 계신지 상상해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제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도요. 왜 누군가는 저주받은 장소를 떠나지 않으려 하는지도요. 아이는 이제 멀리 있습니다. 온통 햇빛으로 둘러싸인 채, 아주 조금만 보일 뿐입니다. 숨겨진 자신의 왕국으로부터 돌아오던 벌은 이제 더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벌집과 꿀> 중에서,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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