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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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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답게 2004-04-10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지금도 세상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인데....
 

이념과 문학ꡕ 레이몬드윌리엄즈 著, 이일환 譯, 문학과 지성사


Ⅰ. 기본개념들

Ⅰ-1. 문화

지금은 하나의 개념처럼 붙여 다니는 사회․경제․문화라는 개념에 비교적 최근에 생긴 역사적 서술어이다. <사회>라는 말은 지금은 질서의 일반 체제를 기술하는 말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능동적 친교, 교우 등의 <공통행위>를 뜻했다. <경제>라는 말은 지금은 생산․분배․교환의 인지된 체제를 기술하지만 과거에는 가계경영과 공동체의 경영을 뜻했다. <문화>라는 개념은 곡물과 동물들의 성장과 돌봄, 나아가 인간 능력의 성장과 돌봄을 뜻했다. 근대적 발전에 있어 이 세 가지 개념들은 나란히 움직인 것이 아니라 각각은 중요한 시점에서 다른 것들의 움직임에 영향을 입었다.

문화라는 개념은 역사적 발전이란 넓은 문맥에서 바라다보았을 때 다른 모든 개념들의 한정된 용어들에 대하여 강력한 압력을 발휘한다. 18세기까지 그것은 곡물․동물․마음 등을 기르는 과정을 뜻하는 명사였다. 문화라는 개념을 알기 위해서는 문명이라는 개념을 알아야만 한다. 인간을 사회 조직 내로 끌어들인다는 <문명화>의 개념은 그 어원에 질서 있는, 교육받은, 또는 공손한 뜻을 포함하고 있다.

문명과 문화는 다같이 성취된 상태와 발전의 성취된 상태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 문화 좀 더 특별히 한정지어 예술과 문학은 인간정신의 가장 깊은 기록, 가장 깊은 충동, 가장 깊은 원천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문화는 보다 이전의 형이상학적 형태들의 세속화이자 자유화였고, 행위작용과 과정은 뚜렷이 인간적이었고 주관적인 것으로 일반화되었다.

문명은 한편으로 개화되고 점진적인 발전을 또 한편으로는 위협받는 성취된 상태를 나타내는 또 점점 회상적으로 되어 실제로는 흔히 과거의 전수된 영광과 동일시되는 그런 애매한 용어로 되어 버렸다.

특정하고 개별적인 삶의 방식들을 형성하는 근본적인 사회적 과정의 관념은 문화의 비교적인 사회적 의미의 실질적인 원천이 되었다. 이제 문화라는 개념은 지적인 삶과 예술에서의 행위 작용들로 특수화된 내적인 과정을 뜻하는 명사가 되었다. 문명의 현세적 의미와 인간발전의 해석이라는 문화의 비교적 현세적 의미를 구별해야 한다. 각각은 인간적 사회질서를 이해하고 세우려는 인간능력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근대적 관념이다. 이는 추정상의 종교적 혹은 형이상학적 상태들로부터 유래된 보다 이전의 사회적 개념들이나 사회질서로부터 그 두 관념들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자신의 역사를 만드는 인간>의 이 현세적 과정에서 진정한 동기의 힘을 파악해야 한다. <자신의 역사를 만드는 인간>의 원관념은 자신의 삶의 수단을 생산함으로써 <자신을 만드는 인간>에 이처럼 강조를 둠으로써 전혀 새로운 내용을 띠게 되었다. 이것은 모든 근대 사회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지적 진보였다. 그것은 사회와 자연 사이의 분열을 극복하고 사회와 경제 사이의 새로운 구성관계를 발견할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특정하고 상이한 삶의 방식을 만들어 내는 구성적인 사회 과정으로서의 문화 개념의 가능성이 오랫동안 실현되지 못했고 실질적으로 흔히 추상적인 단선적인 만인 공통주의에 의해 대치되었다. 그와 동시에 지적인 삶과 예술을 정의해 주는 또 다른 문화의 개념의 중요성도 명백히 상층 구조적인 위치로 환원됨으로써 손상을 입었고 그 개념을 관념화시키는 바로 그 과정을 통해 사회와 역사와의 필수 불가결한 관계를 끊어놓고 심리학․예술․신앙의 분야에서 인간적 삶의 구성과정 그 자체라는 또 다른 강력한 의미를 발전시킨 사람들에게 내맡겨졌다.


Ⅰ-2. 언어

언어에 대한 사고의 발전에 있어 마르크스주의가 기여한 것은 첫째 행위로서의 언어에 대해 강조한 것이고 둘째 언어의 역사에 대해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정적인 사고방식에 의지하는 습관적인 언어 개념들을 변형시켰다. 행위로서의 언어에 대한 강조는 18세기에 시작되었다. 이것은 문화를 자신의 사회를 만드는 인간이라는 관념으로 정의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전의 지배적인 전통에서는 그 모든 변형들을 통해 언어와 현실이 결정적으로 분리되었고, 따라서 철학적 탐구는 처음부터 이 명백한 분리된 질서들에 대한 탐구였다. 플라톤은 언어를 명명하는 것에 대한 올바름에 대한 연구했다. 이것은 플라톤의 언어 또는 현실에 대한 탐구는 항상 근본적으로 이데아적인 형이상학적인 본형들에 대한 탐구였다. 언어는 논리로서 연구될 수 있고, 형식적이고 외적인 형태라는 의미에서 문법으로 연구될 수 있다. 언어는 도구로, 수사학으로, 시학으로 연구될 수 있다. 오랫동안 학구적이고 현학적인 발전을 통해 삼학(논리학, 문법, 수사학)의 커다란 분야들이 중세부터 연구되어왔다.

언어와 현시 사이의 구분에 문제가 의식 속으로 끼여들고 그것을 강화시킨 것은 데카르트였다. 데카르트는 언어와 현실사이의 관련 기준이 형이상학적이거나 인습적이 아니라 과학적인 지식에 근거를 두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면서 기존의 해답들에 대한 그의 회의를 통해서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그동안 인간은 어떤 명백한 의미로서도 물리적인 세계를 만든 것은 아니므로, 과학적 지식의 강력한 새로운 개념은 선험적으로 배제되었고 이전에 그랬듯이 신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우리가 만들었기 때문에 사회를 이해할 수 있다고,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만드는 과정 그 자체를 통해 이해하여만 한다고, 그리고 언어의 행위가 이 과정에서 중심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비코였다. 그러면서 비코는 언어 발전단계를 세단계로 나누었다. 헤르더는 확고하게도 언어는 뚜렷이 인간적인 세계의 열음이요 세계에의 열음이며, 유별나거나 도구적인 능력이 아니라 구성적인 능력인 것이다.

이후 소쉬르는 언어의 사회적 성격은 안정되고 자율적이며 규범적으로 동일한 형태들로 만들어진 하나의 체계(langue)로 표현되며, 그 발화(parole)들은 어떤 정신적 물체적 메커니즘을 통해 가능해진 특별한 언어 규칙의 개별적 사용으로 여겨졌다.

ꡔ독일 이데올로기ꡕ에서 마르크스는 ‘언어는 의식과 마찬가지로 단지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의 필요성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실제적이고 구성적인 행동으로서의 언어에 대해 강조했다. 언어는 영속적인 유의 창조와 재창조로-역동적인 현존물로 그리고 지속적인 재생과정으로서-이해되어야만 한다.

블로시노프는 밀폐된 개인적 의식이나 내적 정신으로 특수화됨으로써 약화되고 사실상 거부되었던 행위로서의 그리고 실천적 의식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강조를 완전히 회복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의미란 사회적 관계에 의존하는 필연적으로 사회적인 행동이라고 단언하였다. 블로시노프는 언어에서의 기호가 이원적 성격을 띤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언어기호가 그것이 지시하거나 표현하는 대상이나 성질과 동등한 것도 아니고 또 그것들의 단순한 반영도 아니라는 것이다. 형식적 요소와 이 요소가 지니는 의미와 기호내에서의 관계는 불가피하게 인습적이만 그 관계는 자의적이 아니며 고정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기호들은 능동적인 사회적 관계가 가정될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사용 가능한 기호는 어떤 지속적인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는 실제적 개인들 사이의 지속적인 언어 행위의 산물이다. 여기서 우리는 능동적인 사회언어를 깨닫게 된다. 또한 이 언어는 <물질적 현실>의 단순한 <반영>도 아니고 <표현>도 아니다. 우리는 이 현실을 실천적 의식으로서, 생산 행위를 포함한 모든 사회적 행위에 스며들고 있고 또 그것이 스면든 언어를 통해 파악하는 것이다. 언어는 능동적이고 변화하는 경험의 명료화이며,세계 내의 역동적이고 명료화 된 사회적 현존물인 것이다.

기호화(의미화)는 형식적 기호들의 사용을 통한 의미의 사회적 창조이며, 실제적인 물질적인 행위이며, 생산수단이다. 그것은 모든 사회적인 물질적인 행위로부터 분리 불가능한 실천적 의식의 특정한 형태이다. 기호는 그 기호화 관계(형식적 요소와 의미 사이의 관계 뿐 아니라 실제 언어에서 현실적으로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그것을 기호로 만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라는 성질에 의해 존재하므로 그 형성 원칙인 사회 경험과 마찬가지로 변증법적이고 생성적인 특질을 지닌다. 기호는 사회적이며 기호로서의 성질 바로 그것에 의해 내면화가 가능할 뿐 아니라 명백히 전달행위에서 사회적으로 물질적으로 끊임없이 유용가능하다. 블로시노프의 이론을 따르면 모든 사회적 과정이 실제의 인간들 사이의 행위이듯이 개인성이란 언어의 완전한 사회적 사실에 의해 개인적 삶의 구현 수단인 사회적 능력을 독특한 물체적 존재내에 능동적으로 구성한 것이다. 바로 이 의미에서 의식은 사회적 존재인 것이다. 그것은 능동적이고 특징적인 사회적 발전과 관계들을 통해 기호체계인 엄밀한 사회적 능력을 소유한다.

촘스키 언어학은 예전의 객관주의적 체계들이 배제했었던 개인의 시도적이고 창조적인 실제의 가능성과 사실을 강조해 주는 체계의 개념에 대한 결정적인 진보가 있어 왔다.


Ⅰ-3. 문학

문학을 하나의 개념으로 보기는 상대적으로 어렵다. 개념으로서의 문학이 지니는 특수한 성질은 다른 개념들의 추상성과 일반성, 그리고 그 개념들이 내리고자 한 행위들의 추상성과 일반성에 대한 많은 특정한 명작들의 구체적인 업적에 중요한 업적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문학이란 언어의 사회적이고 형식적인 성질들 안에서 형식적 구성 과정이고 결과라는 필수적인 인식을 해야한다.

근대적 형태로서의 <문학>의 개념은 18세기쯤 되서야 생겨났다. 문학과 연관되는 통상적인 형용사인 리터리트(literate)는 17세기에 등장해서 18세기에 와서야 그 특수화된 근대적 의미를 얻게 되었다. 새로운 범주로서의 문학은 이전에 수사학과 문법으로 범주화되었던 분야가 특수화된 것으로서 읽음에로 그리고 인쇄의 발전이라는 물질적 상황에서 활자 특히 책으로 특수화된 것이었다. 문학은 생산보다 효용과 상태의 범주였다. 그것은 그때까지 하나의 행위 혹은 실천으로 여겨졌던 것의 특정한 특수화였고 사회계급이라는 견지에서 어쩔 수 없이 행해진 그 상황에서의 특수화였다. <읽고 쓰는 능력>이라는 낡은 의미를 넘어선 그 첫 번째 확대된 의미에 있어 그것은 <품위있는>,<고상한> 학식으로 정의되었고 따라서 한 특정한 사회적 구분을 명시해 주었다. 18세기까지 문학은 교육적 성취의 어떤 수준을 표현하는 일반화된 사회적 개념이었다. 이에는 <활자화 된 책들>로서의 문학이라는 잠재적인 그리고 결국엔 현실화된 또 다른 정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문학은 문학의 질을 정의하는 기준이 <학식>에서 <감식안> 또는 <감수성>으로 바뀌었고, 문학이 점점 창조적인 또는 상상적인 작품들로 특수화된 것이고, <민족 문학>에 대한 보다 효력 있는 정의를 가능케 한 <전통>이란 개념의 민족적 용어들을 발전시키는 경향으로 바뀌었다.

<예술>은 일반적인 인간의 기술이라는 의미로부터 <상상력>과 <감수성>에 의해 정의되는 특별한 영역으로 바뀌었다. 같은 시대에 <심미적>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지각의 의미로부터 <예술적>이고 <아름다운>이라는 특수화된 범주로 바뀌었다. <픽션>과 <신화>는 지배적인 계급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환상들> 또는 <거짓말들>로 여겨질 수도 있었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았을 땐 <상상적 진실>의 운반자로 공경받았다. <로맨스>와 <로맨틱>은 새로이 특수화된 적극적 중요성을 부여받았다. <문학>은 이 모든 것들과 함께 움직였다.


Ⅰ-4.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의 개념 ‘①특정한 계급 또는 집단에 특정한 믿음의 체계 ②진정한 또는 과학적인 지식에 대비될 수 있는 허위 사상이나 허위 의식의 체계 ③의미와 사상을 산출하는 일반적 과정’이다.

과학의 관념을 이데올로기의 개념에 부정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데올로기가 인간 발전의 실제적 과정에 대한 세세하고 연관된 지식이란 의미로서의 실제적이고 실증적인 과학과 대비된다면 이 구별은 그러한 세세하고 연관된 지식을 방해하거나 왜곡시키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가정들, 개념들, 관점들의 징후를 가질 수 있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20세기 개념들에서의 세 가지 다른 경향들이 있다. 첫째는 마르크스주의내에서 그리고 바깥에서 특정한 계급 또는 집단에 특정적인 믿음의 체계라는 비교적 중성적인 의미로 쓰여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중성적으로 또는 심지어 긍정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가느애진다. 둘째는 이데올로기는 실제적 경험, 실제적 정치학 그리고 실용주의라고 알려진 것과는 대비되는 것이다. 순이론적이고 교의적일 뿐 아니라 선험적이고 추상적이라는 이 일반적인 이데올로기의 의미는 그와 똑같이 일반적인 서술적 의미와 공존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치들의 기호화를 포함한 모든 기호화의 산물들뿐 안라 과정들을 기술할 일반적인 용어가 명백히 필요한데,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이라는 말이 널리 쓰여지는 것이다.


Ⅱ. 문화이론

Ⅱ-1. 기저와 상층구조


Ⅱ-2. 결정


Ⅱ-3. 생산력


Ⅱ-4. 반영에서 매개에 이르기까지


Ⅱ-5. 전형화와 상동관계


Ⅱ-6. 헤게모니


Ⅱ-7. 전통 제도, 그리고 형성물


Ⅱ-8. 지배적인 것, 잔여적인 것, 그리고 부상적인 것


Ⅱ-9. 정서와 구조들


Ⅱ-10. 문화 사회학


Ⅲ. 문화이론

Ⅲ-1. 글의 다양성


Ⅲ-2. 미적상황과 그 밖의 상황들


Ⅲ-3. 매개체에서 사회적 행위에까지


Ⅲ-4. 기호와 기호법


Ⅲ-5. 인습적 규칙들


Ⅲ-6. 쟝르


Ⅲ-7. 형식들


Ⅲ-8. 저자들


Ⅲ-9. 제휴와 참여


Ⅲ-10. 창조적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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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고사에 불합격 소식을 확인한지 보름정도 지났다.
실미도, 라스트 사무라이, 러브 액추얼리 등 볼만한 영화는 다 봤다.
그래도 남아도는 시간을 어찌할 수 없어 '빙우'를 봤다.

이성재, 김하늘, 송승헌이 출연하는 영화이다. 감독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아시아크에서 우성(송승헌 역)과 중현(이성재 역)은 만난다. '아시아크에서는 헤어진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서 이 영화는 시작한다. 우성은 첫사랑인 경민(김하늘 역)을 만나기 위해서 중현은 마지막 사랑인 경민을 만나기 위해서 이 곳에 왔다.
조난을 당한 두 사람은 잠들지 않기 위해 자신의 사랑얘기를 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다. 중현 때문에 자신의 사랑이 경민에게 외면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우성,경민이 죽을 때 중현이 옆에 있었음을 알게 된 우성, 지금은 사고로 다리가 부러진 중현과 함께 있는 우성. 그런 우성의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배우 송승헌의 연기력은 부족했다.

'사랑니'로 나타나는 경민에 대한 중현의 사랑. 가진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성격으로 나오는 중현은 왜 경민가 헤어졌을까? 유부남이기 때문일까?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일까? 중현과 경민이 하나의 자일에 묶여 있을 때,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면 난 둘이 함께 죽는 방법을 선택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내가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민에 대한 우성의 사랑에는 가슴떨림과 설레임만 있었고, 경민과 중현의 사랑에는 처절함과 절절함이 없었다.

아시아크에서의 장면과 회상하는 장면의 잦은 교차는 감정의 몰입을 방해했다.

그런데 아시아크에 가면 정말 헤어진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우성은 죽어가는 중현에게 경민의 시계를 채워주면서 첫사랑을 보냈다. 중현은 경민을 만나기 위해서 죽어서 만나기 위해서 아시아크로 왔다.

뱀발 : 대학 4학년일 때 나도 사랑니를 뽑아서 남자친구에게 보여주었다. 지금은 친구인 그가 어제 하는 말이 "그때 널 보면서 나와는 많이 다르구나. 이상하다라라는 생각을 했어"라고 말했다. 지금은 그 사랑니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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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03년 4월 20일 일요일 19:30~21:30
장소 : 대학로 강강술래 소극장

처음으로 대학로 소극장에서 연극을 보았다.
지금까지 본 연극은 크리스마스 때 교회에서 본 것, 대학 연극동아리의 정기공연 2번, 중학교 1학년 때 안동문화회관에서 공연한 '품바', 극단 한강이 안동대 문화회관에서 정신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룬 '반쪽 날개로 날아온 새'가 전부이다.
돈을 주고 연극공연을 본 것은 '품바'이후 처음이다.

등장인물은 강호동(56세), 주은혜(강호동의 처), 강미선(26세, 강호동의 딸), 김대문, 김대문의 처, 김종태(김대문의 아들) 6명이다.
막이 열리면서 강호동과 그의 정부는 비밀의 장소에서 퇴폐스러운 음악에 맞추어 관능적인 춤을 추고 있다. 강호동은 정부의 손에 이끌려 나무토막처럼 움직이고 있다. 강호동과 그의 정부는 불륜에 대해서 어떠한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이들에게 가정은 의무적인 돌아가야하고 정부에게 싫증이 났을 때 돌아갈 수 있는 곳일 뿐이다. 2막은 주은혜와 김대문이 여관에 있는 것으로 시작한다. 두 사람은 불륜에 대해서 겉으로는 두려워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즐기고 있다. 3막은 강미선과 김종태가 동거하는 아파트에서 다투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결혼을 하자는 미선과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종태의 싸움이다. 이후 이들은 각각의 가정으로 돌아간다.
연출자는 위선과 거짓의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2쌍의 기성세대와 결혼을 하려는 1쌍의 젊은 세대 보여주면서 우리 시대의 결혼과 위선, 그리고 화해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싶어하지만 구성이 엉성하다.
6명이 모두 한 곳에 모이는 장면에서 긴장감을 갖기는 하지만, 긴장을 해결하는 방식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각자의 외도를 알고 분노하지만, 마지막 미선의 대화에 감명받아 종태는 미선과 결혼할 것을 약속하고, 호동과 은혜, 대문과 그의 처는 화해를 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기성세대는 배우자와 소통하지 못해 불륜을 저지르지만 불륜의 상대자와도 섹스이외의 소통은 없다. 연출자는 결국 진정한 애정과 이해는 배우자에게서 찾아라는 엉뚱한 구호만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극의 중간에 등장한 전도사는 과장된 행동으로 관객을 웃게 만들지만 극의 흐름을 깨고 있다. 여배우들의 속옷차림은 관객의 눈요기를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벗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미선을 연기한 배우는 상황에 따른 표정의 변화는 없고 목소리의 톤만 바뀔 뿐이었다.
이 연극은 시나리오의 구성이 엉성하고 배우의 연기에도 감동이 없었다.

연극은 훌륭하지 않았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배우의 숨결을 느끼면서 극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연극 본 후, '천년동안에도'에서 라이브 재즈연주를 들은 것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공연표 발매부터 늦은 시간 배웅해 준 조성일씨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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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선'은 김기덕의 작품 중에서는 대중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작품에 속한다. 

이 작품에서 남자 주인공은 강한철 상병(장동건 분)이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김상병이다. 김상병의 변화가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br>
강상병은 간첩을 잡기 위해서 남들이 휴식을 즐길 시간에도 혼자서 훈련을 하고, 야간근무를 설 때마다 얼굴에 위장크림을 바르고, 철모를 쓰지 않고 특수부대의 모자를 쓴다. 마을 청년 명길과 미영은 밤에 해안에서 데이트를 즐긴다. 강상병은 이들이 간첩인 줄 알고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져 명길을 죽게 만든다. 강상병은 포상휴가를 가고, 미영은 미치게 된다. 휴가에서 돌아온 강상병은 총으로 동료를 위협하는 등 군생활을 계속해서 할 수 없어 의가사 제대를 한다. <br>
강상병은 자신이 제대했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다시 부대로 돌아온다. 미영 역시 미친 상태로 명길이 죽은 해안 초소를 떠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의 경계였던 철조망을 미영과 강상병은 아주 가볍게 뛰어넘는다. 이들에게는 죽음 따위는 이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영화기 이렇게 진행되는 동안 김상병은 가장 인간적인 도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모두들 미친 강상병을 무시할 때도 안타까운 표정을 하고 어쩔 수 없이 그를 철조망 밖으로 밀어낸다. 미영이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를 아이를 임신했을 때도 스스로 자백을 했다. 미영의 위험한 낙태수술도 반대를 하며 혼자서 아파했던, 그래도 양심이 있는 인간으로 묘사된다. <br>
하지만 이런 김상병마저도 강상병보다 더 미쳤다. 그래서 자신이 동료에게 총질을 한다는 인식도 없이 총을 난사한다. 강상병이 총을 쏘았다는 생각을 하면서...<br>
결국 해안초소 군인들은 서로가 서로를 쏘는 상황이 되었다. 모두들 미친 것이다. 모두들 얼굴에 위장크림을 바르는 것이다. <br>
이 영화에서 위장크림은 광기의 상징이다. 처음에는 강상병 혼자서 위장크림을 바르다가 나중에는 강상병을 제외한 나머지 병사들 모두가 위장크림을 바른다. <br>
감독은 광기가 전이되는 과정을 나타냈다. 양심적이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미칠 수 밖에 없는 휴전상황, 마을과는 철조망으로만 구분되는 후방에서 간첩에 대한 강박관념은 평범한 사람들조차 미치게 만드는 것이다. <br>
강상병은 동료에게 총을 쏘면서 강상병에게 총을 쏘고 있다고 믿고, 자신이 총을 쏘았으면서도 강상병이 쏘았다고 생각한다. 주위 사람들도 모두 강상병이 쏘았다고 믿는다. 이 부분이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간첩이 나타나는 상황은 심각한 전쟁상황이 아니다. 또한 강상병이 간첩을 잡겠다는 것은 조국과 민족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포상금 받고 일계급 특진하고 싶어서이다. 우리 안에 있는 출세욕을 간첩으로 상징한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물들어가면서 더 심하게 미쳐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감독은 그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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