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몇 일 전부터 목단이 피기 시작하더니 오늘 아침에 보니 흐드러지게 피었다.
내가 처음 목단을 만난 것은 어렸을 적 할머니가 치는 민화투판에서였다. 우리 할머니는 모란이라고 하지않고 목단이라고 했다. 그래서 모란꽃보다는 목단이라는 말에 더 친근감이 간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선덕여왕이 당나라에서 보낸 모란꽃 그림을 보고 그 꽃은 향기가 없다는 것을 말하니 사신이 놀랐다는 얘기에서였다. 좀 더 자라서는 김영랑의 시에서였다. 김영랑의 시에 나오는 모란은 아주 작고, 연하면서도 투명한 빛깔을 가져 연민을 불러 일으킬 꽃일 것이라고 상상했다. 김영랑의 시에 나오는 모란이 목단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이었다.
실제로 목단을 본 것은 몇 년 전, 마당에 목단을 심으면서였다. 목단은 내 상상과 달리 아주 크고, 진한 색깔을 그것도 짙은 자주색을 가진 꽃이었다. 김영랑의 시에 나오는 모란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 때는 모란에게 속은 것 같았다.
몇 일 동안 아침마다 잠시동안 꽃을 봤다. 지금이야 서양꽃들이 많지만, 과거 서양꽃이 들어오지 않았을 때, 목단은 참 요염한 꽃이었을 것이다. 마치 풍성한 몸매를 가진 여인네같은 꽃은 새로운 느낌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왔으리라.
오늘 아침에 본 흐드러지게 핀 목단꽃은 원숙한 여인네가 저고리 앞 섶을 풀어헤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