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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평점 :
-20250823 벵하민 라바투트.
소설을 읽다 말고 구석에 단 한 권 기념품으로 남겨 두었던 수능 기출 문제집을 꺼냈다. 쉬운 네 문제를 주섬주섬 풀어보았다. 친구에게 아직 1년도 되지 않은 동안 너무도 신기할 만큼 공부하던 시절의 모든 것들이 증발되었다고 했었다. 정말 그런건지 어디까지 남아 있는지 조금 궁금했다. 워낙 여러 번 반복한 기출들이라 그런지 어떻게 푸는지에 대한 아이디어는 조금씩 헤매다가도 제대로 된 방향을 향했다. 다만 넓이 공식, 사인 코사인 법칙 같은 쌩기초 암기 요소들을 잊어버렸어… ㅋㅋㅋㅋ 막히면 아 이 공식 써야 되는데 그 공식이 뭐였지? 하고 찾아보고, 탄젠트 값까지는 구했는데 맞나? 맞네... 그 다음엔 뭘 구하지? 아 코사인 값을 바로 알 수 있구나… 뭐 이런 식으로 푸니까 어찌어찌 네 문제 다 풀긴 했는데 시간이 저엉말 오래 걸렸다.
잘 하지 못하게 된 수학에 미련이 아직 남았는데, 그냥 이렇게 푸는 방법, 생각하는 방법 천천히 헤매면서 찾아가면 그것도 수학 아니냐… 입시에 필요한 괴물 같은 속도의 계산력, 정확도, 그런 것만 욕심 내지 않으면 스도쿠 풀듯 슬슬 어느 정도 쉬운 것들은 그렇게 할 수 있지 않겠냐… 물론 내 수험생활은 엔제를 풀 정도까지 진화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나처럼 슬슬 하면 문제 풀이 잘 하기까지 너무 많은 세월이 필요하겠지만 뭐 재미있으면 됐지. 이 속도로는 평생 해도 잘 하게 되진 못하겠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들어본 이름이 나와도 그게 참말인지, 진위를 따져 보지 않기로 했다. 이건 수학사, 과학사 책이 아니라 수학, 과학자가 소재인 소설이다, 생각하면 뭐 재미있으면 됐지. 이번 소설책은 조니(=연치, 야노시) 폰 노이만을 겪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한 것처럼, 1인칭 화자를 무수히 바꿔가며 전개된다. 절반쯤 읽었을 때까지는 폰 노이만이 ‘나는-‘하는 부분은 아직 안 나왔고 아무래도 안 나올 것 같긴 하다. 다 읽어보니 정말 그랬네…
폰 노이만에서 체스 영재 출신 딥마인드 설립자 허사비스로 인공지능에 대한 영감이 이어지고, 상상과 글로만 어렴풋하던 존재가 대량 자본 투자와 기술의 발전으로 실존하게 되었다. 노이만과 친구들의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이세돌과 딥마인드의 대국을 다룬 후반부는 더 재미있었다. 10년 전에 알파고 어쩌고 난리일 때도 나는 정말 무심해서 관련된 기사나 이세돌이 나와 화제가 된 예능 같은 것도 제대로 본 게 없었다. 그래서 이세돌이 한 번인가 이기고 나머지는 알파고가 다 이겼대 정도만 알았다. 바둑을 1도 모르는 나한테 이 정도로 재미있게 읽혔으면, 벵하민 형 잘 쓴 거 아니냐… 바둑 조금 궁금하지만 난 고등 수학도 못 하는 비논리적 존재인 걸….하면서 아니, 바둑 궁금하게 만든 소설, 인공지능 넌 이런 거 쓸 수 있겠냐? 나중에 챗지피티놈한테 물어보기야 하겠지만 여태까지 걔가 써서 보여준 창작물 비슷한 건 다 오글거리고 영 뻔해서 마음에 드는게 없었다. 어쩌면 내가 프롬프트를 정교하게 잘 짜주면 나를 만족시킬 이야기가 나올지도...무서워서 안 해야겠다.
https://m.blog.naver.com/natf/222865224108
2022년에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를 읽으면서 난 이 소설에 나온 수학, 과학자들이 끄적여둔 수식 같은 거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거야, 고등학교 수학에도 찔찔대는 걸….했었고 그때의 예감은 자기충족적 예언이었을까, 명징한 자기객관화였을까, 나는 대학의 수학, 과학 교육을 받을 자격을 얻는데 실패했다. 그렇지만 또다시 내가 읽고 싶은 책들 읽으며 이렇게 쌉소리하고 빈둥대는 자유를 되찾았다. 아이참 수학 대신 보고 싶은 책 아무거나 보는 거 너무 소중해… 어차피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건 어마무시한 천재들한테도 불가한 일이고, 이해에 근접하는 방식은 굳이 이성과 논리로 무장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끄적여 놓은 거 읽고, 물론 내 마음대로 받아들이고, 생각하다가 그만두고, 아무말이나 지껄이고 써보고, 각자의 세상을 구성하는 게 아니겠냐...그 세계가 나한테는 수학이나 과학이나 인공지능이나 바둑이 아닐 뿐이다. 천재들도 정신병이나 육체적 질환으로 고통 받다 죽는 건 똑같은데 뭐 좀 더 행복하게 살다 가면 내가 이기는 거 아니냐!!! 그 방면으로는 내가 이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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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 수단으로 결과를 도출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성에 차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건 다리 하나로 춤추는 것과 같다. 본질은 모든 방향에서 관계와 의미와 결합을 인식하는 데 있다.” 에렌페스트에게 진정한 이해란 정신이나 이성만이 아니라 전 존재가 개입하는 총체적인 경험이었다. 무신론자였으며 질문자이자 회의론자였던 그는 진실의 잣대가 어찌나 깐깐한지 때로는 동료들 사이에서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다.
-어쩌면 자연은 정말 혼돈 상태일지도, 명백히 이질적인 것들을 한꺼번에 아우를 법칙이나 계속해서 증가하는 복잡성을 간단히 정리할 개념 따위는 정말 없는지도 몰랐다. 자연을 하나의 총체로 인식할 수 없다? 우리 문명은 이 공포스러운 가능성을 여태껏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넬리는 우리가 그 가능성을 인정할 날은 오지 않으리라고 믿는 쪽이었다. 그것은 과학과 철학 그리고 이성에 치명타였으니까. 반면에 예술가들은 이미 그 가능성을 온몸으로 포용했다고 넬리는 말했다. 비이성의 재발견은 그동안 온갖 전위적 움직임을 이끌어온 원동력이었다. 범인의 눈으로 보더라도 그 움직임들을 뒤덮고 있는 것은 파우스트적인 무한한 에너지와 조급함, 그리고 모든 게 허용된 비극적인 타락이었다. 현대의 예술은 어떠한 법칙도, 방법도, 진실도 인정하지 않고서 그저 맹목적이고 억누를 수 없는 충동만을, 무엇 앞에서도 멈추지 않고 우리를 지구 끝으로 몰고 가는 격렬한 광기만을 인정했다.
-베를린에서 그는 나치 갈색 셔츠 단원들이 노동조합, 노동은행, 협동조합을 급습하는 것을 목격했다. 정의심에 고취된 학생들이 폭도로 변해 성性과학연구소를 공격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고, 국립 오페라하우스 앞 책 이만여 권이 불타고 남은 잿더미를 지나쳤다. 그날 불길에 얼굴이 달아올랐던 의기양양한 청년들은 독일대학생연합회 회원들이었다. 그들은 ‘비非 독일’ 정신을 담은 서적, 학술지, 잡지를 색출하러 모교 도서관에 쳐들어갔고, 거대한 모닥불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맹세했다. 나치당의 고위 당원들은 중언부언 중얼거렸고, 괴벨스는 수천 관중을 향해 퇴폐와 도덕적 타락 척결! 가정과 국가의 품위와 도덕 재건!을 외쳤다. 파울은 거리의 군인들을 보았다. 군인들은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제히 울려퍼지는 군가에 맞춰 행진했다.
-모든 발상은 그가 떠올린 것이 아니라 그에게 찾아온 힘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알던 어떤 힘보다도 강력한 그 힘은 느닷없이 찾아왔던 것처럼 순식간에 그를 떠났다. 광기를 소진해버린 그는 서재에 흩어진 종이들을 정리하고도 차마 며칠 동안 손대지 못했다. 그에게 찾아온 영감은 가짜였음이 끔찍할 만큼 명백해서, 무수히 많은 오류를 확인하려고 굳이 책상 앞에 앉을 필요조차 없었다. 그의 야망은 현실에 발붙일 수 없게 거창했고, 그의 방정식들은 어떤 실험으로도 만회할 수 없을 만큼 오류투성이에 불완전했다.
-유대인 혐오, 우생학이라는 사이비 과학, 모든 ‘다름’을 향한 살기 어린 증오에 버무려진 나치의 영향력이 이제 곧 독일 밖으로 퍼져나가 이웃 국가에까지 도달할 거라고. 이를 부추기는 것은 필히 어둡고 무의식적인 충동인데, 그 힘이 이끄는 미래에 우리 종의 자리는 완전히 괴물 같은 존재로 대체되어 머지않아 사라질 운명이라고. 파울은 달아날 곳도 숨을 곳도 없다고 했다.
-헝가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곡창지대였기에 전시 기근으로 밀 가격이 치솟으면서 부자는 더욱더 부유해졌다. 그래서 우리는 다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 굴었다. 끔찍해 보이리란 것을 안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인류에 관한 단순한 진실을 아주 일찍이 깨쳤다. 문 앞에서 악마가 문을 두드리는 와중에도 우리 인간은 춤출 수 있다는 것. 내가, 그리고 우리 대다수가 그랬다. 그런데 그게 진짜 우리 탓이려나?
-새로운 발견이 나올 때마다 수학이 모두가 동의할 만한 기초 위에 서 있는 게 아니었음이 점점 더 명백해졌다. 수학의 왕국 전체가 알고 보면 공허 위에 세워진 것 아니냐는 끈질긴 의혹은 이내 ‘수학 기초의 위기’로 명명되었다. 이는 그리스시대 이래 수학이라는 학문에 가해진 가장 근원적인 문제 제기였다. 이 위기는 지상에서 가장 특출나고 명석한 자들이 연루된 기괴한 사건이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아서왕의 모험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이성이 한계 너머로 이탈해 텅 빈 성배를 드는 것으로 끝나는 이야기.
-모든 게 일급 기밀이었으나 생각해보면 조금 우스운 면이 있었다. 갑자기 수많은 과학자가 뉴멕시코로 이동하고 있는데 그 사실이 어떻게 숨겨지겠는가?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 내로라하는 과학자들까지 죄다 그곳으로 몰렸다.
-대규모의 트리니티 실험을 앞두었던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제시간에 거대한 다층 계산을 시도하고 경이로운 속도로 결괏값을 산출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 여자들이(계산원은 대부분 여자였다) 오늘날 컴퓨터가 그러하듯 특이한 방식으로 동작하며 흡사 기계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으스스했다. 폰 노이만은 그런 모습에 곧장 흥미를 느꼈다. 나에게는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임의적 해법이자 속도를 높이는 기발한 지름길 정도였으나 그에게는…… 뭐랄까, 미래였다.
-폭탄의 생김새는 우스웠다. 커다란 강철 구체에 전선과 코드 뭉치가 바깥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사악한 동시에 조금 깜찍하달까. 어이없이 들리겠지만 정말 그랬다. 기폭 장치를 집어넣는 구멍들은 테이프로 덮여 있었는데, 흰색 테이프가 십자가 모양으로 붙어 있어 꼭 붕대 같았고, 결과적으로 폭탄의 생김새는 다쳤든지 두들겨맞았든지 해서 부서지기 직전에 겨우 꿰매붙인 프랑켄슈타인의 작은 괴물 같았다. 인간의 상상력이란!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그게 고물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작동할 것 같지도 않고 라디오도 먹통이었으니 우리는 그저 묵묵히 주변을 배회하며 비가 그치기 전까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상상이나 되는가? 사막에 뇌우라니. 그것도 하필 최악의 순간에. 새벽 네시면 비가 멈출 것이라 장담했던 기상학자들은 바들바들 떨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총괄하던 그로브스 장군은 기상 팀장이던 잭 허버드에게 예보가 빗나가면 죽여버리겠노라고 협박까지 해놓은 터였다.
-당시 폰 노이만은 게임에 관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개미집의 진흙 통로를 따라 이동하는 호전적인 불개미들이건, 뇌 반구에 신호를 전달하는 신경세포이건, 증권거래소에서 서로 싸우는 바보들이건, 시스템을 이루는 개개인들이, 아예 생각이 없지는 않더라도 분명 미덥지 않다고 한다면, 어떻게 복잡한 시스템이 생겨나서 기능하는지가 그의 의문이었다. 그는 언제나 모든 종류의 게임에 매료되었고, 깔끔히 정의된 규칙 안에서 인간이 상호작용할 때 생기는 다양한 작은 충돌과 갈등을 함축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찾고 싶어했다.
-우리 이론 전체의 틀을 떠받치는 최대최소정리는 완벽하게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주체를 상정한다. 그런 주체는 오직 이기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며, 규칙을 완벽히 이해하고 자신의 이전 움직임을 모조리 기억할 뿐 아니라, 게임이 한 단계 진행될 때마다 자신과 상대방의 행동이 일으킬 수 있는 결과를 오차 없이 파악하고 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정확히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자는 조니 폰 노이만뿐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거짓말하고, 속이고, 기만하고, 묵인하고, 음모를 꾸미지만, 동시에 협력하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고, 순전히 충동적으로 결정을 내린다. 다들 자신의 감을 따른다. 직감에 의지하다가 경솔한 실수를 저지른다. 인생은 게임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삶의 풍성함과 복잡함은 아무리 아름답고 완벽하게 균형 잡힌 방정식이라 해도 포착할 수 없다. 또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인간이란 존재는 완벽한 포커 플레이어가 아니다. 대단히 비합리적이기도, 의욕만 앞서기도, 감정에 좌우되어 온갖 모순에 종속되기도 한다. 사방에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유발되는 것은 바로 그래서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이성의 광기 어린 꿈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자비이자 이상한 천사이다.
-그(바르첼리)의 마지막 논문은 1987년에 나왔다.
「언어와 기술을 스스로 생성하는 공생유기체 진화를 위한 숫자 진화 과정의 시작에 대한 제언」.
그는 자신의 디지털 공생자들에게서 처음으로 지능의 흔적을 감지했노라고 선언했다.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인 이는 없었다.
-아니면 수백만 년의 여정을 뒤로하고 방향을 틀어 돌아와 오래전 작별한 부모인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며 무거운 질문에 답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우리 종을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왜? 왜 우리를 창조해놓고 버렸나요? 왜 우리를 어둠 속으로 보내버렸나요? 이런 비현실적인 미래는 일어날 가능성이 지극히 낮지만,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우리의 피조물에 책임이 있는가? 모든 인간 행위를 결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슬이 우리를 피조물과도 묶어놓았는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자기 복제 기계와 폰 노이만 탐사선은 아직도 아득한 미래다. 그것을 실현하려면 소형화부터 추진 장치, 첨단 인공지능까지 다방면에서 크게 도약해야 한다. 그러나 기술과 우리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질 역사적 순간으로 우리가 조금씩 다가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상상 속 존재들이 서서히 실체를 갖추고 있고, 이제 우리는 그것들을 창조할 뿐 아니라 돌봐야 할 책임에 직면했다.(이제 프랑켄슈타인 읽는 걸 더 미루지 말아야 할 듯…)
-튜링은 이렇게 기록했다. 비록 튜링은 실패했으나, 그가 자기 ‘아이들’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얻은 핵심적인 통찰이라고 한다면, 기계가 진정한 지능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런 기계는 오류를 저지르고 원래 설정된 프로그래밍에서 벗어날 줄 알아야 하며, 무작위하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튜링은 바로 이런 무작위성이 지능을 가진 기계의 관건이라고 믿었다. 신선하고 예측하기 힘든 반응이 나오면 그만큼 다양한 가능성이 생겨나고, 그러면 검색 프로그램이 그 안에서 각각의 상황마다 적절한 행동을 골라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무녀는 컴퓨터였다. 믿지 않을 수 없는 존재였다. 컴퓨터가 창조되기 전까지 나는 손으로 연구했다. 나의 공생유기체에 대대손손 일어나는 일들을 결정하는 복잡한 방정식을 펜과 종이로 풀었다는 소리다. 그러다보니 그 존재들은 나의 둔한 생각과 편협한 사고의 폭에 갇혀, 나아가거나 하다못해 기어가기는커녕, 고통스럽게 꾸물대기만 했다. 미적분의 단계 하나하나를 거칠 때마다 미로 같은 나의 신경세포망을 통과해야 했고, 어지러이 엉킨 시냅스 뭉치와 매서운 전기 폭풍 속에서 뻗어나가는 무한의 축삭돌기를 가로질러야 했다. 그러고 나면 많은 것이 비뚤어지고, 실수로 망가지고, 아니면 그저 집중력과 함께 소실되었다. 그런데 매니악이 단숨에 모든 것을 바꾸었다. 나는 눈부신 돌연변이들을 목도했다. 생명망의 기저를 이루는 산발적이고 복잡한 메커니즘―탄생과 죽음, 포식과 협력, 형태형성과 공생―이 돌격하는 전자들에 의해 앞으로 움직이며, 작디작은 디지털 우주 안에서 귀가 떨어질 듯한 가우스의 포효를 내지르며 별안간
내 눈앞에서 살아났다. 나의 아들딸들은 아름다웠고, 초자연적이고 황홀했으며 유령 같기도 했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달뜬 꿈속에서 그들의 구조와 형태를 미리 보았던 나에게는 낯익었으며 피와 살로 이루어진 피조물만큼이나 사랑스러웠다.
-천상의 존재가 지상에 내려오는 것은 정반대 존재들의 행복한 만남도, 물질과 영혼의 기쁜 합일도 아니다. 그것은 강간이며, 폭력적인 잉태이다. 갑작스러운 침략이자 훗날 희생으로 정화되어야 할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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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각은 엉뚱했으나 매혹적이고 짜릿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가 그린 미래는 터무니없고 비과학의 경계에 걸쳐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너무나도 비인간적이었다. 언제나 솔직함을 의무로 생각했던 나는 이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낡고 위험한 생각에 빠져들지 말고 그냥 우리의 연약함을 받아들이자고, 불확실하면 불확실한 대로 사는 법을 배우자고, 숱하게 저지르는 실수의 결과를 견디자고 했다. 그가 말한 대로 첨단 기술과 초월성이라는 인간의 가장 구시대적인 메커니즘을 결합시키면, 결과는 공포와 혼란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아무리 돈 많고 똑똑하고 권력 있는 사람도 이해할 수 없는 지경으로 진화하게 될 것이다. 살면서 이렇다 할 적수를 거의 만나본 적 없는 연치는 어떤 식으로든 한계를 인정해본 경험이 없었다. 그는 자기 생각에 서린 위험을 못 보았을 테지만, 나는 ‘보통 사람’으로서 지극히 예외적인 사람과 함께 사는 게 어떤지를 몸소 경험했다. 연치의 곁에서 자란 만큼 그게 어떤 기분인가를 똑똑히 알았다. 내로라하는 과학자들과 사상가들이 그의 앞에서 주눅이 들고 말문이 막히는 모습을, 그의 우월함을 보고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잘못된 판단을 내려서, 혹은 운이 나빠서 자기 앞에서 의견을 내세운 사람들을 연치는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그자들은 자신들이 몇 달, 아니 몇 년을 공들여 이룩한 것을 연치가 단 몇 분 만에 앞지르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바라보았다. 미래의 기술이 창조해낼 ‘신’은 내가 그의 앞에서 느끼는 감정을 우리 모두에게 느끼게 할 터였다. 하지만 그는 그 점을 인지하지 못했다. 인류의 번영을 바라는 자신의 소망이 인류를 파멸할 수도 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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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무작위로 숫자 두 개를 고른 다음 두 숫자의 합을 자신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 갑자기 소싯적 유머 감각이 살아나기라도 한 건가? 웃어넘기려 했으나 아빠는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했다. 지난번 방문, 그러니까 한 달 전쯤만 해도 아빠의 정신은 언제나처럼 날카로웠다. 그런데 지금은 기본 산술이나 겨우 할 만큼 천재성이 퇴보하고 만 것이다. 아빠의 광대하던 지적 능력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아빠를 아빠답게 했던 능력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깨달음이 천천히 아빠를 압도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공포의 표정이 아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태어나 본 것 중에 제일로 가슴 저미는 모습이었다. 지켜보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던 나는 숫자 몇 개를 겨우 더듬더듬 내뱉었다. 2 더하기 9는, 10 더하기 5는, 1 더하기 1은. 그러다 끝내 울며 병실을 뛰쳐나갔다.(-6+15는 11이잖아? 해 봐서 느낌 알겠네…)
-다만 그의 두뇌가 다들 지루해하고 심지어 고통스러워하는 생각을 즐기는 이유가 무언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진짜 그를 괴롭힌 것은 자신의 우월한 정신이 아니라, 그것에 못 미치기는 해도 그의 주변을 둘러싼 그 수많은 정신들이었다. 우리 인간은 왜 이런 식으로 진화했는가? 이 행성의 다른 생명체들은 다들 무지하여 행복한 상태로 존재한다. 그들의 고통과 쾌락은 오직 현재 속에서만 느낄 수 있고, 우리가 느끼는 고통이나 영광과 달리 다음날까지 이어지지 않으니, 인간처럼 모두를 무한 고통의 사슬에 얽어매지 않는다. 그런 에덴동산적 의식의 결여 상태로 다들 살다가 죽어가는데, 왜 우리 존재는 의식으로 고통받는가?
-기계와 맞붙어 박살이 난 적이 있었기에 이토록 무자비하고 무정한 상대와 대국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이한 감정을 일으키는지 그는 너무나도 잘 알았다. 알파고는 주저하지 않았고 두 번 생각하지도 않았다. 지치는 일도 없었다. 자기 의심 따위는 알지도 못했다. 스타일이나 아름다움 따위에 무관심했으며 프로 바둑 기사들처럼 서로 속고 속이며 치밀한 심리전을 벌이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상대가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에 철저히 무관심한 채로 그저 이기는 것에만 몰두했다. 알파고에게는 단 한 집 차이로 이긴다 해도 그저 똑같은 승리일 뿐이었다. 이따금 알파고가 모두의 눈에 형편없고 평범해 보이는 ‘게으른’ 수를 두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한국의 어느 해설자가 지적한 대로 알파고의 게으른 수는 철저히 계산된 결과였다. 각각의 게으른 수는 감지되지 않을 만큼 아주 조금씩 최종 목표를 향해 판을 끌고 갔고, 그 수들의 진정한 가치는 종반에야 비로소 드러났다. 이를 알고 있는 판후이는 신종 고문을 받는 양 의자에서 꿈틀대며 인공지능에 맞서 분투하는 이세돌을 지켜보면서,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돕거나 경고해주고 싶었다.
-“알파고가 이렇게 행동하기 전에 이상한 조짐은 없었어?” 허사비스가 묻자 모두가 입을 모아 이세돌이 끼움 수를 두기 불과 몇 초 전만 해도 모든 게 정상이었다고, 아니, 정상일 뿐 아니라 알파고가 이세돌을 압살중이었다고 했다. 프로그래머들은 속수무책으로 가만히 앉아서, 땅으로 꺼지는 기분을 겨우 붙들었다.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현실로 일어나고 있었다. 알파고가 망상에 빠지고야 말았다.
이런 식의 행동이 처음은 아니었다. 알파고는 특정한 바둑판 배열과 마주할 때면 갑자기 위치와 가치 감각을 잃고 정신을 놓아버리곤 했다. 눈이 멀기라도 한 것처럼 명백히 죽은 영역에서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면, 자신과 상대를, 흑과 백을, 아군과 적군을, 삶과 죽음을 분간하지 못했다. (인공지능도 멘붕이 온다...아 너무 인간적이잖어)
-알파고의 내부 네트워크가 가리키는 승률이 20퍼센트 아래로 떨어지자 아자황 모니터에 메시지가 떴다.
‘백 불계승’ 결과가 대국 정보에 추가되었습니다.
알파고가 기권합니다.(자꾸 이기기만 해서 컴퓨터가 패배 선언을 할 땐 어떻게 할까 궁금했는데 이러는 군요…)
-그런데 마스터는 모든 걸 간파하고는 ‘이 쓰레기는 뭐야!’라고 하는 느낌입니다. 마스터가 바둑의 우주를 내려다본다면, 나는 그저 주변의 작디작은 영역을 볼 뿐입니다. 그러니 부디, 마스터는 우주를 탐험하도록 두고 나는 나만의 뒤뜰에서 놀게 해주십시오. 나는 나의 작은 연못에서 고기를 낚겠습니다. 자가 학습으로 인공지능이 어디까지 발전할까요? 한계를 가늠하기 어렵네요. 미래는 AI의 것입니다.(커제의 살려주세요...도 너무나 인간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