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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다른 아이들 2
앤드류 솔로몬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평점 :
-20250817 앤드루 솔로몬.
첫 아이를 가졌을 때, 도저히 아이가 생길 수 없다고 믿던 시기에 임신을 했기 때문에 임신 중에도, 출산 후에도 거듭 생각했다. 내가 낳기로 한 게 아니라 이 아이가 생겨나기로 스스로 원했다고. 그건 어쩌면 책임감을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떠넘긴 비겁함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생겨나기로 원한 아이니까 나는 아직 미혼이어도 아이를 낳겠다고 생각했고, 가장 친밀한 이들에게 의사를 비쳤고, 찰나에 가까운 시간이나마 임신 중단 요구를 받았다. 직장에는 배불러서 어떻게 다닐 거냐고, 혹은 흐느낌과 함께 한 번만 봐 달라고. 나는 내일 모레면 서른 살인데 마치 십대 미혼모 취급 받는게 열받기도 했고, 나만 그러냐, 당신은 내년이면 서른 살인데 더 미루고 다음을 말할 건 무어냐, 가난하다고 태어날 권리도 없냐, 하고 강하게 저항해서 친밀한 이들을 겨우 설득하고 임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부모되기야 애기 태어나기 전에 혼인신고만 하면 뭐 법적으로는 간단한 일이다. 살 집과 돈이 없으면 은행에다가 전세대출해주세요, 해서 사천만원 빌리고 나중에 갚으면 되는 일…가능하면 곰팡이 안 피는 집으로 알아보세요...
아이는 신생아 시절 매우 심한 아토피성 피부염으로 길게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지만, 대개는 건강했다. 호기심 많은 동그랗고 반짝이는 눈으로 세상을 흡수하듯 무엇이든 잘 배웠고, 자기는 태어나서 기쁘고 자신의 가족과 삶에 대해 만족한다고 늘 긍정적인 말을 했다. 나는 품고 낳기만 쉬웠지 양육을 하기에는 많이 우울하고 폭력적인 인간이었고, 아이를 포기하자고 했던 친밀한 사람들은 기대보다 훨씬 더 큰 헌신과 애정을 담아 나보다 더 아이를 다정하게 돌보았다. 그래서 향정신성의약품과 성대결절약까지 한움큼 먹는 중의 임신이라 걱정했던 것과 달리 아이는 매우 똑똑하고 비교적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랐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방 문을 꼭 걸어잠그고 틀어박히는 고독한 청소년이 되었지…
내 망상과 달리 아이는 부모를, 태어나거나 태어나지 않기를 선택할 수 없다. 반대로 부모는 낳거나 낳지 않을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 어쩌면 자신의 선택과 의지로 택한 길이라 부모들은 자녀가 어떤 사람이 되든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최대한 그들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 같다.
앤드루 솔로몬의 이 책 1권에서는 청각장애, 다운증후군, 소인증, 자폐, 정신분열증을 가진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를 다루었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장애와 질환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정체성이 될 수 있다는 것, 수평적 정체성이라는 개념이 참신했다. 2권의 주제는 조금 더 무겁고 혹독했다. 첫머리로 음악 신동에 대해 다뤘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아이의 부모도 장애인 아이를 기르는 것과 별반 차이 없다는 것이 어느 정도 수긍이 갔고, 처음에는 뜬금 없다 생각했던 신동이라는 주제가 이 책에 낄 법하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위플래시’란 영화를 오래전에 봤을 때 부모는 아니지만 아이의 선생이 최고의 연주를 할 수 있도록 몰아 붙이는 것을 보고 이건 굉장히 가학적인 아동학대물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분명 스스로 음악을 아주 사랑해서 숨쉬듯 자연스럽게 음악가로서의 재능을 연마한 아이들도 있긴 하겠지만, 많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인정 받고 사랑받으려고, 자신에 대한 부담스러운 기대를 충족시켜주려고, 대부분의 평범한 아이들이 갖는 소소한 어린 시절의 행복을 내려놓고 고행에 가까운 연습과 공부를 했을 것이다. 언론에서 본 영재들 이야기, 초등학교 다닐 나이에 우수한 학생들이 모이는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간 아이들이 자신들이 가진 재능 외에도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해 적응을 못할 때, 안쓰럽게 여기는 대신 영재 부모의 욕심을 욕하는 반응을 보고 어느 정도는 부모 책임도 있겠지만 왜 저렇게들 가혹하게 까내릴까 싶었다. 아마도 시기와 질투가 있을 것이고, 완벽할 수 없는 인간에게 완벽하지 않다고 자기일 아니라고 그렇게 마구 비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직전에 읽은 ‘세상의 모든 아침’에서 음악하는 사람의 가족과 연인들이 그들을 보조하면서 그다지 순탄하지 않게 사는 걸 보면서 아...어린이들에게 너무 탁월한 사람이 아닌 걸 감사해야 하는 건가 싶었다. 피아노학원 다닌지 거의 30년 된 나에게 야매로 피아노를 배우고 있는 어린이들은 적당히 잘 배우지만 신동 근처도 못 가니까 나중에 음악을 즐기고 스스로 원하는 소리를 낼 정도까지만 어떻게 해보려고….(했는데 실상은 위플래시의 선생님처럼 자세랑 오류 교정하면서 개혼내고 있으니… 이율배반이라는 말 여기다 쓰는 것이로군.)
강간 피해자가 가해자 때문에 아이를 가지고 결국 출산까지 하게 되면서 몇겹의 고통을 겪는 사례는 가장 읽기 힘들고 슬픈 부분이었다. 저자는 이 주제 다룰 때 서구 지역 어머니들 뿐 아니라 내전으로 종족간 학살이 일어난 아프리카 르완다 등의 지역 여성들도 인터뷰했다. 아이를 보는 것 자체가 트라우마인 사람, 오히려 축복처럼 소중한 아이를 만나기 위한 과정이었다 여기는 사람,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묻는 사람, 모두 아이에게 사랑을 주는 어머니가 되려고 애쓰고 있었다.
범죄 청소년의 부모 이야기는 자식이 죄인 되는 순간 부모도 함께 엄청난 비난과 죄의 굴레를 함께 쓰는 게 거의 만국 공통이라, 그런 부모들의 목소리를 듣는 기회조차 흔하지 않았다. 앤드루 솔로몬은 소년원이 아닌 징벌보다는 재사회화, 사회 적응, 가족 관계 개선에 초점을 둔 홈스쿨의 부모와 범죄 청소년들을 주로 만나면서 범죄 또한 때로는 자유 의지로도 통제가 안 되는 질병과 장애처럼 바라보고 그들이 치유되도록, 그러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범죄 청소년을 이끌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듯했다. 일부 맞는 말이긴 했지만 그동안 목소리를 못 냈던 가해자 부모 위주로 인터뷰를 해서, 범죄 피해자들 입장에서 이 챕터를 읽었다면 극소수는 가해자의 입장도 헤아렸겠지만 대부분은 그냥 다 죽였으면 하고 분노에 찼을 듯하다.
LGBT중 앤드루 솔로몬은 트랜스젠더와 그 가족을 집중적으로 인터뷰했다. 게이를 안 고른 게 의외였는데 그 부분은 마지막 챕터에서 길게 뽑을 예정이었던 것...내가 진짜 나라고 여기는 나의 모습으로 살기 위해 분투하는 아이들과, 트랜스 이전의 아이를 잃는 슬픔에 빠진 부모와, 아이들을 교정할 수 있다 믿고 정신과치료를 시도하면서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부모와, 아이들을 적극 지지하기 위해 협회나 재단이나 행사까지 만들고 지원하는 부모들까지 다양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증오범죄는 이전 ‘트라우마 클리너’나 ‘젠더를 바꾼다는 것’, ‘퀴어, 젠더, 트랜스’ 같은 책에서 일부 살펴볼 수 있었는데, 이 책의 사례들은 훨씬 참혹하고 나열하면 끝이 없어서 읽는 내내 안타까움을 넘어 두렵기까지 했다. 트랜스젠더의 다름에 대해 저렇게 폭력성을 드러내는 인간 무리가 있다면, 나의 어떤 다름에 대해서도 그것이 표적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대부분 스스로 평범한 보통의 사람이라고 안도하며 남들처럼 살려고 애쓰려는 것도 저런 다름에 대한 압제 때문이겠다 싶어서 속상했다.
게이나 동성애자의 부모자녀 관계에 대해 저자가 할 말이 제일 많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책의 후반부는 게이인 저자가 아버지가 되기 위해 거친 여러 과정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 부분은 흥미롭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정상가족에 대한 관념이 편견과 고정관념에 뿌리를 두고 조금이라도 다른 가정의 아이들에게 그들이 어떤 잘못이라도 하면 그게 다 엄마/아빠가 없어서 그래, 하고 아무렇지 않게 평가하는 게 당연한 세상에서, 앤드루와 그 친구들은 아이들에게 아주 많은 부모를 만들어 주고 새로운 가족관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굳이 그런 걸 보여주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자녀를 원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도 미혼의 여자 방송인이 정자 기증으로 아이를 낳아 혼자 키우는 걸, 레즈비언 커플이 역시나 정자 기증으로 아이를 낳아 함께 키우는 걸 어머니 욕심으로 아이 처지는 생각도 안 하고 이기적이라고 심하게 댓글로 욕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았다. 중요한 건 그 어머니, 아버지들이 아이를 충분히 보살피고 사랑해주고 학대하지 않는 것인데, 오히려 있으니만 못한 어머니, 아버지를 다 갖추고서 나쁘게 힘들게 크는 아이들도 있는데, 세상은 과거에 비하면 동성 부부와 그들이 아이를 키우는 것까지 허용하는 지역이 등장할 만큼 바뀌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여전한 것들이 있다. 아마 그런 적의와 혐오와 그에 기반한 폭력은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 같다.
두 권의 벽돌로 이루어진, 쓰는 데만도 10년은 걸렸다는 이 책은 분량은 제법 되지만 읽었을 때 못 알아들을 말은 거의 없었다. 그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할 독서였다. 이 책을 읽고 그동안 나쁘게만 생각했던 부모나 자녀들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사람이 있다면 참 좋겠지만, 늘 반추하듯 정작 읽어야 할 사람들은 안 읽는 책들이 많다. 이 책을 읽었으면 싶은 사람은 단언컨대 누구나, 모두다, 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삶의 다양성에 대한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접했으면 좋겠다.
+밑줄 긋기
-절대음감을 타고나지는 않았지만 훈련을 통해 음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학습을 통해서 이를테면 ‘G‘를 내는 법을 배우고 해당 음을 기준으로 해서 다른 음들을 계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절대음감이 항상 음악적 능력을 높여 주는 것은 아니다. 한 가수는 그녀가 속한 합창단의 다른 단원들이 사분음 낮게 부를 때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녀는 다른 단원들과 불협화음을 내서라도 악보에 적힌 대로 노래를 부르고 싶은 어쩔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44-45, 이 부분 읽기 직전 난 저렇게는 할 수 있는데, 생각했더니 언급이 되었다. 그런데 그건 별 쓸모가 없네요…라이브 연주 듣다가 기타 피치가 안 맞네 하는 쓰잘데 없는 거슬림만...내가 그래서 떼창하기도 싫어해요…)
-그의 부모는 그가 동성애자라고 밝히자 몹시 화를 냈다.그가 말했다. ‘나는 부모님의 편협한 애정에 화가 났습니다. 부모에게 자식이란 다양한 모습을 지닌 복합적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자식의 다른 부분은 제쳐 놓고 반짝이는 부분만 골라서 사랑할 수는 없는 거예요.’ (57)
-그런 부모들은 그들 자신의 희망과 야망,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의 자녀가 아닌 자녀의 능력에 투자한다. 자녀의 호기심을 길러 주기보다는 자신의 명성을 향해서 전력 질주한다. 내 기준에서 그런 부모들이 잔혹하게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자녀에게 앙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부모와 자식 사이에 존재하는 삶의 경계선에 대한 비극적인 몰이해를 보여줄 뿐이었다. 절대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고 부모의 권력만큼 절대적인 권력은 없다. 그런 부모를 둔 자녀는 이미 부모의 강박적인 관심에 종속되어 있음에도 자신이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괴로워한다. 그들의 비애는 엄격한 연습에서 기인한다기보다 자신의 불가시성에서, 즉 부모가 자신을 봐주지 않는 데서 기인한다. 성취는 앞으로 기대되는 승리를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포기하도록 요구하며, 이 같은 사실은 자녀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자극이다.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면 그들은 열살 이전에 절대로 세계적인 수준의 연주가가 될 수 없다. (75, 이 책은 음악 신동에 한정해서 해당 장을 서술하고 있지만, 학업이나 스포츠, 모든 분야에 대한 부모의 기대에 적용될 만한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보다 인간적이고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장애인을 돕는다. 비범함에 대해서도 동일한 마음가짐으로 접근할 수 있다. 동정은 장애인의 자존감을 저해한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적의가 유사한 장애물이다. 동정과 적의는 하나같이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느낄 때 나타나는 징후다. (129)
-‘그의 상상력은 나의 상상력을 바꿔 놓기 일쑤였다’라는 한 문장은 비범한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가 보여 줄 수 있는 훌륭함의 극치를 보여 준다. 부모는 그처럼 자신의 상상력을 대체함으로써 자녀의 상상력 발달에 도움을 준다. 신동 자녀를 둔 부모로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 같은 현명한 태도는 큰 대가를 요구하는 일이지만, 신동 자녀의 총명함을 등불 삼아서 자신의 길을 재설정할 수 있는 부모는 장차 자녀가 세상을 새롭게 바꿔 나가는 방식에서 엄청난 위안을 얻게 될 것이다. (136, 나는 나의 상상력을 자꾸만 어린이들에게 강요하는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되는 부분…)
-“여러분의 자녀가 친하게 지내는 친구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가 말했다. “자녀가 나쁜 무리와 어울리기 시작하면 나쁜 무리가 아이들을 타락시키고 결국 여러분의 자녀는 나쁜 짓을 저지르게 될 겁니다.”나는 아이들의 타고난 순수성을 더럽히는 ’나쁜 무리‘에 대한 교회의 비난에 충격받았다. 설교자는 계속해서 악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명에 따른면 이 교회 사람들은 ’동성애 왕국‘에 반대해서 일어나야 했고, 현대판 고리대금업자는 거룩한 장소에서 추방되어야 했다. 미니애폴리스의 흑인 문제가 동성애자와 유대인, 은행의 잘못이라는 그 같은 발상은 내게 세 번의 차 사고에 대한 다숀테의 변명이나, 다리우스가 자신을 속여서 위법행위를 저지르게 했다는 그의 주장을 떠올리게 했다. 타인에 대한 신도들의 증오는 이상하게도 갱단의 정신을 연상시켰다. 그 공동체는 호전성과 뒤얽힌 관용을 보였고, 가혹함과 친절이 뒤섞인 설교자의 주장을 예수그리스도가 무한한 사랑과 최후의 심판에 있을 가혹한 판결을 예언했던 것과 동일 선상에서 이해했다. (278, 저자의 성적지향을 알았으면 초대하지 않았을 사람들 틈에서 “우리 애는 안 그래요”를 시전하는 공동체를 대하는 마음은 어떤 것일지 조금 알 것 같은 기분… 우리 애는 절대 안 그런 애인데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그래요… 그런 소리 안 들으려고 나는 친구가 별로 없다. 읭.)
-“우리에게 마음을 열고 솔직하게 대해 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당신이 동성애자이고 애인이 있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어요. 당신도 우리가 흑인이라고 해서, 쿨이 감옥에 다녀왔다고 해서, 내가 혼자 자식을 키우면서 도심의 빈민 지역에 산다고 해서 우리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잖아요. 사랑하고 행복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이제 나는 당신이 그런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기뻐요. 나는 친구를 사귈 때 그 사람의 마음을 봐요. 그리고 보다 커다란 어떤 목적을 위해서 하느님이 우리를 친구로 맺어 주었다고 믿어요.” (279, 앞에서 내가 저렇게 투덜댈 걸 알고 바로 뒤에 다숀테의 엄마 오드리의 다정한 반응을 첨언해 놨다. 실제 인식과 감정이 어떻든 간에 속을 터 놓은 상대에게 저렇게 편지 써 줄 수 있는 마음은 쉽지 않은 일 같다.)
-인간의 충동이 다양하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애초에 유혹을 느끼지도 않았던 행동에 빠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특유의 오만이 있다. 성범죄자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아동에게 성적으로 끌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은 채 아동과의 성관계를 추구하지 않는 데 의기양양해한다. 약물에 의존하는 경향이 없는 사람들은 중독자를 경멸한다. 소식가들은 병적으로 비만인 사람들을 멸시하기 일쑤다. 아마도 100년 전이었다면 나는 동성애 때문에 감옥에 갔을 것이다. 다행히도 나 자신에 대해 솔직할 수 있는 장소와 시대에 살고 있을 뿐이다. 내가 동성애자로서의 내 욕구를 거부해야 했더라면 그것은 거부해야 할 욕구가 없는 이성애자의 경험과는 사뭇 다른 경험일 것이다. 나는 범죄자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 중에는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거나, 나약하거나, 어리석고 파괴적인 사람도 많지만 강박적인 충동에 이끌리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훔치고 싶은 욕망이 매순간 불타오르고 있음에도 절도를 자제함으로써 엄청난 용기를 보여 준다. 그들이 스스로 없애 버릴 수 없는 악마를 억누르는 일은 절도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법을 지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대체로 범죄자의 가족들은 그들의 자녀가 파괴적인 짓을 했다는 점을 인정하기 위해, 그리고 어쨌거나 그를 계속 사랑하기 위해 애쓴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사랑하길 포기하거나 나쁜 행동을 모른 체하기도 한다. 포기나 외면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는 이상적인 상태는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는 개념에서 시작되지만 죄와 죄인은 그렇게 쉽게 분리될 수 없다. 인간이 죄인을 사랑한다면 그의 죄도 포함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324)
-그러나 악은 항상 예측이나 설명이 불가능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자폐증이나 정신분열증 환자의 가족들은 분명히 건강하다고 생각했던 자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의아해한다. 마찬가지로 끔찍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 자녀 문제로 씨름하는 가족들은 그들이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순진한 자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의문을 갖는다. (326)
-나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남자에서 여자가 된 것이 아니에요. 비밀을 숨기고 있던 사람에서 더 이상 비밀이 없는 사람이 된 것이죠. 당신이 간절히 바라는 꿈과 가장 깊은 슬픔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 우스운 것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이에요. 이중생활은 고단하고 궁극적으로는 비극이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없다면 사랑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에요. (386)
-’(…)그럼에도 나는 아들에게 “세상의 반응에 대응할 준비가 된 것이 확실하니?”라고 물었어요. 모세가 대답했죠. “문제는 세상이 나에 대한 준비가 되었냐는 거죠.” 나는 “얘야, 아버지인 나부터도 너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구나”라고 말했습니다.‘ (433)
-‘(…) 우리는 출생증명서에 인종을 기입하지 않아요. 인종은 자기 인식 행동에서나 의미가 있을 뿐 더 이상 법적으로 유의미한 범주가 아닙니다. 젠더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 ‘사람들은 자신의 성에 매우 애착을 느낍니다. 나도 그렇고요. 그리고 이러한 애착은 종교와 매우 흡사합니다. 정부가 사람들의 종교를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충격적일 것입니다. 정부가 누군가의 젠더를 규정할 수 있다는 발상도 마찬가지로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460, 인권변호사 섀넌 민터 씨의 말)
-한편으로 나는 선택이, 특히 일상적이지 않은 선택이 부담스럽고 고단하며 두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내가 처음으로 쓴 책은 소련의 예술가 집단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들이 서구 사회로 넘어왔을 때 나는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서로 다른 상표의 20가지 버터가 진열되어 있던 독일 슈퍼마켓에서 서구 사회가 그에게 요구하는 수많은 선택을 견딜 수 없어서 울음을 터트렸던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나는 피곤한 선택이 수반될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런 미래가 온다면 아마도 나는 내가 지금 가진 것들을 선택할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더욱 사랑할 것이다. (474, 슬픈 버터, 나는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 버터 말고 카이막 먹을래)
-‘(…) 정상이란 주관적인 상태다. 그리고 우리한테는 장애가 정상이다’(481, 영국 장애 인권 운동가 조애나 쿼파시아 존스의 말)
-어떤 여성도 당사자가 두려워하는 임신을 강요받지 말아야 하고, 또 어떤 여성도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서 낙태를 강요받지 말아야 한다. 수평적 특징을 가진 자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태아기 검사를 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그들의 아이에게 존엄성을 부여한다. 우리는 생식에 관련된 과학기술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어떤 아이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 우리가 어떤 아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 추측한다. 이러한 추측을 기피하는 것도 무책임한 행동일 수 있지만 추측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무지한 행동이다. 가정에 근거한 사랑은 실질적인 사랑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까닭이다. (489)
-또 불안이 엄습할 때마다 내가 운전 면허 시험을 보려고 집을 나설 때 어머니가 들려주었던 조언을 떠올렸다. 인생에는 우리를 주눅 들게 만드는 일 두 가지가 있으며 주눅을 이겨 내기 위해서는 그 두 가지가 거의 누구나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운전과 자식을 낳는 일이다. (496, 나는 운전을 할 줄 모르므로 반대로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사람에게도 이 조언은 크게 쓸모가 없겠지만, 면허 시험을 보고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한 앤드루 솔로몬에게는 도움이 되었겠다. 맥락은 너무도 중요해서 잘못 문장 뜯어오면 이상하게 오독이 되고, 그러다보면 너무 많은 덩어리를 퍼오게 된다. 밑줄 긋지 말까…타자쳐서 책 내용 옮기는 게 반추하길 좋아하는 나의 미래한테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아 또 뭘 이러고 있을까 다 남의 말일 뿐인데 이게 뭐라고 싶기도 하다. 그치만 남의 말 중에 그럴싸하니까 옮겨온 거잖아...그냥 하던 대로 해...)
-또한 예전의 내가 종종 억압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처럼 이질적인 아이에게 나 역시 똑같이 억압하는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웠다. (497, 나도야…)
-내가 갓 태어난 그녀를 안은 후에 블레인도, 리처드도, 존도 그녀를 안았다. 우리 모두는 이 황홀한 존재에게 누구일까? 그녀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그녀의 존재로 인해 우리 어른들의 관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이미 연구를 한창 진행 중이던 나는 모든 아이가 수평적인 특징을 조금씩 갖고 있으며, 부모의 특징을 재구성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단서를 찾고자, 그리고 그녀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바꿀 것인지 힌트를 얻고자 나는 그녀의 작은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500-501, 저자 앤드루는 존과 동성 부부가 되었고, 그 이전에 앤드루는 친자를 가지고 싶은 열망을 가지고 있다가 역시나 어머니가 되고 싶어하던 오랜 친구 블레인에게 농담처럼 필요하면 내가 도와주지, 했는데 그녀가 수락해 버려서 존하고 갈등은 좀 생겼지만 잘 상의해서 블레인은 아이를 갖게 되었고, 그 사이 블레인은 리처드와 결혼하게 되었다. 존은 더 일찍 레즈비언 커플 친구들-로라와 태미-에게 정자를 기증하고 대신 양육권/양육비 요구 같은 법적 의무 권리는 모두 포기하는 절차를 밟아서 아기들의 생물학적인 아버지이긴 하지만 법적인 연결고리는 없다. 앤드루는 자신의 성을 블레인이 낳은 작은 블레인에게 물려줄 것이고, 아이는 블레인과 함께 살테지만 하여간에 앤드루는 아버지가 되고 싶었고 아이를 만든 두 사람은 거기에 동의를 했다. 이 혼란 속에 나는 그렇게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만들어가는, 그리고 그 선택으로 태어난 아이들에게 경제적으로든 지적으로든 지원을 충분히 해 줄 만한 부모들의 자부심 같은 걸 본 것 같아 그 용기가 놀랍기도 했지만 배도 아팠다.)
-우리 두 사람은 사랑의 행위라고 생각하고자 했던 일이 경제적 특권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이 유감스러웠다. (503, 결국 앤드루는 자신의 정자에다 기증받은 난자, 대리모, 이렇게 앤드루-존 부부가 양육할 아이를 만들기로 존과 합의했다. 대리모의 존재 자체와 이런 시장에서의 거래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앞의 아이 못지 않게 앤드루의 두번째 아이도 논란이 되었을텐데, 새 생명이 온전히 환영 받지 못하고 어떤 문제거리나 사회와 관습에 대한 도전, 벗어난 무언가로 바깥 사람들에게 다루어질 가능성을 먼저 걱정하게 되는 건 또 서글픈 일이었다. 미안, 앤드루. 걱정이 많은 나라서… 그런데 바로 다음 장에 존이 정자를 기증해서 아이를 가졌던 레즈비언 커플의 로라가 대리모가 되어 주겠다고 기꺼이 나선다. 참으로 정이 돈독한 친구들이다...)
-조지가 태어난 뒤로 나는 복잡하게 얽힌 우리 모두의 관계가 어떻게 제자리를 찾아갈지 의문이었다. 존과 나는 조지를 전적으로 책임진다. 블레인과 나는 작은 블레인과 관련되어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함께 결정한다는 조건에 진작 합의했다. 로라와 태미는 독립된 친권을 가졌고, 우리는 올리버와 루시의 삶에 대해 아무런 결정권이 없으며, 마찬가지로 로라와 태미도 조지에 대해 아무런 권한이 없다. 이 세 건의 합의 내용은 모두 제각각이고 우리는 서로의 상황을 비교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514, 이쯤에서 백년의 고독이나 연연세세나 오이디푸스의 비극 볼 때처럼 가계도를 그려볼 생각도 잠시 했지만, 사실 앤드루가 이렇게 한 번 더 명료하게 정리해놔서 그럴 필요도 없겠다, 그런 걸 그린다면 그냥 내 흥미거리로 이 가족을 소비하는 짓이겠구나 싶어서 말았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의 총량이 한정되어 있어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공급되어야 할 사랑을 고갈시킨다는 믿음에 갇혀 있다. 나는 사랑의 경쟁 모델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가산 모델만 인정한다. 가족과 이 책을 둘러싼 여정을 통해서 나는 사랑이 확대되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즉 어떤 사랑이든 늘어난다면 세상의 다른 사랑도 그만큼 강해진다는 사실을 배웠다. (515-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