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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지음 / 동녘 / 2017년 4월
평점 :
-20250820 홍승은.
월요일, 오랜만에 정신 없는 하루 보내고, 또 오랜만에 시각장애인 카페에 가서 컵빙수를 하나 시켜 먹었다. 시원하고, 달고, 그런 한 잔이면 힘이 나겠네 싶었다. 카페에 딸린 도서관에서 2017년에 나온 홍승은 에세이를 발견하고는 반가웠다. 이후의 에세이 세 권 정도 봤지만 맨처음 낸 책은 안 봤다.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를 5년 전에 좋게 읽었다. 밑줄도 아주 많이 그었었다. 그때 독후감을 찾아보니 시작은 이렇군.
나는 언제까지 읽는 사람으로 살까.
나는 쓰는 사람으로 살 수 있을까.
아직까지 읽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독후감도 쓰기니까 쓰는 사람이라고 하자.
달고 찬 음료? 디저트? 아이스크림? 셔벗? 빙수는 뭐라 분류할지 모르겠다. 네 가지 다 되는 것 같다. 하여간에 그걸 먹으면서 60페이지 정도 읽다 집에 돌아왔다. 서울전자도서관 뒤져보니 읽던 책이 있어서 마저 바로 읽을 수 있다! 하고 반가웠다.
젊어서 너무 잘 쓰다가 점점 아쉬워지는 작가들 떠나보내면 조금 슬펐다. 좋아하는 소설가, 시인, 에세이 작가의 초기작은 늘 미루다 나중에 보거나 안 봤던 것 같다. 뭐 그런데 또 어떨 때는 처음부터 뛰어나지 않던 걸 발견하면 좋기도 하다. 점점 나아지는 걸 보는 기분은 점점 나빠지는 걸 보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벌써 나온지 8년 전 책인데, 이 책 속에서 언급된 사람들, 자기 삶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하는 작가, 작가와 친밀하고 사랑하는(던) 사람들, 미래의 독자는 그 이후가 궁금하지만 남의 인생 흥밋거리로 찾아보는 건 또 망설여져서 그냥 궁금해하기만 한다.
어쩌면 이렇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조직의 굴레와 억압을 거부하고, 관습에 매이지 않고, 자본주의에 무릎 꿇지 않고, 내가 아는 옳음을 찾아서 그렇게 살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난 그냥 투덜투덜 욕이나 하면서 책이나 읽고 수학 문제나 풀면서 도망칠 방법만 찾았다. 그러다가 도주에 실패했다. 옷 사고, 신발 사고, 책 사고, 운동(이 책에 나온 운동은 아니다)하고, 치열하지 않아도, 자본주의의 나사 하나가 되어도 삶은 그럭저럭 굴러간다. 굴욕이래도 굴복했대도 살아는 진다. 좋은 세상을 위해 싸우고 할 말하고 계속 쓰겠다고 다짐하는 오래전 젊은이의 글을 그와중에 읽어 본다.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과 우려와 공격과 그만큼 많은 담론들이 오가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어디선가 여전히 책을 읽고 공부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 시절보다는 젠더 이슈들이 잘 다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주류 담론으로 자리 잡지 못했지만 어디에 아직 살아는 있겠지.
오늘은 인스타그램 디엠을 통해 저질러진 성폭력 사건을 접한다. 그 말을 날린 아이도 그 말을 전한 아이도 그 말의 당사자가 된 아이도 너무 어린데 그 말이 너무너무 혹독해서 아침부터 어지럽고 슬펐다. 혐오와 폭력은 아직도 일상에 있다. 그걸 아직도 자주 보면서 산다. 관료제는 사건을 축소하고 덮으려는 때가 많으니까 초조해진다. 계속 지켜보겠지만 무기력한 기분이다. 끔찍한 어린이들이 자라서 끔찍한 어른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럴 수 있으려면 뭐랑 싸워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람을 외로움과 소외감으로 죽게 하는 고독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비슷한 이유로 남을 따돌리고 배척하는 것도 조금씩 사람이 죽어가게 하는 거라고 그래서 그런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남의 얼굴이나 몸을 동의없이 함부로 사진찍으면 불법 촬영이고 범죄이고 또 그런 일이 발생하면 부모님께 알리고 벌점도 주고 심각한 경우에는 학교폭력으로 처벌도 할 수 있다고 겁을 주면서 사진첩의 사진들을 보는 앞에서 지우게 했다. 그렇지. 내가 싫었던 건 이런 환경이었지. 말로 많은 것을 해야 하는데 말은 말일 뿐이지. 차분하게 일들을 처리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차분한 척 해야 하는 것도 화가 난다. 사실 화는 충분히 낸다. 다 미쳤다고 욕도 한다. 나도 조금 미쳐있지만 더 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보고 이렇게 불편하라는 제목은 아니었을 텐데...흑흑흑
+밑줄 긋기
-여섯 번의 이사를 통해 배운 점. 창문을 통해 날씨와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게 당연하지 않다는 것, ‘역시 집이 최고’라는 말이 모두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 다른 누군가에게 내 불편한 자리를 떠넘기고 지금 내가 ‘잠시’ 편할 뿐이라는 것. 새로운 건물이 세워질 때 그 옆 낮은 건물이 걱정되는 것처럼, 몸으로 익힌 인식의 확장이었다.
-나는 내가 경험하고 겪은 부분에 한해서만 잘 느끼고 알 수 있을 뿐이고, 다른 상황은 분명 모를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내 입장에서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마땅히 그렇기 어려운 상황일 수 있다.
-나는 진보정당·마을공동체·사회적경제·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자신을 정의롭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을 경계한다. 그들은 손쉽게 인권과 평화를 외치지만, 여성이나 성소수자·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나 동물은 그 말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부차적인 존재라고 여기기 쉽다. 그들이 말하는 인권은 절대적이고 마땅한 개념일지 모르지만, ‘그’들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인권은 지금까지도 쟁취의 과정이다.
-한 시인을 만났다. 그는 세월호의 슬픔에 누구보다 가슴 절절한 시구를 뱉어내는 사람이었다. 시에서 느껴지는 진심에 감동해서 그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처음 마주한 그는 다짜고짜 ‘어린’ 내게 반말을 했고, 먹을 것 좀 사오라며 대뜸 카드를 내밀었다. 그 뒤로도 쭉 이어진 그의 무례한 말과 행동에 한 번 놀라고, 본 행사 때 진심 어린 표정으로 슬프게 시를 읽는 모습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잠깐 동안 마주한 두 얼굴이 너무 이질적이어서 한동안 우두커니 멍해진 정신을 다잡아야 했다. 그 뒤로는 그 시인의 책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저는 무언가를 공부하고 알아가는 건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화가 나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가담해왔던 세계를 직면하면, 나도 모르는 새 저질러왔던 폭력이 선명해지면서 자책과 후회·부끄러움이 밀려와요. 동시에 내가 폭력인지 모르고 당하고 지나쳐왔던 일이 선명해지면서 분노와 슬픔이 밀려오고요. 그렇게 복잡한 감정 속에서 상처받는 게 아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어떤 조건에서도 ‘정상’의 범위에서만 안주할 수 없는 현실이니까, 당장 상대가 앎을 삶으로 잇지 못한다고 해도 일단 알게끔 해주는 건 중요한 일 같아요. 침묵이 평화가 아니듯, 모른다고 폭력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어쩌면 사람들이 영웅에 열광하는 이유는 자신의 삶을 표현할 언어가 없거나, 표현할 방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누군가 내 마음 같은 목소리를 내줄 때, 나를 대변해준다는 위안과 고마움과 기대가 생기는 것 같다. ‘저 사람이라면 나를 대변해줄 거야. 내 마음처럼 싸워줄 거야’라는. 하지만 내 불편함을 가장 진실하게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으니, 상대를 향한 바람은 대부분 실망과 회의로 돌아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