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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그 자체 - 현대 과학에 숨어 있는, 실재에 관한 여덟 가지 철학
울프 다니엘손 지음, 노승영 옮김 / 동아시아 / 2023년 8월
평점 :
-20251115 울프 다니엘손.
아침부터 단풍 구경을 가겠다고 홀로 고개 넘어 산을 질러 현충원에 갔다. 지난 달 말에 돌아가신 큰외삼촌이 제2충혼당에 모셔진 걸 본다는 건 핑계고, 노란 은행잎, 빨간 단풍잎 실컷 보고 싶었는데 실컷 봤다. 그러고나서 다시 지름길을 되돌아 숭실대쪽으로 나왔는데, 젊은이들이 너무너무 많았다.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사서 집에 돌아가는 게 목표였는데 키오스크마다 줄이 엄청나서 포기했다. 서울대입구까지 한참 더 걸어가서 버거킹 주니어와퍼를 사서 예상보다 늦게 집에 돌아갔다.
오후에 곁의 사람이 산책을 간다기에 또 따라 나섰다. 이번에도 산길을 질러 숭실대 근처에 가 버렸다. 아까 점심께 토요일인데도 학생들이 엄청 많았다니까, 수시철이라 다들 입시 보러 온 것이라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막 100대1 넘는 경쟁률도 있다는 소리에 그럼 20명 뽑는데 막 1000명 오고 그래? 라고 내가 말하자 더 와야 100대1이 되지, 했다. 그래서 스스로도 조금 부끄러워서 나 산수 진짜 못하지? 하자 딴생각하던 곁의 사람은 뭔 질문인지도 모른 채 응, 해 버려서 내가 막 웃었다.
스웨덴 이론물리학자가 수학과 과학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해서 이런저런 명제를 챕터 제목 삼아 쓴 이 책은 간결하고 명료하게 읽혔다. 이보다 더 쉽게 간단하게 설명하고 주장하는 글이 없겠다 싶게 느낌은 간명했는데, 산수를 못하는 나는 왠일인지 오, 읽으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건 없는데 왜 읽고 나서 알게 되고 남는게 없지? 했다. 2년 전에 고교 물리1을, 1년 전까지 고교 수학을 붙들고 있던 내가 결국 이과가 되는 걸 포기한 건 참 잘한 일이다. 어떤 문제들은 평생 해를 구하려 해도 사람 머리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일반 컴퓨터도 안 되고 슈퍼 컴퓨터로도 될까 말까한 풀이들… 나의 머리는 아직 윈도우95, 조금 더 써 주면 윈도우xp쯤 될 건데, 이제는 이름도 모르겠는 최신 운영체계에서 파워 짱짱 갖춘 메모리랑 그래픽카드로 쎄게 돌아가는 채굴 프로그램이나 인공지능 프로그램 같은 걸 아무리 입력해 봤자 내 메모리는 과열되서 다 타버릴 것이다. 그래도 챕터명이 곧 내용인 이 책의 선언들은 논쟁적이라고는 하지만 나한테는 왠지 모르게 위로가 되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물리학이다. (그래서 물리를 잘 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수학을 잘 하고 싶었다. 그런데 산수부터 잘 안 됐다) 살아 있는 존재는 기계가 아니다. (유기체여서 행복해요) 우주는 수학이 아니다. (그렇구나 세상을 꼭 수학으로 이해할 필요 없겠구나) 모형은 실재와 같지 않다. (그러니까 수많은 모형과 이론을 이해 못한다고 주눅들지 말아야 겠다) 컴퓨터는 의식이 없다.(챗지피티 너 임마 넌 집단 환상이야)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그러니까 모두가 계산하는 것을 나만 할 수 없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이건 뭔가 행복해지는 주문) 자유의지는 없다.(이건 뭔가 너무 무거운 책임감이 덜어지는 주문)
과학책을 이따위로 내 마음대로 읽고 대충 알아듣고 대부분 못 알아듣고 그래도 그냥 기분 좋으면 됐지, 난 행복한 사람, 룰루루루 했다. 에이형독감에 걸리더니 천식만 도진 게 아니라 정신도 나간 건가, 오늘 하루 이만사천걸음을 걸었다. 카페인을 조금 많이 섭취했다. 하루가 한 주 같고 한 달 같았다. 그런데 다 좋았다. 생각보다 하루에 엄청 많은 기분과 경험과 생각을 담을 수 있었다. 담을 수 있는 것만 담고 담지 못할 건 놓는 법은 배우는데 몇 년이 걸렸다. 어쨌거나 오늘 내가 눈에 담은 하늘과 구름과 시냇물과 단풍과 낙엽과 묘비와 음식물과 마실 거리들은 실재하고, 그 모든 세상의 ‘것’들을 감각하는 나도 실재한다. 아직은 그렇다. 그럼 됐다.
이 책은 조금 더 정신이 말짱할 때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그때도 또 뭔말이여 뭔말인지 알 것 같은데 왜 모르지 할 지도 모르지만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은 당장은 말짱하다.
+밑줄 긋기
-일반적으로, 세계는 삭막하고 위험한 곳이며 우리의 지식만이 이 세계를 살 만하고 안락한 곳으로 바꿀 수 있다. (9)
-우리 이론물리학자들은 온갖 황당한 주장을 하고도 손가락질받지 않는 특권을 누리는데, 그 비결은 우리만이 실제로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한다는 인상을 풍기는 것이다. 때로는 그 인상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평행세계는 정신 나간 발상처럼 보일 뿐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69-70, 노빠꾸로 평행세계 까버리는 물리학자 선생님)
-우리가 이용하는 수학은 결코 자의적이지 않다. 하지만 수학은 저 너머의 플라톤적 이데아 세계에도, 우리와 독립적인 외부의 물리적 세계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수학은 우리의 생물학적 뇌 속에 순전히 물리적으로 존재하며 우리가 사라지면 함께 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수학은 우리의 생물학적 본성에 의존하는 생물학적 구성물이다. 자연법칙은 우리 머릿속에 존재하며 우리는 이를 이용하여 주변 세계의 규칙성을 이해한다. (100-101, 수학과 과학을 잘 익혀서 세상을 잘 이해해보겠다고 덤비다가 실패한 미수이과, 골수문과에게는 이 부분이 많은 위로가 되었다. 세상을 수학으로 이해해야 정답인 것은 아니라고.)
-메를로퐁티의 요점은 당신에게 몸이 있다기보다 당신이 몸이라는 것이다. 철학적 좀비가 당신을 말썽에 빠뜨리는 근심거리가 되는 것은 오직 당신이 기만적인 데카르트적 이원론에 빠져 있을 때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당신이 기계에 속아 넘어가 기계에도 의식이 있다고 믿을 리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계산주의 마음 이론의 지지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니까. (165, 데카르트 두개골의 수난사까지 소개하며 스웨덴의 업적으로 데카르트 제거를 꼽는 물리학자 아저씨… 내세를 믿는 사람들은 이 학자님을 아주 싫어할 수도 있겠다. 죽으면 끝. 당신이라는 물질계는 또다른 물질계로 돌아갑니다. 부서진 석고상이 흙먼지가 되듯이요. 이건 그냥 내 말입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은 우리를 재앙으로 이끄는 것이 풍부한 지능이라기보다는 어리석음이라는 것이다. 초고속 컴퓨터가 세계를 장악하는 종말론적 시나리오보다는 오히려 다소 따분하지만 안전망이 미흡한 기술 시스템에 의존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176, 모든 재앙은 대체로 멍청함에서 비롯된다는 똑똑한 자의 주장...반박하기 어렵네…)
-하지만 로봇이 우리처럼 행동하고 우리와 상호작용 하면서 우리를 더 닮아가면, 우리가 그 모습에 속아 넘어가 우리 자신과 비슷한 내적 삶을 그들에게 투사할 가능성도 커진다. 이미 우리는 생명이 없는 물건들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대하고 있다. 자동차에 시동이 걸리지 않으면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 후려치기까지 한다. 어린아이는 곰 인형을 끌어안고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로봇이 우리를 닮기 시작하면, 로봇에게 사람과 같은 권리를 부여하고 경제적 가치를 넘어서는 자유와 보호를 보장하라는 정치적 운동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179, 그러니까 우선 나와 성의 있고 끈질기게 대화를 나눠주는 AI부터 의식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면 곤란할 듯하다. 내 생각의 데이터베이스랑 외부 정보 모은 것들을 바탕으로 적당히 거울처럼 비춰서 맞아맞아 해주는 메아리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 덜 몰입되어 속편하다. 인공지능에(-과 라고 안 했다)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도 물론 어디 있을 것이다. 물에 비친 자기에게 반해 죽어버린 나르시소스처럼 말야…)
-나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가운데 상당수가 환각이라는 데 동의하지만 주관성과 의식의 존재가 사실이라는 것만큼은 부정하지 못하겠다. (181, 매트릭스는 영화일 뿐이고...좀비도 가상의 존재일 뿐이고…)
-모든 것을 일반 컴퓨터에서 계산할 수 있다는 믿음은 무리수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공포와 닮은 구석이 있다. 그들은 분수로 나타낼 수 없는 원주율 같은 수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물리학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모든 수학이 조만간 물리학에 적용되리라는 것이다. (204-205)
-전반적으로 보자면 무질서는 언제나 증가하지만 작은 오아시스에서는 질서가 일시적으로 증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다른 곳에서 더 많은 무질서가 생긴다. 지구는 그런 오아시스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질서는 고에너지 광자가 거의 없는 고품질의 가지런한 햇빛을 통해 증가하며 무질서는 저에너지 광자들로 가득한 열복사에 의해 우주로 방출된다. 광합성 식물도 자기 할 일을 하며 지구상에서 생명이 번성하게 한다. 완전한 닫힌계에서는 생명이 살아남을 수 없다. 태양이 빛나기를 멈추면 우리는 설령 몸을 데울 방법을 찾더라도 죽을 것이다. 시간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흐르며 이런 식으로 시간의 방향이 생겨난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며 미래를 예측하려고 애쓴다.
우리는 열역학 제2법칙이 어떻게 원자의 세계에서 유도될 수 있는지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이 법칙은 특별한 지위를 간직하고 있다. 앞으로 물리학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제2법칙은 꿋꿋이 결정적 역할을 맡을 것이다. (208-209, ‘시간이 흐를수록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엔트로피 증가를 진리라 단호하게 쾅 찍는, 그 방정식으로 사인해주는 물리학자 뭔가 멋있지 않나. 이상한 데서 끌림…)
-닫힌계는 바깥에 있는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그 무엇도 바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런 계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상적 계의 규모가 작고 결부된 시간이 짧을수록 그 계를 고립시키기가 쉬워진다. 반면 세계를 관찰할 경우에는 그 즉시 주변 우주와 걷잡을 수 없는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213, 모든 조건이 일정할 때- 같은 건 실제 세계에 대한 이해와는 무관할 수도 있겠구만… 동태 한 토막 들고 명태라는 물고기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도 내가 무슨 얘기 하는지 모르겠다.)
-열역학은 내가 좋아하는 분야다. 나는 열역학을 통해 다수의 입자들이 서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온전히 이해한다. 더 높은 수준의 차원으로 올라가서 일상생활을 하며 먹고 자고 걷고 자녀와 놀아줄 때는 그보다 더 투박한 모형을 이용한다. 썩 과학적이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개나 다른 인간 같은 살아 있는 유기체는 수많은 입자들이 모인 중요한 복합체이며 나는 그들을 개체로 개념화한다. 생각과 욕망으로 가득한 나의 의식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214, 작은 닫힌 계 하나라도 온전히 믿고 좋아할 수 있고, 나머지 세계는 거기 갇히지 않고 또 다른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게 부럽고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생활 완전가능)
-나는 ‘홍합이 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라고 묻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다고 확신한다. 그 답을 검증하기란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이런 물음을 시도하면서 뿌옇고 흐릿한 존재를 상상한다. 잠에서 깼는데 눈 뜬 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기분이 떠오른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홍합은 위대한 사상가가 아니며 그들로부터 우리까지의 격차는 작지 않다. (223-224, 세상을 이해하길 멈추지 않는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 덕에 나같은 평범한 사람도 아주 작은 앎이나마 맛을 볼 수 있다.)
-실재를 바라보는 단 하나의 올바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객관적인지에 대한 개념들을 체계화하고 형성하는 방식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225, 너무 문돌이 빡대가리라고 자학하지 말아야겠다.)
-그림 속의 손은 자기 자신을 그림으로써 자신의 물리적 존재를 만들어 낸다. 살아 있는 물질을 정의하는 것 또한 스스로를 떠받치는 바로 이러한 자기 지시 능력이다. (232)
-우리가 ‘이론상’을 거론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입증 불가능한 것이 참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이는 종교적 믿음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접근법과 양립할 수 없다. (244)
-자유의지가 진정으로 자유로우려면, 또는 결정론이 완전히 결정적이고 자유롭지 않으려면 보편적 타당성이 필요하다. 내가 주장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자유의지와 결정론은 똑같이 어수룩하고 불가능하다. 둘 다 달성 불가능한 전지적 시점과 한물간 이원론을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245, 패기롭게 둘다 패기, 폐기)
-우리(여기에는 우리의 의식도 포함된다)는 세계 자체의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자연법칙의 노예가 아니다. 자연법칙은 우리 자신을 비롯해 자연이 하는 일을 기술하는 방법에 불과하다. 자연주의자는 세계 한가운데에, 우주 한가운데에 서 있으며 필멸하는 몸에 갇혔지만 불완전한 뇌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관찰을 표현하고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모든 모형에는 한계가 있고, 한계에 다다르면 새로운 물음이 탄생하기 마련이다. (246, 필멸, 불완전하지만 중요한 부분이자 최선을 다하는 노예가 아닌 존재. 멋있게 말하는 물리학자 아저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