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 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 밀란 쿤데라 전집 15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20230723 밀란 쿤데라.


3년 전 소설 강좌 첫 시간, 자기 소개 하는 자리에서 선생님은 수강생들에게 좋아하는 작가를 물어 보았다. 나는 김금희, 그리고 밀란 쿤데라요, 했고, 선생님은 극과 극의 작가를 좋아하시네요, 했다. 그 말이 조금 갸우뚱 했다. 김금희 소설집들 초판 표지 그림이나 제목이 다 말랑 달달한 느낌으로다가 책 집어들 때 착각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긴 하다. 막상 읽고 나면 이게 뭐여, 내가 뭘 먹은 거여, 달콤상큼한 것 기대한 사람들에게 인생의 진한, 떫은 맛, 약간 씁쓰레한 맛, 거기에 조금 긴가민가한 단맛을 쳐주지 김금희는. 나한테는 블랙유머로 읽히는 부분도 많고. 그러면 밀란 쿤데라랑 꼭 극점이라 하기도 그렇다. 그런 걸 알면서도 이번에 나온 산문집 ‘식물적 낙관’은 차마 사지도 못하고 있다. 식물이나, 낙관이나, 나한테 다 아득한 낱말들이다. 제목에 속지 말자! 해놓고선 또다른 기대를 못하는 건, 몇 년 전 인스타그램에서 가끔 훔쳐봤던 김금희의 식집사 노릇과 뭔가 평온해 보이는 일상이 다 일 것 같아서? 소설가는 좋은 문장은 소설에 써 먹으려고 짜게 다 아껴두고 산문집에는 찌끄래기만 쓴다는, 기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선입관 때문에? ㅋㅋㅋ
왜 밀란 쿤데라 이야기 하려다가 김금희가 길어짐… 하여간에 전작 했고 커튼만 남겨놨어요, 했더니 선생님은 계속 남겨두세요 ㅎㅎ 했다.

엄마는 십 몇 년 전 사이버대학 문창과에 들어가서 수업 중 강독으로 커튼을 먼저 보셨다. 펼쳐보니 밑줄이 한 가득…(책 한 권 다 밑줄임…) 나는 밑줄 그은 책 안 좋아하는데 이젠 너그러운 마음으로 신경 안 쓰고 읽기로 한다. 나는 십삼 년이나 늦었네요 어머니. 그래도 미뤄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 나는 ‘안나 카레니나’, ‘성’, ‘마담 보바리’,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정도는 읽고 왔습죠! 쿤데라의 산문집 ‘소설의 기술’, ‘배신당한 유언들’, ‘만남’도 읽을 땐 뭔말이여...하는 게 많았지만 ’커튼‘에서 이전 산문집과 비슷한 작품 인용이나 서술도 (기억 안 나지만 하여간에 읽어본 기분이야! 하면 그런 거지) 많아서 좋았다.

커튼의 글들은 읽기 좋게 짤뚝짤뚝 잘 잘라 놨고, 할 말도 명료하고, 인용한 작품들도 읽었으면 읽은대로, 안 읽었으면 안 읽은대로, 아아, 이 말 할라고 갖다 붙였군요 끄덕끄덕 하게 써 놓았다. 한편으론 아...할배...이렇게나 더 읽어야 합니까… 할배 때문에 갖추기만 하고 안 읽은 책도 많습니다만…. 그렇게나 칭송하시면 더 미루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정리하는 할배 소설 강의 참고 문헌, 내가 (언젠가는) 볼 책-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라블레)-할배 산문집 마다 마르고 닳도록 인용되고 칭송하는 책이라 거의 십 년 전에 전자책 갖춰두고는 꾸역꾸역 매번 시도하다 멈춤 ㅋㅋㅋ 이젠 주석 다 제끼고 휙휙 읽어 볼랍니다.

’트리스트럼 섄디‘(스턴, 내가 가진 건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이야기)-이 책 전자책 왜 갖췄지...했는데 커튼 보니까 아 할배짓이었네… 온라인 서점을 둘러싼 소설을 쓴 적 있는데, 거기 남주인공 닉네임이 토비였다. ㅋㅋㅋㅋ 읽지도 않은 책 속 토비 삼촌에서 이름만 빌려옴… 뭐 그랬다고… 3년 만에 내 소설 꺼내 보니 꿀잼이었다… (자아도취) 이 책 두께가 미쳤던데 그래도 꾸역꾸역 읽어봐야지… 일단 칠조어론 먼저 마치고...ㅋㅋㅋ

‘망가진 세계’(말라파르테)-이건 커튼에는 안 나오지만 다른 산문집에서 보고 갖춰둠… 같은 저자의 소설 아닌 ‘쿠데타의 기술’ 이거도 챙겨뒀는데 읽고 싶음… 뭔가 부제만 보면 군주론 느낌인데…

‘감정 교육’(플로베르)-보바리 부인 잘 읽었는데 플로베르의 다른 책 읽을 생각을 안 하다니...이거 심지어 전자책이랑 종이책 다 있음… 이 책에서 꽤 많이 인용되어서 미룰 수 없겠다…

‘위험한 관계’(드 라클로)-코 앞에 꽂혀 있는데, 애들 영화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이랑 어른 영화 ’스캔들‘은 다 봐 놓고 원작 소설은 왜 아직도…

‘소송’(카프카)-배신당한 유언들 보면서 브로트 이새끼...하면서 사 놓고는 안 읽고 너무 오래 지났다. ’성‘은 먼저 봤는데 이거 미완작이더라… ’소송‘은 결말이 있지 않을까… 관료제 관련해서 이런저런 작품 언급하는 거 보고 되게 할말 많았다. 친구 하나가 공무원 느지막히 임용되어서 딴에는 십 년 넘게 관료제 몸 담은 놈인 내가 걱정반 짠함반 이런저런 오지랖도 떨고, 야, 네가 직접 겪으면 또 카프카 싸다구 치는 뭐 끝내주는 게 나오지 않겠냐? 그러면서 토닥토닥했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정작 반 년 쯤 나랏밥 먹고는 에퉤퉤 이게 사람 사는 거냐, 하고 미련 없이 빛의 속도로 관둬 버렸다. 내게 그 사건은 굉장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일단 발 들였으면 정년까지 노예 아닌가...했는데 아 저렇게 쉽게 관둘 수 있는 거였군. 내 인생관이나 직업관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그래서 뭐 카프카 재림은 개뿔이고 공무원 도망친다는 놈들이 겨우 생각해낸 것은 수능 봐서 대학 다시 가기 ㅋㅋㅋㅋ 제도 문제 삼으면서 제도권 교육 체제 따라 현대판 과거 시험 준비하기냐 바보들아...그나마도 나는 혈전과 함께 중도이탈(?)포기(?) 뭐 그런 중...친구야 힘내렴...카프카가 못 될 바엔 의치한약수 가야지???ㅋㅋㅋ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프루스트)-이웃님의 영업으로 교보문고에서 올재클래식 단돈 2만9천원에 전집을 갖추고는 여태 1권 마들렌 가루 섞인 차 마시는 부분 쫌 지나서 까지 읽고 몇 년 째 멈춰 있다...박상륭 전집 다 보고, 잃시찾 전권 다 보고, 그때 혈전 다 녹으면 마 수학해라, 하는 친구의 간언도 있었기에...아 그럴까? ㅋㅋㅋ 그럼 오십 다 되서 수능 보는 거냐...

‘몽유병자들’(브로흐)-엄마는 이 책도 수업 들으면서 강독으로 다 읽은 모양인데 뭔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했고...그래서 가장 나중에 읽을 생각이다…

‘율리시스’(조이스)-아 이게 가장 나중이 될 수도...


여기까지는 갖춰져 있으니 집에 있는 거나 먼저 읽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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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책은 위에 있는 책들 다섯 권 이상 읽은 후 구매할 것!!!!!

’업둥이 톰 존스 이야기‘(필딩)-이 책에도 자주 나오고, 테레자가 토마스 만을 비롯해 필딩까지 읽었다, 하는데 나는 토마스 만은 아직 모르겠고 이거는 할배가 읽어보래잖아… 테레자도 읽었대잖아...

‘특성 없는 남자’(무질)-이 책도 많이 인용됨, 근데 너무 두꺼운데? 마침 올해 새 번역판이 나왔나 보다….

‘페르디두르케’, ‘포르노그라피아’(곰브로비치)-쿤데라 친구가 야 타임오버, 꺼져, 한 책이니 젊은이인 제가 대신 읽어보겠습니다…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디드로)-쿤데라가 희곡으로 각색한 건 봤는데, 자꾸 언급하니 원작도 읽어야 되나 싶습니다...



+밑줄 긋기(결국엔 나도 책 한 권을 베끼다시피 했구만…)
-내가 말했다. “페르디두르케를 읽었어야지! 아니면 포르노그라피아를 읽든가!”
그러자 그 친구가 우울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친구여, 내 앞에 펼쳐진 인생은 짧아요. 내가 당신 작가를 위해 소비한 시간의 분량이 바닥나 버렸어요.” (135-136)

-내가 보기에 참 똑똑하고 정중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과 있을 때면 나는 불편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나쁘게 보이지 않고, 시니컬하게 비춰지지 않으며, 그냥 아주 가볍게 던진 말 한마디로 그들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서 내가 하는 말을 일일이 다 신경 써 가려야 하니까. 그런 사람들은 희극을 참아 내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근엄한 척하는 태도가 그들에게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을 아니까. 나 역시 어쩔 수 없는 것이, 그들을 미워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들을 멀리 피하게 된다. 나는 요릭 목사처럼 끝나고 싶지 않으니까. (148-149)

-고통스러운 경험들 끝에 크레온은, 국가를 책임지는 자들은 사사로운 감정을 억제할 의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를 너무나도 확신한 탓에, 그는 그에 맞서 사회의 의무만큼이나 개인의 정당한 의무를 옹호하는 안티고네와 목숨을 건 싸움을 시작한다. 그가 완강하게 밀고 나감으로써 그녀는 죽고, 그 죄책감에 짓눌린 그는 ’두 번 다시 내일을 맞이하지 않기를‘ 바란다. ’안티고네‘는 비극에 대한 훌륭한 고찰을 할 수 있도록 헤겔에게 영감을 주었다. 두 주인공은 서로 대립한다. 각각은 부분적이고 상대적이지만 그 자체로만 보면 전적으로 옳은 진리에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 각각은 진리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지만, 진리의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상대편을 완전히 파괴해야만 한다. 이처럼 두 주인공 모두 정의로우면서 동시에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헤겔은 말한다. 죄를 짓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비극적 인물들의 영예가 된다라고. 죄책감을 양심 깊이 느낌으로써 미래의 화해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인간의 크나큰 싸움을 선악의 다툼으로 보는 고지식한 해석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 이 싸움을 비극의 조명 아래서 이해하는 것, 이것은 정신이 이룬 엄청난 성과였다. 이 성과로 인해 인간이 따르는 진리의 숙명적 상대성이 드러났다. 그리고 적을 정당하게 평가할 필요를 고통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153-154)

-사회 현상의 실존적 영향력은 그것이 팽창할 때가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미약한 상태인 초창기에 가장 날카롭게 인지될 수 있다. 니체는, 16세기에 교회의 타락이 가장 덜한 곳은 독일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바로 그곳에서 종교 개혁이 일어났음을 지적한다. 오직 “타락의 초기에만 타락을 참을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카프카 시대의 관료주의는 오늘날과 비교할 때 순진한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카프카는 관료주의의 끔찍함을 간파했고 그 후로 관료주의는 일상적이 되어 이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168)

-그렇다고 해서 그(’감정교육‘의 세네칼)가 옷을 바꿔 입는데 익숙한 기회주의자라는 평가는 정당하지 않다. 혁명가이든 반혁명가이든 그는 언제나 같은 사람이니까.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플로베르의 대단한 발견인데) 정치적 태도의 근거가 되는 것은 사상(너무나 연약하고 어렴풋한 그것!)이 아니라 덜 이성적이고 더 견고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173)

-플로베르에게서 어리석음은 그와 다르다. 그것은 예외도, 우연도, 결점도 아니다. 말하자면 교육으로 고칠 수 있는, 지성의 어떤 분자가 부족해서 생기는 양적인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고칠 수 없다. 천재나 바보나 모든 사람의 생각 속 어디에나 존재하는 ’인간 본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분인 것이다. (175)

-그(슈티프터의 ’늦여름‘ 속 노귀족 라자흐)가 관료주의와 결별한 것은 정치적, 철학적 신념의 결과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 관리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의 결과다. 관리란 무엇인가? 라자흐는 하인리히에게 그것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아는 한, 관료주의에 대한 최초의 (게다가 훌륭한) ‘현상학적’ 기술이다.
행정이 확대, 확장됨에 따라 점점 많은 관리들이 고용되어야 했고 그들 중에는 필연적으로 고약한, 혹은 아주 고약한 사람들이 있었다. 따라서 관리들의 고르지 않은 역량 때문에 필요한 작업들이 번형되거나 축소되지 않고 잘 수행되도록 하는 시스템 개발이 시급했다. “리자흐가 계속했다. ‘내 생각을 분명히 하자면,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교체하는 부품 교환이 있을지라도 제대로 작동하는 이상적인 시계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네. 그런 시계는 물론 상상할 수도 없지. 하지만 행정은 정확히 이런 형태 아래서만 존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겪은 변화에 비추어 사라져 버리거나 해야 하지.” 따라서 관리는 자기가 담당하는 문제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는 옆 사무실에서 어떤 일이 진행되는지도 모르는 채, 심지어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다양한 작업들을 열성적으로 수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라자흐는 관료주의를 비난하지 않는다. 단지 있는 그대로, 그가 왜 그 일에 인생을 바칠 수 없었는지를 설명할 뿐이다. 그가 관리가 될 수 없었던 것은 자기의 지평선 너머에 있는 목표에 복종하고 그것을 위해 일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상황 그 자체에 대한 존중‘이 너무 커서 협상을 할 때면 상급자들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 그 자체가 요구하는 것‘을 지키곤 했던 것이다.
라자하는 실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 목적을 이해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되는 삶을 갈망한다. 이름과 직업과 아이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만 만나는 삶. 아침, 정오, 태양, 비, 폭풍우, 밤과 같이 시간이 늘 감지되며 그 구체적인 모습 속에 향유되는 삶.
그와 관료주의의 결별은 인간과 현대 세계와의 기념할 만한 결별 중 하나다. 비더마이어 풍의 이 낯설고 기이한 소설 속의 목가적 분위기에 적합한, 평화롭고도 근본적인 결별이다.

베버가 관료제 현상에 대해 사회학적, 역사적, 정치적으로 분석했다면 슈티프터는 다른 문제를 제기했다. 관료화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과연 인간에게 엄밀히 말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으로 인해 인간 존재는 어떻게 변화되는가?
’늦여름 이후 60여 년이 지나서, 또 다른 중부 유럽인인 카프카가 ‘성’을 쓴다. 슈티프터에게 성과 마을이라는 세상은, 늙은 리자흐가 그 엄청난 관리 일을 피해서 이웃과 동물, 나무, ‘그 자체인 것’과 더불어 살기 위해 도피했던 오아시스를 의미했다. 슈티프터(그리고 그의 제자들)의 다른 많은 산문의 배경이 되기도 한 이 세상은 중부 유럽에서 목가적이고 이상적인 삶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슈티프터의 독자인 카프카가 평화로운 마을과 성의 세계에 사무실과 관리들의 군대와 서류 사태를 침입시킨다. 잔인하게도 그는 관료화의 전적인 승리라는 정반대의 의미를 성과 마을에 부여함으로써 반관료적 목가의 신성한 상징을 침범한다. (182-185)

-시간의 개념.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대립할 때는 동등한 시간 두 개가 대립한다. 덧없는 인생의 제한된 시간 두 개.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사람 대 사람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행정과 맞닥뜨린다. 젊음도, 노화도, 피곤도, 죽음도 모르는 존재. 인간의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 인간과 행정은 서로 다른 시간을 산다. … 소송은 길고 인생은 짧다. 이 이야기는 카프카의 ‘소송’에 나오는 상인 블로크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소송은 아무런 판결 없이 5년 반 동안 질질 끌려다닌다. 그사이에 그는 사업을 포기해야 했다. “소송을 위해서 뭔가 하려면 다른 것은 전혀 신경쓸 수 없기” 때문이다. 측량기사 K를 짓누르는 것은 잔인성이 아니라 성의 비인간적 시간이다. 인간은 면담을 요청하고 성은 그것을 뒤로 미룬다. 소송은 길어지고 삶은 끝이 난다.

이 싸움의 끝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승리? 가끔은 그렇다. 그런데 승리란 무엇인가? 막스 브로트에 따르면 카프카는 ‘성’의 마지막을 이렇게 그렸다고 한다. 그 모든 소동 후에 K는 지쳐서 죽는다. 임종의 침상에 누워 있을 때 (브로트를 인용하자면) “비록 마을의 시민권은 없지만, 몇몇 세부 사항을 존중해 거기서 살고 일하는 것은 허락한다는 결정이 성에서 내려온다.”
(188-190)

-얼마 후 나는 시오랑이 서른여덟 살 되던 1949년에 쓴 글을 읽었다. “나는 나의 과거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다른 사람의 삶을 떠올리는 것 같다. 나는 이 다른 사람을 모른다. ‘나 자신’의 전 존재는 옛날 그 다른 사람에게서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다른 곳에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렇게 고백한다. “그 당시 내 모든 망상을 다시 생각할 때면 모르는 사람의 강벽관념을 연구하는 것만 같은데 그 모르는 사람이 나였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경악한다.”
이 글에서 흥미로운 것은 현재의 ‘나’와 예전의 ‘나’사이에 아무런 연관성도 찾지 못하고 정체성의 수수께끼 앞에서 경악하는 그 사람의 놀람이다. 이 놀람은 진실한 것일까? 물론 그렇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놀람을 일상적인 모습으로 경험한다. 당신은 그 철학(종교, 예술, 정치) 사조를 어떻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 혹은 (더 진부하게) 그토록 별 볼일 없는 여자(그토록 멍청한 남자)와 어떻게 사랑에 빠질 수 있었는가? 대개 사람들의 젊음은 재빨리 지나가고 젊은 날의 방황은 흔적도 없이 증발하지만, 시오랑의 젊음은 화석이 되었다. 우리는 우스꽝스러운 연인과 파시즘에 대해서 똑같이 관대한 미소로 비웃을 수 없으니까.

젊은 시절에 대한 시오랑의 격노는 분명한 무언가를 보여준다. 즉 출생에서 죽음 사이를 잇는 선 위에 관측소를 세운다면 각각의 관측소에서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멈춰 있는 사람의 태도도 변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사람의 나이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정말이지 이것은 분명하다. 아,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나 처음에는 오직 이데올로기적인 거짓 증거들만 눈에 보인다. 실존적 증거들은 명백한 것일수록 덜 드러나 보인다. 삶의 나이는 커튼 뒤에 숨어 있다. (192-194)

-이(서정시)와 반대로 소설은 망각에 직면하여 별 힘을 못 쓰는 견고하지 못한 빈약한 성이다. 만일 내가 스무 쪽을 읽는 데 한 시간이 걸린다면 사백 쪽 분량의 소설을 읽으려면 스무 시간이 걸릴 것이니, 그럼 보자, 일주일이 걸리는 셈이다. 일주일 내내 소설책만 읽을 정도로 한가한 사람은 거의 없다. (나?ㅋㅋㅋ) 그러니 책을 읽는 중 며칠은 책을 펴 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날이 있게 마련 인데, 바로 그 공백의 시간에 망각이 곧장 껴들어 와 작업을 개시한다. 그렇다고 망각이 꼭 독서를 하지 않는 공백의 시간에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망각은 잠시도 쉬지 않고 책을 읽는 와중에도 끼어든다. 책장을 넘기면서도 나는 방금 읽은 부분을 그새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다음에 나올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이전 이야기의 일종의 개요만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고, 세밀한 묘사, 자잘한 관찰, 경탄해 마지않는 형식들은 이미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다. 수년이 지난 어느 날 한 친구에게 이 소설에 대해서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독서로 얻은 몇몇 기억의 파편들로 각자 아주 다른 책 두 권을 만들어 버리고 만 우리 자신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205, “어차피 우리 나이쯤 되면, 처음부터 읽어도 앞의 내용 따위 기억나지 않는다고!” -고슬링, ‘익명의 독서중독자들2’)

-나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내 작은 나라는 독립의 마지막 흔적마저도 제거되어 거대한 낯선 세계에 영원히 먹혀 버린 그런 나라였다. 나는 내 나라가 멸망해 가는 초기의 모습을 목격했다고 믿고 있었다. 물론 그 당시에 대한 내 평가는 틀렸다. 하지만 내가 저지른 오류에도 불구하고(아니, 오히려 그 오류 덕분에) 아주 큰 경험이 내 존재론적 기억 안에 아로새겨졌다. 그때부터 나는 그 어떠한 프랑스인도, 그 어떠한 미국인도 알 수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한 사람이 조국의 멸망을 겪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213)

-체코어는 자국어인 양 사용되는 독일어 옆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 체코인은 모두 2개 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기에 태어나느냐 아니면 태어나지 않느냐, 존재하느냐 아니면 존재하지 않느냐라는 선택을 할 수 있었던 독특한 상황이었다. (214, 이전부터 궁금했던 것, 카프카도 릴케도 체코 출신이라는데, 왜 독일어 문학일까? 그 질문을 어느 정도 해소해줬다. 쫓겨난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체코어일까, 프랑스어일까, 그것도 궁금했는데, 이방인으로서 프랑스어문학 일부를 담당하고 계셨다는 걸 나중에 알았죠…정작 체코 사람들은 되게 나중에 쿤데라 작품들을 체코어로 읽었다고...)

-이 소설(푸엔테스의 ’우리의 땅‘)을 말하다 보니, 카지미에시 브란디스의 ’제3의 앙리‘에 나오는 정말 웃긴 구절이 생각난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한 폴란드 망명자가 자기 나라의 문학사를 가르친다. 아무도 폴란드 문학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는 장난삼아 세상에 나온 적 없는 작가들과 작품들로 구성된 가상의 문학사를 만들어 낸다. 대학 학기가 끝나 갈 무렵에 그는 이 상상의 역사와 실제 역사를 구분하는 본질적 기준이 전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는 이상하게도 실망하게 된다. 그는 일어날 수 없었을 만한 사건은 아무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친 장난은 폴란드 문학의 의미와 정수를 충실하게 반영했다. (225-226)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기적의 유효 기간은 짧다. 비상했다가 어느 순간에는 추락하는 것이다. 나는 서글픈 마음에 사로잡혀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예술이 절대로 말해진 적 없는 것을 찾기를 그만 두고 다시 유순해지는 날이 오겠지. 그날이 오면 예술은 반복을 아름답게 만들고 개인이 기쁜 마음으로 순순히 획일적인 존재가 되도록 돕기를 요구하는 집단의 삶에 봉사할 테지.
왜냐하면 예술의 역사는 덧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의 지저귐은 영원하다.
(232, 비관주의냐 디스토피아냐… 18년 전의 예언은 어느 정도 유효했고... 그런데 덧없는 게 영원하면 무엇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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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07-23 1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이번 권에서 저 장면 그리고 사자가 가짜뉴스 관련 외치는게 젤 재밌었어요

반유행열반인 2023-07-23 18:48   좋아요 0 | URL
그쵸 ㅎㅎㅎ 익독중은 뉴스 볼 시간도 드라마 볼 시간도 없지요 ㅎㅎ저는 신곡 안 좋아하면서도 신곡 나오는 부분이 하이라이트 ㅋㅋ

새파랑 2023-07-24 0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개해주신 책들은 다 좋다는거죠? ㅋ 저중에 읽은건 별로 없네요 ㅡㅡ

반유행열반인 2023-07-24 07:55   좋아요 2 | URL
다 좋다는 건 아니죠 제가 한 권도 안 봤으니까 모르죠 ㅋㅋㅋ 밀란쿤데라가 소설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자주 언급한 책들입니다. 다들 이 정도는 봤지?? 하고 ㅋㅋㅋ골드문트 이웃님께서는 한 권 빼고 이 책들 다 보셨다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은오 2023-07-24 2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그럼 이제 쿤데라 저작 다 읽으신거네요?! 저는 농담, 참존가, 소설의기술 이렇게만 읽었어요. 참존가는 최근에 읽었고 농담도 소설이니 줄거리는 대충 기억 나는데 소설의 기술은 하나도 기억 안나네..... 유열님 최애는 참존가인가요? 다음으로 좋았던 저작들도 궁금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7-24 23:14   좋아요 1 | URL
소설은 여러 번 본게 참존가(근데 유수님이 이렇게 부르면 박사개구리 생각난대서 겁나 웃음ㅋㅋ자세한 사항은 이미지검색-참존 개구리), 불멸, 무의미의 축제, 농담, 이별의 왈츠 정도네요... 미학적으로든 소설 완성도든 참존가가 거의 절정이구요, 거기선 여성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도 제법 높아지고 그나마 덜 빻게 그린 거구요, 이전 소설들 보면 그 소설의 씨앗이나 영감이나 뭐 그런게 언뜻 보이기도 하지만 좀 웃겨보겠다고 사람 빙구 만드는 거도 끝도 없고 거기 여성 캐릭터도 예외없고(우린 그걸 여성혐오야 하겠지만 쿤데라는 아냐 난 인간혐오야!!! 할 거 같고 ㅋㅋㅋ) 뭐 그렇습니다 ㅋㅋㅋ찐팬 아니면 시대착오적인 이걸 왜 읽나 싶은 소설 많아서 그거 거르기도 쉽진 않으니 감안하시고 한 번씩 보셔도 좋고 아니면 일년에 한 번 씩 참존가 읽어주는 의식(?저는 그짓 많이 함 ㅋㅋ근래 들어 안 봤네 좀씩 보다 말구) 하면서 열 번 쯤 읽어주는 게 정신건강에 나을 듯 싶습미다. 소설 창작 관심 있으시면 커튼도 좋구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