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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작가 초롱
이미상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평점 :
-20230205 이미상.
Suede-Trash
https://m.youtube.com/watch?v=-PdKGDMhau4
골목에 버려진 진열장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가구 위에, 혹은 안에, 우리는 몸을 붙여 앉았다. 용도 모를 그 네모의 위쪽이 막혀 있어서 집이나 방 같았다. 남자아이는 열일곱 살의 나에게 입을 맞추고 내 웃옷 속으로 찬 손을 넣고 파르르 떨었다. 학원이 끝난 시간인지 어디선가 나와 우루루 지나가던 아이들이 흘깃 시선을 던지다 금세 멀어졌다. 아는 얼굴이 있던 것 같아 부끄러운 건 잠시였다. 피씨 통신에서 만난 아이들은 얼굴과 목소리를 모르고 이름과 아이디로만 아는 상대방이 쉽게 좋아지기도 했다. 글자로 쉼 없이 나와 수다를 떨어주는 상대가 같은 동네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사귀자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다른 여자아이를 좋아하게 되기 전 그 가을의 두 달 남짓이었지만, 휴대전화가 없는 남자아이는 독서실 앞 공중전화로 나를 불렀고, 학교 마치고 저녁 나절 열람실에 잠시 앉았던 나는 의자에 가방만 걸어두고 반갑게 뛰쳐나갔다.
서로의 집에는 가 본 적이 없다. 주로 처음 만난 오락실에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펌프를 하거나 동전 노래방에서 노래를 했다. 단둘이 있고 싶으면 골목길을 마냥 걷거나 통일공원 벤치나 기념비석 둘레에서 입을 맞췄다.
아이들이 함께 할 장소는 거리 밖에 없었다. 공간은 언제나 중요하다. 아이들은 공간을 가질 돈도 법도 자유도 누리지 못한다. 그렇지만 헤어짐이 아쉽던 젊은 아이들이 막상 시간과 체력을 팔아 공유할 공간을 마련하고 나면 몸을 맞대고 눕지 않게 된다. 노동은 서로를 안을 힘을 앗아간다. 보증금이든 매매 금액이든 그렇게나 큰돈을 (빌리든 모으든) 끌어 모으고 나면 아이들은 늙는다. 새로 생긴 아이들이 늙은 등에 매달린다.
탈선의 온상이라는 룸카페가 뉴스에 나왔으니 청소년 금지 구역이 또 하나 늘겠다. 소설 ‘무릎을 붙이고 걸어라’ 속에서 귀띔해 준 차고지 공터에서 기름 묻고 잔돌이 등에 달라붙은 채 뒹굴던 아이들은 폭발한 탱크로리 때문에 불에 타 죽는다. 혹은 추운 날 열린 옥상을 찾아 현관이 열린 남의 아파트 단지를 쏘다닌다. 부모들이 성지순례를 떠나고 집을 비우길 기다린다. 전기 형식이 되려다 회고담 형식이 되고만 이 소설 속에서 카트린엠을 읽어내고 항의하는 독자도 놀라웠는데 그 항의 메일을 소설 말미에 그대로 가져다 붙여 답변을 대신한 소설가의 패기도 놀라웠다.
대학 시절 생긴 지 수십 년 되었다는 노래패 동아리에 가입했다. 민주화 이후의 세상에서 조금 더 불분명해진 싸움의 대상이 무언지 골몰하며 너냐, 너였냐,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국가주의, 가부장제, 학벌사회 다 쑤시고 다니다 보니 4년이 금세 지났다. 홈커밍데이 때 부모뻘 혹은 고모삼촌뻘인 선배들을 만났다. 매일 부르던 민중가요 작곡, 작사가가 눈앞에서 기타 치며 노래하는 걸 보는 일이 신기했고, 항쟁이 끝난 후 학원 원장, 대학교수, 조선일보 기자(그땐 어떻게 거길 가셔서 일하세요 싶었지만…) 혹은 제적되어 근근이 살아가는 사회인이 된 과거 운동권 사람들을 직접 보는 것도 신기했다. 그 사람들이 뭔가 서로 울분과 불만에 차서 으르렁대는 사연이 궁금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그것과 별로 상관 없겠지만, 운동권 후일담 내지 블랙코미디 같은 ‘하긴’을 처음 보았을 때 신선한 충격이 있었다. 두 번째 읽으니 처음만큼 그렇게 충격일 이야기는 아니네, 하면서도 여전히 잘 쓴 소설로 담담하게 읽었다. 보미나래의 이야기는 뒤늦게 예언서처럼 읽히기도 했다.(그러니까 의사 면허 취소되면 나랑 같이 수능 보자…늙은 나도 하는데 너도 할 수 이써ㅋㅋㅋㅋㅋㅋ) 연작처럼 이어지는 ‘그친구’에서 김의 말 뿐 아니라 규의 말까지 들을 수 있어서, 거기에서 추방을 추방하고 규가 떠나는 대신 둘이 끝까지 남아 서사의 지배자가 된 결말이 더 좋았다. 순수하고 신성하다고 스스로 우기는 것들을, 스스로 위대해진 것들을 까발리고 우습게 만드는 이야기가 나는 좋다.
82년생 김지영이나 현남오빠에게가 화제가 되고 잘 팔릴 때 솔직히 창피했다. 그것이 촉발한 행동과 연대와 인식 전환은 가치가 있겠지만, 나의, 우리의, 사회 절반의 고충을 대표하겠다고 나온 서사와 문장이 후져서 싫었다. ‘여자가 지하철 할 때’나 ’이중 작가 초롱‘을 읽으면서 내심 이게 시작이었다면, 싶었지만 선후관계가 틀렸다. 어쨌거나 이 소설들은 언제 쓰였든 여러 여성 서사 소설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휩쓸고 지지고 볶고 조금 시들해지고 그런 뒤에 나왔으니 거기에 빚진 것도 있겠다… 그렇지만 사람 욕심 끝이 없고 후진 건 후지다고 해야 해요…
책에 실린 소설들 중 비교적 나중에 발표된 작품들로 갈수록 더 나아지는 느낌이어서 이미상의 다음 나올 소설들이 기대되었다. 책 뒤편의 ’무릎을 붙이고 걸어라‘(현실 독자든 상상 속 독자든 누군가 뭐라고 했고 그게 수긍이 간대도)와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이 꽤 좋았다. 소설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제법 여러 소설에서 반복된다. 수진이 신발 상자 놓고 베란다에서 몰래 소설 쓰는 이야기가 특히 애틋했고 초롱 조롱 하는 건 비슷한 소설을 읽을 때마다 아니 저기 사람들 생각보다 소설가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아…판 안에서나 난리지…싶었다. 여기 소설들이 좋게 읽힐수록 소설이 너무 무섭고 징그럽고 쓰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고 있지 않은데도 쓰기 싫어질 만큼 기를 꺾는 잘 쓴 소설인가… 요즘은 그냥 많이 많이 읽고 싶다. 그렇지만 그날 공부 여덟 아홉 시간 겨우 채우고 자기 전 자투리 시간이 남으면 단편소설 하나 읽을까 말까 처지이고 지금은 그래야 하는 게 맞는 처지… 자꾸자꾸 읽고만 싶은 걸 참으며 그럼 난 뭘 위해 사나, 싶다. 매일 집에만 박혀 있으니 살이 너무 쪄서 이제부턴 일부러 나가서 걷기로 하자, 하면서 나는 왜 사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