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다운 괴물이 저 자신을 괴롭힌다 - 읻다 시 선집
폴 발레리 외 지음, 윤유나 엮음, 김진경 외 옮김 / 읻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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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7 읻다 시 선집.

아주 많이 울던 즈음이다. 울다 울다 지쳐서 문득 올려다 본 책꽂이에 이 책이 있었다. 제목만 보고 무슨 책인지도 모르고 그냥 사둔 알록달록한 책을 맨 뒤쪽에서부터 펼쳐 보았다.
희망, 이라는 시에서 루쉰이 이렇게 말해주었다.
- 절망은 허망이다. 희망이 그러함과 같이.
망 망 망이 세 번이나 들어가는 이 말이 진짜 망했어, 하는 중인 나에게 위안이 되었다. 이 말을 읽고 나서는 조금 덜 울게 되었다.

책의 제목은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에서 따왔다고 한다.
-나는 일요일의 휴식을 살핀다
게으름을 찬양한다
감각들이 내게 떠넘기는 저 끝없이 미미한 지식을
어떻게 어떻게 줄여야 하는가
감각은 산이다 하늘이다
도시다 내 사랑이다
감각은 사계를 닮는다
그것은 목이 잘린 채 산다 그 머리가 태양이고
달은 그것의 잘린 목이다
나는 끝없이 뜨거운 시련을 겪고 싶다
청각의 괴물인 네가 포효한다 울부짖는다
천둥이 네 머리칼을 대신하며
네 발톱이 새들의 노래를 반복한다
괴물 같은 촉각이 파고들어 나를 중독시킨다
눈은 내게서 멀리 떨어져 헤엄친다
범접할 수 없는 별들은 시련을 겪지 않은 지배자들이다
연기로 된 짐승은 머리가 꽃피었다
월계수의 풍미를 지니고서
가장 아름다운 괴물이 저 자신을 괴롭힌다
(기욤 아폴리네르, <나는 일요일의 휴식을 살핀다>전문)

시를 잘 모르는 나에게 이전부터 번역 시는 더 어렵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 시집은 정말 좋았다. 여러 번역자들이 여러 시인의 시를 골라 엮었고, 김연수의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 잠시 스친 미야자와 겐지의 <비에도 지지 않고>도 실려 있어서 괜히 반가웠다.
특히 최성웅 번역가가 옮긴 폴 발레리,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가 좋아서 번역가에 대해 검색을 해 보았다. 이 시집을 기획하고 여러 시집들을 번역 출간하는 출판사도 꾸렸다고 했다. 내 동갑내기 번역가가 옮긴 시집들이 더 궁금해져서 사려고 하니 대부분 절판…중고판매자들은 정가보다 아주 비싸게 팔고 있어…아쉬운 대로 행복사전, 이라는 어린이책이랑 이 시집 중고를 누구한테든 선물해야지, 하고 두 권 더 샀는데 너무 꼬질꼬질한 것들만 와버렸다…우주점 너마저…

내 후진 말 대신 오래도록 다듬어진 말들로 순간을 그려주지, 하는 듯한, 대부분 이미 죽어버렸을 시인들이 남긴 시들을 나는 감사히 읽었다. 곁에 두고두고 힘이 많이 들면 펼쳐 봐야겠다. 글렀도다, 하다가도 까마귀가 내 방 문간에만, 내 마음 속에만 살지는 않았구나… 하며 굽이굽이를 넘어갈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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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1-08 0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해보이시지만 눈물이 있으신 열반인님이군요~!! 힘들때 절망적인 이야기나 노래를 들으면 오히려 힘이 되더라구요~!! 화이팅 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1-09 11:27   좋아요 1 | URL
제가 강해보이셨나요 ㅋㅋㅋ 어릴 때는 노래였는데 이제는 활자로 수렴하네요. 화이팅 감사합니다. 시험 끝나고는 (그리고 아직 시험을 저 멀리 앞둔 터라 ㅋㅋㅋ)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습니다 ㅋㅋㅋ

라로 2023-01-08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너무 안 울어요,,, 사람(제가)이 갈수록 건조해지는 것 같습니다요. 저도 반열샘 나이 땐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울고 싶은 때 많이 울기. 늙으면 울고 싶어도 잘 안 울어져요.ㅠㅠ

반유행열반인 2023-01-09 11:29   좋아요 0 | URL
저는 그냥 태생이 울보여서 라로님은 이제 씩씩한 사람이 되셔서?! 울고 나면 확 풀리고 나아져야 되는데 저는 한번 그 구렁텅이에 빠지면 내가 왜 우는지도 모르고 그냥 마냥 그러고 점점 더 수렁으로 빠져들어서 안 좋더라구요…이번에 공부 쫌 해보고 알게된 저의 울보성…

Yeagene 2023-01-08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이렇게 칭찬하시니 저도 궁금해지네요 찾아봐야겠어요♡

반유행열반인 2023-01-09 11:31   좋아요 1 | URL
예진님은 시집 꾸준히 읽으시니까 이 책 보시게 되면 감상 알려주세요. (난 별로야! 도 괜찮아요 ㅋㅋㅋ그런 거 좋음…) 알라딘 와서 책들 구경하다 보니까 제가 꽂혔던 번역가님이 본인 책마다 내가 번역해서 아는데 이 책 짱 좋음! 이러고 백자평 달고 다녀서 뭔가 확 깸 ㅋㅋㅋㅋㅋ세상엔 독특한 사람이 많아요…

은하수 2023-01-19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록달록 표지 넘넘 예뻐서 안사고는 못배길것 같아요
아폴리네르, 폴 발레리 저 어릴 때? 자주 읽었던 시집인데 참 정감 가네요
추억이 새록새록 돋습니다.
지금은 살수 없는 걸까요?
알라딘이나 중고나 가격차이가 없군요^^

반유행열반인 2023-01-21 16:35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은하수님 ㅎㅎ이 책은 아직 잘 팔고 있고 같은 출판사 최성웅 번역가가 낸 폴 발레리 책은 절판이더라구요. 릴케 시집만 전자책 팔길래 사 봤더니…아 두이노 비가 중에 제일 좋은 거 이 책에 이미 엄선해놨구나…싶더라구요 ㅎㅎㅎ반갑습니다.

최성웅 2023-09-09 14: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확 깨게 해서 죄송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9-09 15:49   좋아요 0 | URL
그래도 팬입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