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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재인, 재욱, 재훈 ㅣ 은행나무 시리즈 N° 5
정세랑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12월
평점 :
-20211025 정세랑.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과 ‘시선으로부터’를 갖춰 두고도 자꾸 작가가 쓴 다른 책들을 찾아 읽는다. 돌림자 갖춘 세 이름보며 늘 궁금해하던 이 책이 리커버가 나왔길래 흠 그럼 구판 빌려야지, 했다. 소설이 아닌 걸 세 권 봤으니 이번에는 소설이지 암암, 하고.
다른 책들의 작가의 말에서 정세랑은 친구들의 이름과 경험을 자주 빌려다 썼음을 밝혔다. 이 책의 재인, 재욱, 재훈 남매도 실제로는 남매가 아닌 세 사람-두 명은 친구, 한 명은 친동생-에게서 따왔다고 했다. 남의 이야기를 잘 경청하고 그걸 다시 재미있게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능력이 부럽다. 기꺼이 쓰도록 허락하는 친구들도 좋고, 그 친구들이 기꺼워할 만큼 매번 착하고 순하게 쓰는 것도 좋다. 지난 인연들이 소설에 쓴 이야기를 뒤늦게 읽고는 다친 마음으로 작가에게 항의하거나 법정 싸움까지 가는 안타까운 사례들을 자꾸 본 뒤라 더 그랬다. 그나저나 봉곤이는 소송에서 이겼더라… 법정 다툼과는 별개로 망가진 관계와 마음과 커리어는 어쩔 것인가… 쓰는 일, 알려지는 일은 이토록 무겁고 무서운 일입니다…
소소한 초능력을 갖게 된 남매가 각자의 자리에서 누군가를 구하는 매우 훈훈한 이야기였다. 누군가를 구하고 살리는 건 초능력이 없는 누구나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하고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내 곁의 사랑스러운 크고 작은 이들이 나를 살게 하는 것처럼. 경도 높은 손톱이나 눈 앞의 위험경보나 순식간에 이동하는 승강기가 아니라도, 따뜻한 손길과 조금 더 다정한 말 한 마디와 맛있게 차려낸 한 끼 식사 같은 작은 일로도 가능할 것이다. 모두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남을 돕고 구하고자 하는 선한 사람들이 지탱한 덕에 이만큼 우리 삶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해 주는 얇은 책도 한 몫 하겠지. 남의 목숨을 덜어 돈을 버는 이야기로 기우는 세상을 이렇게 달달한 이야기를 조금씩 부어가며 균형을 맞추어 갑니다…
+밑줄 긋기
-“너 같은 건 내가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거야, 염을 하면서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릴 거야! 이 석빙고의 얼음 같은 것아! 개마고원의 동태 같은 것아! 철원의 고드름 같은 것아!”
염이라니, 뭐 그리 끔찍한 말을. 게다가 동빙고동 서빙고동은 알고 있어도 석빙고의 얼음 같은 건 본 적이 없어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었다. 냉장고 있던 시대의 사람이 대체 왜 그런 비유를 하는지 몰랐다. 더해서 엄마가 예를 드는 지역들은 엄마가 연고가 하나도 없었다.
“셋이나 있어도 사는 것만 무겁지, 낳은 보람 있는 것들이 하나 없어. 너희 때문에 이렇게 사는데 나를 가련히 여기는 애가 하나도 없어. 뱃속에서부터 그렇게 애를 먹이더니 뱃속에 갈퀴를 품어도 너희보다 나았을 거야.”
(이렇게 무서운 폭언을 들어가면서도 이만큼 잘 자란 아이들을 굳이 그리는 건, 낙관인가 위로인가 부모 핑계 대지 말고 더 나은 사람이 되라는 부드러운 다그침인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지만, 일어났을 때 주요 장기 손상을 막기 위해 재인은 동료들의 가운을 뜯고 그 안에 손톱으로 만든 판을 얇게 넣어 다시 꿰맸다. 판이라 해봤자 그보다는 필름에 가까웠다. 알아채기 어려울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해 재인은 엄마의 재봉틀을 빌려 써야 했고 그래서 서울에 자주 올라갔다. 엄마는 좀처럼 오지 않던 재인이 거의 매주 오자 기뻐하는 눈치였지만, 재인은 엄마가 외출하기를 기다렸다 작업에 착수해야 했으므로 엄마 등을 자꾸 밖으로 떠밀었다.
(몰래 동료들 가운을 훔쳐다 또 엄마 몰래 바느질 하는 재인의 모습이 찡 했다. 진짜 착한 일은 아무도 몰라줘도, 아무도 모르게 하는 것일까. 누군가 그렇게 내가 모르는 사이 하고 있는 일들을 생각했다. 남들 아직 자는 이른 새벽 내린 눈을 홀로 쓰는 사람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