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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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1 김연수.

Jaurim - #1
https://m.youtube.com/watch?v=SpVV6HvtX8c

아기에게 먹이지 못하고 흐르는 젖. 사랑하는 이에게 가닿지 못하고 허공에 뿌려진 씨앗물. (야이 원초적인 새끼야…)
시를 빼앗긴 시인. 소설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
읽는 내내 슬픈 것들을 생각했다.
전기나 전기소설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을 영웅 만드는 게 싫다. 칭송 받는 아동 운동가가 사실은 소아성애자였고 고통 받는 아이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것 같은 불온한 상상을 한다. 그 시절 살아보지 않은 후대 사람이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옆에서 지켜보았다는 사람의 증언도 추억 필터가 씌인 것이라 믿지 않는다. 애를 어떻게 키우면 이런 뼛속까지 불신자로 자라는 걸까 나도 궁금하다.
이 소설은 시인이 정상에 선 순간을 그리지 않는다. 그나마 가장 큰 기쁨의 순간이라면 시집 사슴을 출판해 벗의 손에 든 걸 때 탈까 집어 넣어라 할 때일까. 작가의 말대로 시인은 자신이 죽은 뒤에 그리던 남쪽 동네 사람들이 자기 시를 읽게 될 걸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어리고 젊은 애들이 수능 대비를 위해 밑줄 쳐가며 자기 시를 ‘분석’할 줄은...심지어 진짜로 수능에 나올 줄은…

수능 출제 시 한 편 감상하고 갑시다.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아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 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 씨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이라며 수염을 쓸는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지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고향(故鄕)’<사슴> (1936).

우리 아빠(혹은 아빠 같은 으르신) 친구는 관우 같고 여래 같은 삼수 갑산 화타….ㅋㅋㅋㅋㅋㅋ

시인이 나오는 소설이지만 내내 시를 쓰지 않는다. 다만 그가 썼던 시가 남의 입에 오르내리고 남몰래 추운 방에서 몰래 연필로 썼다가 남볼새라 불태워진다. 아름답게 울리는 말을 쓰면 혼나는 세계에서 멍텅구리가 되어 가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일은 왜 그걸 보는 나만 미치고 팔짝 뛰겠는 거지...정작 시인은 너무 담담해서 더 슬퍼… 1984도 생각나고 감옥에 갇힌 소설가나 자살한 시인들도 생각난다.

글로 남기지 못하는 순간에도 시인은 시를 보고 시를 만진다. 잃어버린 시들을 잊지 않았지만 잊으려고 애쓴다. 나는 언젠가 읽기도 쓰기도 집어치우고 무덤덤하게 사는 나의 미래를 가끔 상상한다. 생각보다 불행하지는 않을 것도 같다. 그러니까 괜히 미치고 팔짝 뛰었네. 어쩄거나 시가 남았으니 남은 나는 조만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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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1-11 22: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쓰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반유행열반인 2020-11-12 06:05   좋아요 2 | URL
시 한 편으로 소설 많은 장면이 샥샥 스쳐가네요. 저는 수능문학 공부할 때 읽은 시들 말고는
따로 백석 시집을 안 챙겨봐서 소설 읽을 때도 막연히 이런 부분은 시겠구나 했어요. 좋은 시 건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 2020-11-11 23: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의 리뷰 기다렸어요 ^^ 주소 남겨주신 자우림 노래랑 같이 들으니 더 좋네요. 저도 같은 곳에 밑줄을 많이 그었고요. 같은 곳에서 답답해하고 안타깝고 그랬어요. 진짜 백석이 어떻게 알아 ㅋㅋㅋㅋ 자기 시 이렇게 사랑 받고 수능에 나오고 그럴지 꿈에도 몰랐을 거예요. 아무도 봐주지 않는 달빛이라고 생각했을텐데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0-11-12 06:09   좋아요 2 | URL
모르고 써야 남는 것 같아요. 장강명 책 읽는데 고전이라 하는 소설도 작가 죽기 전엔 잘 팔리지도 않던 게 남았다고ㅋㅋ시도 그림도 그런 듯...음악만 왠지 예외 같음 되게 현세적 장르야ㅋㅋㅋ그러고 또 죽은 뒤에도 남아ㅋㅋㅋ 너무 그을 데가 많아 자제하며 잘 읽었어요. 저 겨우 김연수 소설 두 번째 장편은 처음인데 두 번째부터 좋아하게 될 예감ㅋㅋㅋ(이러다 예전 소설들 보규 웩 재미없어 할 거 같기도요ㅋㅋㅋ)

syo 2020-11-12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서깊은 김연수빠인 syo보다 훨씬 더 많은 문장에 밑줄을 그으셨네요!! 그으신 밑줄을 보면서, 조만간 다시 한 번 더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반유행열반인 2020-11-12 13:26   좋아요 0 | URL
제가 몇 년 전에 syo님의
문장에서 김연수 냄새 맡은 게 허투루가 아니었군요 ㅋㅋㅋ

syo 2020-11-12 12:40   좋아요 1 | URL
syo가 김연수를 그렇게 흠모했으니 당연히 냄새가 나긴 났겠으나,
그건 마치 망한 짬뽕 속에서 함께 망해버린 지나치게 신선했던 홍합의 냄새를 맡으신 것과 흡사하여,
반님의 미친 후각을 칭송할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