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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평점 :
-20201004 아니 에르노.
기억에 남은 장면이 있다. 나는 좁은 방 창턱에 매달려 밖을 내려다 보았다. 아래에는 실외 베란다 공간이 있었고, 일하다 쉬러 나온 사랑하는 그와 그녀가 생생하게 보였다. 그는 담배 연기를 아주 싫어했는데, 그녀가 연초 하나를 다 태울 때까지 옆에서 기다려주었다. 두 사람은 눈이 가늘어지도록 웃으면서 끝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둘은 같이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지만, 별일 없는 사이였다(고 그는 말했다). 그녀는 그와 사귈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도 중요한 일을 할 때나 놀 때 자주 그와 함께 다녔다.
방안의 나는 바깥의 둘을 지켜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그가 그날 저녁 찾아가 안아줄 사람은 나였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할 사람도 나였지만 슬펐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 즐거워 보이는 둘 사이에 끼어들 수 없었다. 이미 그런 아픔과 슬픔과 불만을 드러냈다가 그가 떠났던 날들이 있었다. 그들이 자리를 뜨기 전에 창가를 벗어났다.
돌아보면 누구를 사랑하든 그랬다. 끝없이 기다리느라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기다림은 망상을 낳았다. 망상 끝에 집착이 들러붙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이들을 만나러 가면 끝없이 초조했다. 귀가가 늦어지면 그가 겪을 사고를 (재난이나 연애 사건 그 모두를!) 상상하며 고통스러웠다. 나는 네가 없어서 이렇게나 슬프고 불안했는데 너는 내가 없어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구나, 말이 안 되는 마음인 걸 알면서도 서운한 마음에 돌아온 사람에게 이런저런 트집을 잡고 울먹였다.
하필이면 그런 사람만 만나고 그런 관계만 맺었던 게 아니라는 걸 아주 최근에야 알았다. 나는 그냥 그런 틀에 빠져 그런 모양으로만 세상을 인식할 줄 밖에 몰랐던 거였다. 나를 자유로이 풀어두고 내가 맺는 관계들을 수용해주는 고마움은 모르고 족쇄 한쪽씩을 잡고 원망했다. 왜 나에게 이걸 걸어주지 않냐고, 이쪽은 네 몫인데 왜 자꾸 달아나기만 하냐고. 울부짖다가 상대를 질리게 만드는 일이 반복되었다.
책을 읽는 동안 화자의 불안과 결핍에 압도된 모습을 보며 이입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던 시절에도, 헤어진 이후에도 그가 곁에 없을 때 자기 자신마저 사라져버린 듯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기다리기만 하는 삶이란, 얼마나 고통스럽고 피폐한지.
부재와 상실을 겪어보았다. 앞으로도 겪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야. 혼자인 날은 과거이고 미래이다. 많은 일들이 원하는 대로 되었고,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충만한 현재에 슬픔을 당겨쓸 이유가 전혀 없다. 설령 모든 걸 잃는 날이 와도 나중에 꺼내보며 좋았었다 할 순간을 나날을 차곡차곡 모으는 중이니까. 미리 슬퍼하지 말자.
창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는 나에게 무얼 건넬까 생각해보았다. 커피 세 잔 들고 내려가 볼까? 하는 나를 말렸다. 좋지 않은 생각이야. 그만의 시간과 관계를 존중해 주렴. 그럼 이제 뭘하지? 옆에 쌓인 책탑을 봐. 고민할 이유가 없잖아. 바닥에 머리카락이 잔뜩 굴러다니는 데 청소기를 돌리는 건 어때? 커피를 방울방울 내려서 단 과자랑 먹어도 좋겠다. 그렇게 삶을 채워나가야 해. 모든 책과 노래에 그의 존재와 부재를 연관 짓는 버릇을 버려야 해. 끝까지 데려가야 할 건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인 걸 잊지 말아요.
+밑줄 긋기
-가끔, 이러한 열정을 누리는 일은 한 권의 책을 써내는 것과 똑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면 하나하나를 완성해야 하는 필요성, 세세한 것까지 정성을 다한다는 점이 그랬다. 그리고 몇 달에 걸쳐서 글을 완성한 후에는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이 열정이 끝까지 다하고 나면-‘다하다’라는 표현에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겠다-죽게 되더라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요즘은 ‘한 남자와 미친 듯한 사랑’을 하고 있다거나 ‘누군가와 아주 깊은 관계’에 빠져 있다거나 혹은 과거에 그랬었다고 숨김없이 고백하는 사람을 보면, 나도 내 마음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고 공감에서 느끼는 행복감이 사라지고 나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었더라도 그렇게 마구 이야기해버린 것을 후회했다. 대화를 나누면서 “맞아요. 나도 그래요. 나도 그런 적이 있어요.”하고 남의 말에 맞장구를 치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이런 말들이 내 열정의 실상과는 아무 상관없는 쓸데없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 알 수 없는 감정 속에서 무언가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 사람과 사귀는 동안에는 클래식 음악을 한 번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대중가요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예전 같으면 관심도 갖지 않았을 감상적인 곡조와 가사가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런 노래들은 솔직하고 거리감 없이 열정의 절대성과 보편성을 말해주었다. 실비 바르탕이 노래한 <사람아, 그건 운명이야>를 들으면서 사랑의 열정은 나만이 겪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중가요는 그 당시 내 생활의 일부였고, 내가 사는 방식을 정당화시켜주었다.
-때로, 그 사람이 내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건 아닐까 자문해보기도 했다.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태연히 잠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하고 웃는 그 사람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한시도 그 사람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와의 차이 때문에 너무나 불안해졌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아니다. 그 사람도 분명히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 생각만 하는 자신의 모습에 깜짝 놀랄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내 태도가 옳은 건지 그 사람이 옳은 건지 굳이 가려낼 필요는 없다. 그저 그 사람보다 내가 더 운이 좋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