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항 문학동네 시인선 20
안도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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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1 안도현.

한 달에 시집 한 권은 읽는다 했는데 달을 넘겨버렸다. 9월에 거진 다 읽었으니 9월 읽기로 쳐야지.
내 책이 아닌 이 시집을 딱 펼쳤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멀리서 우는 소리는 쥐를 놓치고 서러워하는 가야금 소리 같고 가까이에서 우는 소리는 입술에 묻은 피를 닦는 통절의 칼집 소리 같다 앞발은 호미 같고 뒷발은 쟁기 같다 돌담을 뛰어넘을 때의 꼬리는 달빛 같고 마루 밑에서 봄볕을 쬐는 등뼈는 읍사무소 공무원의 어깨 같다 때로 쫑긋거리는 귀는 묵은 밭에 올라오는 원추리 새순 같고 푸른 눈은 물고기 없는 연못 같다 수염은 바늘 같고 콧구멍은 바늘귀 같다 털은 저녁 구름을 벗겨 지은 금사단 당의 같다 (’고양이’ 전문)

비유 장인이네. 앞발은 호미 같고 뒷발은 쟁기 같대. 그래서 나도 사서 보았다.
곡진한 편지를 써 달라던 이가 있었다. 곡진한 게 뭔데. 사전을 찾았다.
-곡진하다 1. 매우 정성스럽다. 2. 매우 자세하고 간곡하다.
아아...그래서 매우 정성스럽고 자세하고 간곡하게 살던 이야기를 써 보냈다.
시 제목에 극진한 건 또 뭔데. 사전 나와라.
-극진하다 어떤 대상에 대하여 정성을 다하는 태도가 있다.
그리하여 어떤 대상에 대하여 정성을 다하는 태도를 갖고자 한다.
곡진하고 극진한 말의 세밀한 차이를 아는 사람이고 싶은데, 그래서 적재적소에 제대로 된 말을 끼워놓고 싶은데 읽은 건 일천하고 쓴 지는 더 짧아서 한참 더 해야지 싶었다. 아주 오래 전 시인의 시를 생각하면 아, 뭐든 곡진하고 극진하게 오래오래 하면 뭐라도 되거나 되지 않겠구나 아무 것도 안 하면 그냥 아무 것도 안 되겠구나 그러면 나는 어쩔까 짧게 고민했다.

봉숭아꽃은
마디마디 봉숭아의 귀걸이,

봉숭아 귓속으로 들어가는 말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제일 먼저 알아들으려고 매달려 있다가
달량달량 먼저 소리를 만들어서는 귓속 내실로 들여보내고 말 것 같은,
마치 내 귀에 여름 내내 달려 있는 당신의 말씀 같은,

귀걸이를 달고 봉숭아는
이 저녁 왜 화단에 서서 비를 맞을까
왜 빗소리를 받아 귓불에 차곡차곡 쟁여두려고 하는 것일까

서서 내리던 빗줄기는
왜 봉숭아 앞에 와서 얌전하게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일까
빗줄기는 왜 결절도 없이
귀걸이에 튀어오른 흙탕물을
빗방울의 혀로 자분자분 핥아내게 하는 것일까

이 미칠 것 같은 궁금증을 내려놓기 싫어
나는 저녁을 몸으로 받아들이네

봉숭아와 나 사이에,
다만 희미해서 좋은 당신과 나 사이에,
저녁의 제일 어여쁜 새끼들인 어스름을 데려와 밥을 먹이네 (‘극진한 꽃밭’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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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10-01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인은 비유장인이시고 반님은 제목장인이세요ㅎㅎ

우리말은 다채롭고 그래서 더 어렵네요@_@ 꼼꼼히 찾아서 공부하시는 모습이 대단하세요… 덕분에 가을밤 좋은 시 감상하고 갑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10-01 21:42   좋아요 1 | URL
저는 장인은 아니고 낭인이요 ㅋㅋㅋㅋㅋ
우리말 어려운데 재미있어요. 좋게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syo 2020-10-01 2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시들 다 마시고 나도 비유의 장인 발가락 정도 되면 참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안도현 정말 최고....

반유행열반인 2020-10-02 07:05   좋아요 0 | URL
syo님은 귀여움 장인 타이틀도 있지 않으십니까. 비유는 정말 어려운 거 같아요ㅎㅎㅎ

hnine 2020-10-02 0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스름. 저녁의 제일 어여쁜 새끼들이래요 ^^
정말 비유의 달인 맞네요.
반유행열반인님 시집 읽으시는 모습이 극진하십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10-02 07:03   좋아요 0 | URL
저도 어여쁜 어스름 그 부분 좋았어요. 달인의 솜씨ㅎㅎㅎ 극진은 아직 먼 것 같아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