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아무튼, 술 -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무튼 시리즈 20
김혼비 지음 / 제철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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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1 김혼비.

시불시불 욕하던 서울도서관 전자책 앱에서 다른 전자도서관에 없던 책을 찾고 히죽. 나란 새끼 못난 새끼.

나도 모르는 사이 올해 읽은 책이 100권이 넘어 있었다. 복직하면 읽는 책이 줄어들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일하는 나에게 거의 유일한 여가라네. 가장 손쉬운 위로라네.
읽는 책 늘리는 꼼수는 절친한 독서가님께서 전수해주셨는데, 시집, 에세이 같이 잘 읽히고 얇은 책 위주로 읽으면 된다고 했다. 했던 것 같다. 안 그랬는데 괜히 혼자 못된 것만 슬쩍 따라 배웠을 수도 있다.
그래서 뒤늦게 별점 많은 걸 따라 읽는 책이 많다. 이 책도 아 좋대는데 보고는 싶은데 사기는 싫고 빌려보고 싶으네 하다가 결국 엊그제 문닫은 서울도서관이 자, 앱은 후지지만 재주껏 읽어봐, 하고 건네주었다.

나의 아주 못된 버릇은 엄청 많이 있는데, 그 중 한 가지는 일부러 작정하고 웃기려고 하는 사람의 말이나 글에 매우 냉정하다는 점이다. 정말 이상하게 그렇다. 그래서 영화관에서 남들이 폭소하는 지점에서는 다문 입에 동요하지 않는 얼굴 근육으로 뭐가 웃기다는 거야 하고 있다. 반대로 아무도 웃지 않는 어느 순간, 특히 진짜 개어이없는 부조리와 마주하거나 누군가가 엄청난 권위와 위엄과 권력을 행사하거나 딱 봐도 허례허식인 걸 진짜 겁나 진지하게 각 잡고 실행할 때면 고요 속에 미친놈처럼 웃어버린다. 내가 겪는 현실의 그 장면이 너무나 블랙코미디 속 연출 같아서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놈은 딱 찍혀서 짤리거나 왕따 당하거나 배척되는 게 정상인데 내 주변 사람은 다 착한지 그래도 모지라게 굴면 챙겨주고 밥도 같이 먹어주고 그런다(…) 세상은 그리 어두운 것만은 아냐.

이 책을 읽을 때도 그랬다. 입담과 표현력 넘치게 작정하고 쓴 글 같은데 나는 썩 재미있지가 않구나 짧고 잘 읽히기는 하는 구나 하면서 슥슥 읽었다. 내가 이렇게 몽니 부릴 때는 대개 부러운 거다. 이렇게 퍼 마실 자유가 있다니. 외국에 몇 년씩이나 살아봤다니. 우아하고 호쾌하게 축구를 하다니. 숏컷이 저렇게 어울리다니. 헤헤 좋겠따.

혼비님 만큼 재미나고 사랑받는 글은 포기하세요 닥치세요 꿈깨세요 미리 내려놓고 나의 술의 소역사를 써 보기로 한다.

나는 술꾼이 아니다. 술꾼이었던 적이 없다. 술로 따지면 진짜 쪼렙에 신생아다.
유년기의 술은 끔찍한 물질이었다. 술만 먹으면 때려부수고 엄마랑 동생 괴롭히는 아빠를 이십 몇 년 보고 살면 그렇다. 아빠가 술 먹고 오는 날은 정말 무서웠다. 평소에도 아빠는 무섭지만 술을 먹으면 정말 사람새끼가 아니었다.
우습게도 그런 불안과 공포는 나도 아빠처럼 술처먹고 담배피우고 삐뚤어질 거야! 하는 반발심으로 사춘기 때 폭발했다. 물론 담배는 고등학교 때 아빠 담배갑에서 한 개피 훔쳤다가 걸려서 뒤지게 혼나고 휴대전화 빼앗기고(전화기는 왜…)하면서 1차 시도는 불발했다. 그런데도 아빠는 나한테 담배 심부름을 자주 시켜서, 고3 여름 방학 때였나, 독서실 가는 길에 아빠 심부름 하듯 자연스럽게 씨마 주세요, 하고 집앞 슈퍼에서 담배 한 갑을 사서 오늘처럼 찌는 여름의 육교 위에서 미리 훔쳐둔 라이터로 불을 붙여 한 대를 태웠다.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켁켁대지 않을 거야! 하면서 깊게 몇 모금을 들이먹고, 연기를 내뱉고, 그런데도 아무 것도 없어서 허무했다. 기분이 나아지지도 않았다. 기대 서 있던 육교 난간에 남은 담배갑 통으로 끼워 놓고 독서실에 갔다. 이후 스무살 때 사귄 미친 남자친구 놈이 내가 좋아하던 여자애가 담배 피우는 게 그렇게 멋지더라, 하면서 하나 물려주는 거 피운 때랑, 동아리의 술자리에서 선배 언니가 피우는 걸 나도요 하고 얻어 피워본 이후로 나는 내내 비흡연자였다. 성대도 호흡기도 너무 약해서 인생 다섯 손가락 꼽히는 연초를 태워본 걸 마지막으로 앞으로도 피울 생각이 없다. 왜 샛길로 샜냐...왠지 음주와 흡연은 청소년의 탈선 대명사로 묶여서 나도 모르게 관성적으로...

술은, 좀 다르다. 첫 음주는 열일곱, 학교 공식 밴드 보컬 오디션에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붙은 뒤였다. 단합대회를 한다고 해서 기대반 설렘반 쫄졸 따라갔다. 그렇지, 락커라면 마약하다 뒤지는 건 대한민국에서는 안 되지만 술은 좀 해야지. 학교 근처에는 탄천이 흘렀다. 거기에서 선배들이 사온 소주를 겁 없이 벌컥벌컥 마셨다. 막 강권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선배들이 자꾸 괜찮냐고 물어봤는데 왠지 센 척하고 싶어서 처음 먹는 술을 잘 먹는 척 마셨다. 동기 애들이 맛이 가는 걸 구경하고, 멋진 선배 오빠들이랑 말도 많이 하고 왠지 더 친해진 거 같고, 하여간 즐겁게 놀다가 집까지 한 시간 걸리는 버스에서 푹 자고 멀쩡한 척 집 가서 이닦고 잤다.
그 다음 음주는 열여덟, 역시 밴드 때문에 마셨다. 분명 오디션 뚫고 들어온 보컬은 나인데, 다른 멤버 애들은 자꾸 객원보컬이라면서 자기 친구 남자애를 데려왔다. 새천년의 대세는 랩메탈, 하드코어, 뭐 이런 거였다. 그렇지만 얘들은 실력이 안 되니까 메탈리카, 너바나, 스키드로우 이런 밴드 중에 제일 쉬운 곡을 카피했고 나는 맞지도 않는 옷을 주워입듯 꾸역꾸역 안 되는 영어 발음으로 그로울링하는 아저씨들 목소리를 흉내내어 연습을 했다. ㅋㅋㅋㅋ그런데 랩만은 나를 시키기 싫었나 봐...나도 나름 노력했다. 레이지어갠스트더머신의 킬링인더네임이니 테이크더파워백이니 돌아가지도 않는 혀로 앤 나우 유 두왓 데이 톨쟈! 하면서 매일매일매일 랩 연습을 했다. 그런데도 자꾸 다른 남자애를 불러다 공연에 세워… 겨우 날 배려한답시고 자우림 노래 같은 거 하나 선곡해 놓고는 연습을 하나도 안 해 와서 합주를 할 수가 없어...얘들이 날 따돌린다는 생각에 밴드 탈퇴를 선언하고 몇날 며칠 줄줄 울었다. 나 없이 개판오분전으로 공연하는 모습을 본 수학여행 날은 화장실에 숨어 거의 한 시간을 또 울었다. 내가 나온다고 해 놓고도 괜히 서러워가지고 밴드 커뮤니티 익명 게시판에 가서 니들 좆나 후지다고 욕을 써 놓고(내가 더 후졌네) 그렇게 며칠을 보내다가… 동네 친구 하나를 불러다 슈퍼에서 소주 두 병인가를 사서 코인노래방에 들어가서 병나발을 불었다.
깡술을 물처럼 마시니 당연히 꼴았고, 중간에 친구한테 뽀뽀도 한 것 같고, 코인노래방이 있던 오락실 화장실 바닥에 굴러다니는 걸 친구가 질질 끌어서 우리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애비가 그러더니) 너까지 속을 끓이니, 하던 엄마 반응이 언뜻 기억나는데 대부분은 기억이 안나고 다음 날 아침 일어나니 머리랑 속이 뒤지게 아팠던 것 같다. 엄마는 그 일에 대해 더 말하지 않았고 나도 이후로는 그렇게 취해 들어오는 일도 밴드에 대해 더 미련을 갖는 일도 없었다.

고3 때는, 처음 남녀합반이 되어 수줍은 마음으로 좋아하는 애도 생기고, 익명게시판에 나 누구 좋아한다, 글 써서 애들이 누군지 추적하면서 단합하게 만들기도 하고, 수능 백일 앞두고 백일주, 수능 끝나고 축하주, 이렇게 반 애들과 술을 마셨던 기억이 난다. 서로 망가지는 모습을 보며 나름 친해진 것 같은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 익명 게시판에 또 인물평 같은 걸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나에 대한 걸 안 써서 금세 너 00이지 하고 걸렸다. 워낙 애들하고 못 어울리고 애들 친목질하면서 사진찍는데 구석탱이에서 공부하는 모습으로 뒷배경에 찍히는 아싸 이미지라(진짜에요 믿어주세요) 졸업 이후로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술을 마신 적은 없었다. 왜 세 문단 다 마무리가 없었다냐.

스무살 대학생 되어서는 고삐 풀렸다. 과에서 동아리에서 술 마실 기회 있으면 열심히 마셨다. 맥주는 싫다고(그때 병이나 페트에 든 국산 맥주도 호프집 생맥주도 정말 맛이 없었다) 소주만 마셨다. 몰랐는데 왕창 먹어보니 알았다. 내 술버릇은 정말 개같았다. 개새끼였다. 선택적 기억장애를 겪긴 했지만, 좋아하던 선배한테 강제로 키스했던 것도 같고, 나중에 남자친구 생기고 나서 역시 남자친구 있는 선배 언니와 두 남자친구 옆에 두고 키스했던 것도 같고(두 남자는 경악해서 말렸다...), 여자친구 있는데도 날 데리고 썸놀이하던 애한테 남들 다 있는 앞에서 십 분 가까이 욕콤보를 날려서 급기야 다른 선배오빠가 00야 하지마...그만해...무서워….하고 말린 적도 있고, 하여간 엉망진창이었다. 이십 년 간 보고 배운 게 그렇다고 구차하게 변명하긴 그렇지만, 어느 순간 생각했다. 나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새끼인 것 같아…
스물두 살에 아토피성 피부염이 너무너무너무 심해지면서 거동을 못할 지경이 되어서 강제로 술을 끊었다. 스물 네살까지 술을 안 마셨다. 그러다가 취업을 하고 신난다고 후배들 만나서 치킨에 맥주를 마셨더니 아토피가 다시 도졌다(…) 그래서 직장에서도 저는 술을 마시면 질병휴직을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하고 안 마시게 되었다.
그러다가 2014년 쯤 술을 마시고 연달아 사고를 치고, 같이 여행간 사람들(그때 처음 본 사람들도 있었다)에게 욕을 하고 희롱을 하고 하여간 온갖 추한 짓을 하는 걸 지켜본 곁의 사람이 약속을 하자고 했다. 둘이 있든 남이 있든 자기가 옆에 있을 때만 술을 마시라고 했다…그러면 수습은 해 줄게…

그래서 사람 구실은 하고 살고 있다. 수유 기간이 한 아이당 18개월 도합 36개월은 강제 금주를 하다 사이사이 맥주를 사오는 가족 덕에 요즘은 가끔 마신다. 요즘 가장 좋아하는 술은 경복궁이다. 이건 진짜 짱짱이다. 그전까지는 인디아 페일에일이 뭔지도 몰랐다. 아니 술에다가 연잎을 왜 넣어. 그런데 연잎향에 호프향 너무 좋다. 아 좋아. 이거랑 뿌링클 먹으면 진짜 짱짱...몸무게가 막 는다… 갑자기 연잎향 맥주 이야기 하니 연꽃이 보고 싶어 검색해 봤는데 이미 늦었나 보다. 코로나썌키때문에 나다니지도 못하니 올해 연꽃 구경은 포기. 연잎향 맥주나 먹자. 그런데 또 가족이 건강이 좋지 않아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는다. 그러니 나는 불쌍한 강아지 표정 지으며 오늘은 맥주 안 마셔? 안 나눠 마셔? 이러면서 애원하다가 그냥 포기할 때가 많다. 혼자 마시는 경지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그러니 술쪼렙인 내가 이 책을 읽기에는 공력이 부족했다. 그냥 아 그렇구나, 난 이만큼 술을 사랑하지는 못하겠구나, 술을 사랑해서는 안 될 몸이겠구나 싶었다. 그냥 이런저런 사람도 삶도 애호도 있구나 하는 정도였다.
냉장고에는 경복궁 한 캔 남산 한 캔 있지만 가족은 아직도 퇴근 전이고 나는 그냥 꿈에서나 경복궁 반 캔만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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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그리기 2020-08-22 08: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얇디얇은 책보다도 더 풍성한 감상을 풀어놓는 무서운 내공이라니.. 요즘 바쁘기도 하지만 님같은 이웃님 때문에 도서감상 쓰기가 너무 망설여지잖아요! (왜 엉뚱한 데 골질인지는 나도 몰라요. 갱년기 탓이라고 할래요. 힝.. ㅜㅜ)
님의 글을 읽다가 저와 비슷한 게 많아서 놀라며 또 혼자 반가웠습니다.
특히 담배 관련 개인사는 제 얘기인줄.. ㅎㅎ
(도덕책같은 청소년기를 보낸지라 첫 담배질(?)은 대학 3학년때였던 건 조금 다르지만), 기관지도 안좋고 맛(?)도 없어 몇번 시도하다 평생 비흡연자로 살고 있거든요.
게다가, 20대엔 소주만 줄창 마시다 맥주에 빠진것도 비슷해서 혼자 신기해 했네요^^
저희 집안은 아빠부터 모든 식구들이 알콜에 강한 체질인데다, 남들에게 흉한 꼴 보이기 싫어 이를 악물고 정신 차리려 애쓰면서 귀가해 쓰러진 덕분에 다행히 이불킥 해야하는 주사의 역사는 없는걸 천운이라 여기며 살아왔고,
님 글을 읽으며 다시 한번 안도의 한숨을 살짝 쉬었다는요. ㅎㅎ
읽다보니 아침부터 맥주가 한잔 땡기는^^ 기현상이..
특히 고민하다 패스했던 경복궁,
오늘 반드시 마셔볼랍니다! (이런 다짐 너무 행복합니다)
시원한 맥주와 함께 멋진 주말 보내세요~~

2020-08-22 0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22 0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22 0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제이 2020-08-22 1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100 경복궁 메모!

반유행열반인 2020-08-22 14:27   좋아요 0 | URL
좋아요 백 개나 감사합니다 ㅎㅎㅎ경복궁은 한 번쯤 드셔보시면 새로울 맛이에요 ㅎㅎ

- 2020-08-23 0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 은근 슬쩍 달달구리해서 반님 취향아닐 줄 알았지 (빙긋)

반유행열반인 2020-08-23 05:17   좋아요 1 | URL
아 나도 달달구리 잘 먹는다고! 요즘 그냥 심통 나서 그래요.ㅎㅎㅎㅎ설탕 살쪄 알콜 살쪄 압수(이러고 어제 경복궁이랑 남산 먹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