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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 감기 ㅣ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평점 :
-20200308 윤이형.
이 값에 이렇게 작은 책이라니, 처음 받아들었을 땐 실망스러운 마음이었다. 중편 소설 한 편이 담겨 있다. 그 사이 윤이형은 절필했고 이 책이 마지막이 되었다.
두고 묵히다 펼쳤다. 작은동호회를 읽을 때 느낀, 안절부절이고 갈피를 못 잡는 답답함이 싫었는데 그런 마음을 이번 책에는 뚜렷이 잘 풀어놓았다 싶었다. 얇아도 작가가 그간 했을 많은 고민들이 담겨 있었고, 그 고민의 결이 공감이 되었다.
표지에 실뜨기 하는 손들이 있는데, 꼬인 실을 풀듯 짤막한 이야기로 많은 인물이 이어달리기를 한다. 정세랑 소설 중 웨딩드레스 하나를 공유한 여자들 이야기가 생각나는데, 붕대감기의 여자들은 점과 점으로 이어나가며 선을 만들고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를 이뤄서 이야기 구성이 더 정교한 느낌이다.
처한 위치, 가능성, 선호, 성격, 가치관, 가족관계, 성적 지향, 세대가 다르고 그래서 선택할 수 있는 길도 지지하는 주장도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건넨 것은? 혐오와 비난의 언어가 포함되어 있다. 상처를 키우고 다른 방식의 연대 가능성은 꿈꿀 여유 없이 선 긋기에 바빴다. 작가는 이런 모습들을 보며 깊은 상처를 입었던 것 같다. 나는 상처 받지 않으려고 무심한 척, 모르는 척, 관계 없는 척하다 부정하는 말을 뱉고 그러면서 결국 상처 받았다.
후반부에서 너무나도 다른 두 친구 진경과 세연이 대화로 서로를 이해하려는 모습은 작위적이었다. 결국 그것도 세연의 환상이었다고 얼버무리지만.
자신의 위치와 입장을 자각하고, 어떤 길을 갈지, 무엇이 옳다고 믿는지,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명확한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나와 다른 타인에게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을까. 소설 속에서나마, 두 사람 사이라도 이해의 가능성을 찾으려는 작가의 노력은 가상했다. 버스의 비유는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도 시원하지 않다. 막막함은 여전하다.
‘옛날에는 너무 지겨웠는데. 세상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안 변할까, 대체 어떻게 해야 이게 변할까 싶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너무 빨라. 빨라서 어지럽고 울컥거릴 때가 많아. 그런 걸 보면 네가 하는 말들이 틀린 게 없는 것 같아. 우린 승객이었을 뿐, 그동안 이 버스에서 한 번도 운전대를 잡아본 적이 없었떤 거지. 그런데 이제 처음으로 스스로 운전을 할 기회가 주어진 거야. 그래서 이렇게 어지러운 거겠지. 방향 하나하나, 신호 하나하나, 승객들 한 명 한 명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니까. 세연이 너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 버스를 운전하는 사람이 될 거잖아. 나는 아무 이름도 갖고 싶지 않고, 끼워달라는 말도 하고 싶지 않아. 나는 단지, 표를 사는 법을 몰라서, 멀미가 너무 심해서, 집을 떠날 수 없는 이유가 있어서, 아니면 그냥 길을 잃어서, 멍한 얼굴로 읽을 수 없는 노선표를 들여다보며 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 곁에 있고 싶어. 자기 삶이 잘못되었다는 생각 때문에 무섭고 외로워서 그 사람들이 울고 있을 때, 다가가서 그렇지 않다고 말해줄 거야. 그 사람들에게도 누군가가 필요하니까.
나도 그래 진경아, 세연이 중얼거렸다. 나 역시 무섭고 외로워. 버스? 이게 버스라면 나 역시 운전자는 아니야. 난 면허도 없고, 그러니 운전대를 잡을 일도 아마 없을 거야. 그건 우리보다 젊은 사람들이 할 일이야. 하지만 우리 이제 어른이잖아. 언제까지나 무임승차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나는 최소한의 공부는 하는 걸로 운임을 내고 싶을 뿐이야. 어떻게 운전을 하는 건지, 응급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정도는 배워둬야 운전자가 지쳤을 때 교대할 수 있잖아. 너는 네가 버스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우리 모두가 버스 안에 있다고 믿어. 우린 결국 같이 가야 하고 서로를 도와야 해. 그래서 자꾸 하게 되는 것 같아, 남자들에게는 하지 않는 기대를.’
여성, 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도 연대하기 어려운 다양성, 그 안의 혼란에 집중한 이야기라 남성과의 관계 맺기, 싸움의 방향, 무너뜨려야 할 구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건 다른 소설의 몫으로 남겨뒀겠지. 등장하는 남자는 의식을 잃은 어린 서균, 윤슬에게 험한 말을 하던 동료 사진 작가 김, 채이를 추행한 A교수, 리벤지포르노를 퍼뜨린 걸로 추정되는 미진의 남자친구, 진경에게 집적대는 페친들 정도가 기억난다.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이 빼고는 다 나쁜놈이네. 좋은 남자도 있는데 하필, 하는 말은 하고 싶지도 않다. 좋은 남자만 있는 세상이면 애초에 고통 받는 여성들도, 싸움을 고민할 필요도 없다.
여성주의 운동 흐름이나 노선, 대립 지점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와중에 오간 혐오의 말, 상처, 소외감은 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더는 방법이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당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분노와 울분도 전혀 모를 말은 아니라 또 막막해진다.
진경이 율아에게 마음으로 건네는 말을 나도 내 아이에게 해 주고 싶다.
‘사랑하는 딸, 너는 네가 되렴. 너는 분명히 아주 강하고 당당하고 용감한 사람이 될 거고 엄마는 온 힘을 다해 그걸 응원해줄 거란다. 하지만 엄마는 네가 약한 여자를, 너만큼 당당하지 못한 여자를, 외로움을 자주 느끼는 여자를, 겁이 많고 감정이 풍부해서 자주 우는 여자를,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결점이 많고 가끔씩 잘못된 선택을 하는 여자를, 그저 평범한 여자를, 그런 이유들로 인해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네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나도 나는 너를 변함없이 사랑할 거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