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 -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
김보라 쓰고 엮음, 김원영, 남다은, 정희진, 최은영, 앨리슨 벡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8월
평점 :
품절


-20200125 김보라

나의 1994년.

은희보다 4살 어린 나는 국민학교 4학년이었다. 경기도 도농복합지역 나 살던 동네는 아직 군이라 불리웠다.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은희가 사는 서울은 사는 친척 하나 없는 별세계였다.
이른 봄에 할머니댁에 머물던 큰아빠가 돌아가셨다. 치질 수술 받고 입원했던 아빠가 일찍 퇴원해서 집에 왔다. 아빠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다가 울었다. 형이 죽었어. 장례 후 큰아빠의 외아들인 사촌이 놀러왔다. 나랑 동갑이지만 오빠라고 불렀다. 명절마다 만나면 나를 때리고 놀려서 울리던 사촌이 그때는 기가 많이 죽어 있어서 가엾게 느껴졌다.
큰아빠 죽음 이후 아빠가 많이 아팠다. 입이 한 쪽으로 비뚤어졌다. 신경과에 가니 뇌졸중을 의심하다가 검사해 보니 뇌졸중은 아니라고 했다. 용하다는 침쟁이에게 갔더니 침을 놓아주면서 중풍도 아니라고 했다. 웅어라는 물고기를 누가 구해다 주면서 그걸 저며 한쪽에 붙이면 돌아간 입이 돌아온댔다. 붙이는 꼴은 못봤고 처음 보는 특이한 물고기가 살아 있을 때 한참 구경했다. 오리인지 거위인지 목 따고 피를 마시면 낫는다고 그걸 구해다 먹였다는 소리도 들었다.
여름이 아주 무더운 해였다. 아빠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동네 뒷산에 자주 올라갔다. 숲의 그늘은 짙푸르렀지만 그래도 무더웠다. 바위에 앉은 아빠는 불경을 꺼내 읽기도 하고 명상하는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낯선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매우 힘겨워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어디가 왜 저렇게 아픈 걸까. 얼른 나았으면 싶었다.
부모님이 가게를 열었다. 두 분 다 바빠졌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도 엄마가 없어 쓸쓸했다. 가게에 가면 시계가 아주 많았다. 탁상시계들 알람을 울려 다양한 멜로디를 감상했다. 시계 바늘을 손끝으로 빙빙 돌려 뻐꾸기를 열두 번 뻐꾹하고 울게 했다. 조명을 받은 진열품들이 눈이 부셨다. 다 파는 물건이었고 내 것은 하나도 없었다.
큰 빚을 내어 가게를 연 아빠는 잠을 못자고 엄마에게 가게를 접자고 매일밤 졸라댔다. 엄마는 가게 일보다 아빠한테 시달림 받는 걸 더 힘들어했다. 아빠는 가게를 지키는 대신 친구들과 술을 먹으러 나가거나 옆옆 양복점에 가서 아저씨들과 고스톱과 포커를 쳤다.
나는 일기를 열심히 쓰는 아이였다. 월간 학습지 뉴턴은 밀렸지만 일기는 매일 꼬박꼬박 썼다. 학교 담임 혜영 선생님은 일기를 읽고 아빠 아프신 데는 어떠냐고 상냥하게 물어주셨다. 일기장마다 상세하게 멘트를 달아주셔서 일기 쓰는 맛이 있었다. 일기장 맨 마지막에 내가 궁금한 것들-하고 여러 물음을 끄적여 놓은 게 있었는데 거기에 일일히 답을 해 주셔서 굉장히 부끄러웠다. 어느날 고칠 물건이 생겼다면서 방과후에 나를 티코 옆자리에 태우고 일부러 우리 가게를 찾아가셨다. 엄마에게 내 칭찬을 많이 하고 가게가 잘 되길 아빠가 쾌차하길 빌어 주셨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혜영 선생님은 나를 남겨서 다음 날 친구들이 아침자습 시간에 풀 문제를 칠판에 적는 일을 시켰다. 분필 글씨는 반듯반듯 쓰는 게 어려웠지만 재미있었다. 반 아이 하나가 왜 쟤한테만 자습 내는 걸 시키냐면서 샘을 내기도 했다.
학교 생활은 바빴다. 혜영 선생님 권유로 합창부에 들어가 대회 준비를 했다. 단발머리의 합창부 선생님은 자꾸 검은 뿔테 안경이 흘러내렸고 마음이 여렸다. 어떤 아이가 험한 말을 해서 선생님을 울리기도 했다. 걸스카우트 활동을 해서 학교에서 야영도 하고 자연농원(지금 에버랜드)에 가서 자고 온 적도 있었다. 한 주에 한 번 교육청에 가서 과학실험 수업에도 참가했다. 바빠도 재미있는 날들이었다.
같이 과학실험 수업을 다니던 옆 짝꿍을 좋아했다. 울프컷을 하고 눈이 쳐진, 손가락이 짧뚱하면서도 바이올린을 잘 켜는 남자애였다. 반 아이들은 그 애를 말대가리라고 불렀다. 3년 연속 같은 반이었는데 4학년이 되면서 좋아하게 되었다. 어느날 시장에서 엄마가 사준 핫도그를 먹으며 길을 가는데, 말대가리와 마주쳤다. 너는 길에서 그런 걸 사먹니? 하는 말에 너무 부끄러워서 이후로 길에서 음식을 사먹는 일이 (거의 평생) 없어졌다. 학년 말에 짝꿍이 전학간다고 해서 정말 슬펐다. 마지막 날 그 애 가방 속에 편지와 초콜릿을 몰래 넣었다.
두 학년 아래 동생 반에 성수라는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사고 이후 아이들에게 너 다리 무너졌대 하고 놀림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나도 얼굴을 아는 아이라 뉴스를 볼 때마다 자꾸 성수 얼굴이 생각이 났다.
학교를 마치면 피아노를 배우러 갔다. 란 선생님은 친절하게 피아노 뿐 아니라 청음, 시창, 온갖 음악이론을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다. 음악이론 쪽지시험을 봐서 100점 맞은 개수만큼 백원짜리 동전을 쥐어주셨다. 나는 동전 한움큼을 들고 아래층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을 사 먹었다. 아빠가 아프다고 울먹이는 내게 란 선생님이 같이 기도하자고 위로해 준 기억이 난다. 다음해에는 교회 성가대에 나를 데리고 가서 반주를 시켰다. 란 선생님은 피아노대회에 나가고 싶다는 내게 별도 레슨비도 받지 않고 추가로 레슨을 해주셨다. 피아노가 없는 내게 주말에도 언제든 연습하러 오라면서 다른 애들 없는 시간에도 학원을 열어주셨다. 수시로 진행 상황을 점검해주고 어느 주말에는 자장면도 사 주셨다. 처음 나가는 대회라 너무 긴장한 나는 무대를 내려오면서 펑펑 울었다. 상을 탔는데도 내가 너무 못쳤다고 생각했다.
여름방학 때 란 선생님은 아이들을 데리고 수안보 여름캠프에 갔다. 학원에 안 다니는 동생들까지 데려오라고 하셨다. 수영도 하고 놀이기구도 타고 재미있게 놀았다. 캠프 기간 중 김일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면 이제 통일이 되는 건가 싶었다. 캠프를 마치고 집에 돌아갔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군은 인구가 무럭무럭 늘어 다음해에 시가 되고, 국민학교는 다음다음해에 초등학교가 되었다. 4학년은 어린이라 부를 마지노선이었던 것 같다. 바로 한 해 뒤에는 2차 성징이 시작되고, 어른 흉내를 내고, 재미와 기쁨보다 우울함이 삶에서 더 비중을 늘리기 시작했거든.
큰아빠는 심한 두통에 시달려서 시골에 쉬러 내려왔는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병원에 보낼 생각은 안 하고 골방에 가둬놓고 쉬쉬하며 아픈 큰아빠를 구박만 했다고 한다. 큰아빠가 다 죽을 지경이 되서야 할아버지가 택시에 태워 병원에 가는 도중에 돌아가셨다.
아빠는 점점 미쳐가고 있던 건데 그 상황을 알아차릴 정신의학적 지식이 그때 우리에게 있었을 리가 없다. 거의 1년 간 수면장애에 시달리던 아빠가 조현병 발작으로 망상에 빠져 식구들을 죽이려고 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정신병원에 실려갔다. 그후 오랜동안 우울증, 자살시도, 알콜중독으로 주변을 힘들게 했다. 딱 지금 내 나이였던 아빠는 왜 아픈 사람이 되었을까. 유전적 소인에다 그 난리를 지켜보고 겪은 나는 내가 그렇게 아픈 사람이 될까 봐 늘 걱정하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에 골몰한다. 약과 병원을 싫어하고 술로 버티던 아빠와 달리 다행히도 나는 언제든 병원으로 달려갈 마음가짐이 되어있다.
일기 쓰는 습관은 오래 따라와서 지금도 클라우드노트앱에 가끔 쓴다. 돌아보면 행복할 때는 일기를 잘 안 쓰는데 가장 힘들고 우울한 시기의 기록만 잔뜩 남아있다.
전학 간 짝꿍의 소식은 한참 뒤 특이한 방식으로 전해듣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옆 도시로 멀리 통학하게 되었는데, 고1 짝과 초등학교 때 이야기를 하다가 말대가리가 이사간 곳이 고1 짝이 살던 곳인 것을 알게 되었다. 고1 짝과 말대가리는 사귀었었는데, 말대가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담배도 피우고 오토바이도 타면서 방황을 많이 했다고, 장난 아니었다는 말을 했다.
아, 그 애가 전학가고 얼마 안 되서 같은 반 여자 아이가 내게 말을 했다. 너 그 애 가방 속에 편지랑 초콜릿 넣어놨더라? 그걸 들키다니 너무 창피했다. 그런데 걔는 왜 남의 가방을 열어봤을까. 걔도 뭘 넣어 두려고 했나. 편지랑 초콜릿은 원래 수신인에게 무사히 돌아갔을지 여자 아이가 낼름 빼다 먹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김일성이 죽고 나서도 삼대 세습을 하며 북한은 아직 연명하고 있다. 통일은 언제 될까.
첫 직장이 광진구, 성동구 인근이어서 어느 날 동료의 차를 타고 성수대교를 지날 일이 있었다. 멀찍이 놓인 위령탑을 보았다. 이상하게도 어린 성수의 얼굴이 여태 생각이 났다. 학생들이 학교에 가다가 죽는 사회는 수학여행을 가다 죽는 사회로 그대로 남아 있어서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은 슬픈 세상이었다.

혜영 선생님도, 란 선생님도, 정말 좋은 분들이셨다. 두분 다 나도 모르는 사이 선생 후계자 양성을 하고 계셨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 분들만큼 좋은 선생이 되지 못했다. 베토벤 선생님이 안 되려고 기를 쓰긴 했는데, 혜영, 란, 영지 선생님만큼 아이들에게 다정하진 못했다.
나는 자기가 싫어진 적이 있냐고 묻는 은희로 오래 남아 있었다. 나 자신도 자라지 못한 나머지 더 어린 친구들에게 영지 선생님처럼 맞지 말라고, 우울하고 힘들 땐 손가락을 보라고, 나쁜 일이 닥치면 기쁜 일이 함께 한다고, 세상은 신기하고 아름답다고도 말을 건네지 못했다.
다정하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선생님들이 없었다면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걸 내내 알지 못하고 살았을텐데. 그걸 다른 사람에게 되돌려주는 일에 너무 인색하게 살았다. 마냥 낙관하기에는 확신이 없었고 비관이 더 많았다. 그런데 어린 내게 필요한 건 정답도 정확한 예언도 아니었다. 그냥 따뜻함이면 충분했잖아.
그러니 또다른 은희들이 제 삶도 언젠간 빛이 날까요? 하고 내게 묻는다면, 너는 지금도 눈부시고 앞으로는 더 그럴 거라고 말하는데 주저하지 말아야겠다.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가끔 돌아보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시나리오라는 글 자체를 처음 읽어 보았다. 이게 영상이 된다는 게 신기하다. 책을 읽기 전에 이상은의 음악이 깔린 티저만 봤었다. 나는 긴 영화를 잘 보니 영화도 곧 봐야겠다.

책 뒤편에 영화에 대한 감상과 나름의 해석을 적은 글들도 흥미롭게 읽혔다. 같은 컨텐츠를 보고도 가진 관점과 경험과 배경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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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01-26 1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 같다..... 반님의 인생사 서술을 듣고 있으면, 어쩐지 울멍울멍한데 또 담담하기도 하고,
근데 또 그런 게 어쩐지 좋고 그러네요....

반유행열반인 2020-01-26 14:58   좋아요 0 | URL
울멍울멍 동그라미 아이콘 떠오르네요. ㅎㅎㅎ

무식쟁이 2020-01-26 2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채기투성이. 잉~ 아푸다.. ㅠㅠ
글쓰기가 업인 사람(특히 소설가)은. 아픈 뼈와 살을 드러내고 곱씹고 갈아내서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 같아서.. 아프지만 언젠가는 멋진 소설로 승화를...


반유행열반인 2020-01-27 00:25   좋아요 0 | URL
생채기랄 것도 없고 안 아프고 글쓰기 업도 아니고 뼈 살도 안 드러나고(순살치킨?!) 소설가도 아니고 댓글 온통 오류 투성이 아닌가요?! ㅋㅋㅋ그래도 다정해서 마냥 좋은 무님.

- 2020-02-02 0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 94년을 지나오셨군요. 언제나 좋은 선생님을 만난 이야기는 좋아요. 좋은 어른 되야겠어요 ㅜ
벌새 시나리오 참 좋죠. 저도 좋았는데 이런 독후감 읽으니까 더 좋으네요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0-02-02 09:13   좋아요 1 | URL
이 책은 순전히 쟝쟝님 덕에 읽은 거에요 ㅎㅎㅎ좋다고 하시면 믿고 읽습니다 ㅎㅎㅎ은희 이야기 보니 나의 94년 돌아보고 싶더라구요. 나의 미시사.

- 2020-02-03 19:14   좋아요 1 | URL
반님의 미시사~! 우리들의 미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