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 사회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위한 빈곤의 인류학
조문영 엮음 / 21세기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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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3 조문영 엮음

내가 겪은 가난을 생각해 본다. 내내 가난하지는 않았다. 부모는 빈약하나마 경제활동을 계속했고 근근히 먹고 살았다. 우리집이 부자가 아니라는 건 알았다. 아마도 가난한 것 같다는 생각은 했다. 경제적인 부분보다는 가정폭력과 아빠의 정신건강이 더 큰 문제였다.

이십 대 초반 자립을 꿈꾸면서 첫 곤궁함에 부딪혔다. 왕복 네 시간 가까이 걸리는 통학도 힘들었고 아빠의 주사도 벗어나고 싶었다. 엄마와 함께 한 가출 이후 나만 서울에 남게 되면서 갑작스럽게 독립하게 되었다. 국립대라 싼 편인 등록금을 대준 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월세와 생활비는 집에서 지원해주지 않았다. 다시 집으로 들어오길 바라고 그랬을 것이다. 월세랑 밥값이랑 교통비까지 60만원은 있어야 버틴다. 과외 알바를 두 개 하면 마련할 수 있는 돈이었다. 중개업소에 첫 달 과외비의 절반을 떼어주는데 한 달만에 짤리면 정말 큰일이 났다. 다음 과외 구할 때까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다녔다. 같은 동아리에는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부모님에게 생활비와 집세는 물론 넉넉한 용돈까지 따로 챙겨 받는 동기와 선후배들이 있었다. 공부하며 돈을 벌며 동아리 활동까지 열심히 하는 건 꽤나 버거웠다. 슬프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빈정상하기도 하면서 마음이 자주 뒤틀렸다. 영화 기생충에서 충숙이 돈이 다리미라고 했다. 항상 너그럽고 친절하게 대해주고 여럿이 먹는 술값 밥값 깍두기 시켜주는 선배들을 볼 때면 고마우면서도 비참한 기분이 자꾸 스쳤다. 나는 누군가에게 베풀 수 없는 너그러움이었으니.

그나마도 스스로 벌 수 있을 때는 다행이었다. 갑자기 아토피성 피부염이 심해졌다. 가려워서 잠도 못자고 상처 때문에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한창 예쁠 나이에 흉해진 외모는 자존감까지 박살을 냈다. 크게 패배한 마음으로 집에 아쉬운 소리를 했다. 월세와 병원비를 보태주면서 아빠는 온갖 싫은 소리를 해댔다. 잘 걷지도 못하는 내게 다시 장거리 통학을 하라고 했다. 겨우 회복을 하고 졸업 한 학기 남기고 귀향할 때까지 버텼다. 복지 정책으로 지원금 주면서 간섭하는 국가라는 아빠의 느낌이 이런 것일까 짐작만 할 뿐이다.

집에 돌아가고 일 년 만에 다시 가정폭력을 피해 엄마와 집을 나왔다. 아르바이트와 장학금으로 모아둔 이전 임차 보증금은 아빠가 미리 빼앗은 상태여서 달랑 아르바이트로 모은 백삼십만원만 들고 있었다. 대학 졸업하고 수험생/취준생 신분이었다. 보증금 백에 월세 삼십 반지하를 구해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고 공부를 했다. 이상하게 가난해지면 병이 도진다. 퐁퐁 날리는 곰팡이 포자 속에서 아토피성 피부염과 싸우며 시험에 합격하고 취업을 했다. 반지하를 벗어났고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되었다.

그렇지만 가난은 언제나 쉽게 다시 돌아온다. 이제 막 새 전세집으로 이사를 마쳐 모은 돈 다 털어넣고 몸이 아파 병가 중인 상태에서 아기가 생겼다. 낳기로 결정하고 나니 역시 또 돈이 문제였다. 전세금에 부은 돈 일부를 엄마에게 받고 은행에서 사천만원 대출 받아 신혼집을 구했다. 혼인신고만 하고 가장 저렴한 세간들을 사모아서 살림을 차렸다. 6개월 후에 아기가 태어났다. 단열이 안 되는 전세집 벽에는 결로가 맺히고 곰팡이가 생겼다. 부모 양쪽다 피부염 앓는 유전자를 물려준데다 환경까지 엉망이니 어린 아기는 아토피성 피부염을 심하게 오래 앓았다. 한창 귀여울 시절 양볼에 진물과 피가 흐르는 커다란 상처를 긁어대며 못 자던 아기를 생각하면 여전히 슬프다. 다행히 지금은 멀쩡하다.

가난을 벗어난 방법은 단순하다. 학부 5년 대학원 10년 끝에 힘들게 학위를 얻은 남편이 월급 잘 주는 기업에 취직했다. 주택담보대출이랑 학자금대출 같은 빚이 억대로 남아 있어도 그냥저냥 갚으며 먹고 살 걱정은 안 한다.

개인의 운과 노력과 학벌로 빈곤을 벗어났지만 모두가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구조가 해결되지 않으면 오래 힘들게 일해도 많이 벌지 못 하는 사람들은 계속 힘들게 산다.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은 사는 일 마저 보장받기 어렵다.

이 책은 그렇게 벗어날 길 없는 가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연대하고 서로 도와가며 버티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빈곤의 인류학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과 대학생들이 반빈곤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고 알게된 점과 느낀 점들을 정리해 놓았다. 가난한 사람들, 이라는 말로 뭉뚱그릴 수 없을 만한 다양한 가난의 원인과 저마다의 살아남는 방식이 있었다. 용산참사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철거민의 삶, 마을과 지역단위의 연대, 노인, 쪽방촌, 홈리스, 장애인, 노점상, 영세상인. 이 책에 실리지 않은 가난은 또 얼마나 많을까. 실업, 질병, 사고, 이혼, 사업 실패, 유기, 탈학교, 가출, 폭력, 난민, 탈북민, 이주민 등등등. 누구에게든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난이 닥쳐올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에게는 오지 않을 일 겪고 싶지 않은 일 치부하며 가난한 사람들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다. 편견을 가지고 심지어 혐오한다. 온정적인 시선을 보내더라도 나보다 낮은 곳의 부족한 누군가에게 내가 뭔가를 베푸는, 그 때문에 권력을 가진 듯 굴면서 상처를 만들고 인권을 침해하기도 한다.

빈곤을 싸워야 할 것으로 삼고 힘들어하는 사람들 곁에서 함께 행동하고 있는 활동가들이 참 대단해 보였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덕에 조금씩 더 나은 세상이 되고 있을 것이다. 모두가 그런 활동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무엇이 잘못된 것이고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은 무엇일지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비웃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책이나 영화를 통해서라도 내가 놓일 수도 있었던 (있을) 위치의 사람들이 내는 목소리를 계속 들어야겠다. 그 입장을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조금이나마 이해해보려는 노력을 계속해야겠다. 할 게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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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3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23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20-01-23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반유행열반인님 글을 읽으니 우리는 우리가 당하고 싶지 않는 경험을 원치 않게 하는 이들을, 마치 그것인양 바라보는 것에 익숙한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어쩌면 그들이 우리 대신 그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일지도, 우리가 조금 운이 좋았을 뿐임에도 그런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되네요...

반유행열반인 2020-01-23 15:46   좋아요 1 | URL
운이 좋았고 대신 겪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만으로도 슬프고 죄스러워지네요.

북다이제스터 2020-01-23 17: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글에 크게 공감합니다. 엉뚱하지만 반우행열반인 님께서 요즘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책 <팩트풀니스> 읽으시면 무엇이라 하실지 퍼뜩 궁금해집니다.
즐거운 설 명절 보내세요. ^^

반유행열반인 2020-01-23 18:17   좋아요 1 | URL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모르는 책이라 길게 드릴 말씀이 없는데 남들이 좋다 하면 슬쩍 엇나가는 못된 습벽이 있습니다...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0-01-23 18:48   좋아요 1 | URL
북플에선 짤리던 뒷부분 새해인사가 피씨버전에선 보이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북다이제스터 2020-01-23 18:53   좋아요 1 | URL
저도 북플로 보는 중이라 글
뒤에 무슨 말씀하셨는지 현재 모릅니다.
알라딘도 이 문제 알텐데... 바쁘거나 기술적 어려움이 크거나, 돈이 없거나, 셋 모두이거나 그럴 것 같습니다. ^^
감사합니다. ^^

무식쟁이 2020-01-24 18: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삶에서 꺼내온 아픈 언어라 먹먹하게 다가오지만.
또 이렇게 스스로 치유해가시는 씩씩한 열반인님. 정말 멋지신 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

반유행열반인 2020-01-24 18:30   좋아요 0 | URL
제가 뭐가 멋져요. 좋은 말씀 건네주시는 무님이 더 멋지심ㅎㅎ 아프고 치유하고 할 거 없어요 이제 ㅎㅎ자본주의에 적응 잘 해서 소비의 노예하고 알라딘 플래티넘 몇 년 계속 하고 ㅋㅋㅋ나 맨날 낭만파괴해서 죄송해요...그래도 콩깍지는 일찍 벗겨드리는게 실망을 덜 하시는 길로 알고...

2020-01-25 1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25 1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