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읽는 법
베티나 슈탕네트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9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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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1 베티나 슈탕네트

모짜렐라슈나이저-너의 거짓말
http://naver.me/FfmLlBey
친밀함과 관심을 내보이며 다가와 단물만 쓱 빨고 사라진 아이 하나에 분개한 스물한 살 꼬꼬마는 미니홈피 일기장에다 동시 같은 걸 끄적여 놓았다. 동아리에서 베이스 치는 오빠가 그걸 보고 야 여기에 내가 곡 붙여도 되냐, 하고 노래를 지어왔고, 졸업 후 친한 사람 몇몇이 모여 얼마간 밴드를 할 때 그 노래도 대표 합주곡이 되었다. 홍대 앞 클럽 관객 없는 무대에서 몇 번의 공연을 하고, 노트북과 믹서와 마이크와 옷걸이를 휘어 스타킹으로 감싼 자체제작 팝스크린을 들고 남의 연습실을 전전하며 어설프게 녹음도 하고, 밴드 멤버 중 제일 재주좋은(잉여력 넘치는) 기타리스트(지금 같이 삼)가 엉망인 내 음정 음색을 이런저런 필터로 위장, 믹싱, 마스터링해서 디지털 음반까지 발매했다. 그 망령은 각종 음원 사이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도 모르는 사이 대륙진출도 함… http://bar.qianqian.com/ipad#search/모짜렐라/
아무튼 네 곡 담긴 EP의 타이틀이 될 만큼 거짓말에 관심이 많은 젊음이었군요.

엄마 아빠가 가게를 하실 때 사기 당하는 무서운 상황을 목격한 적이 있다. 양복을 입은 멀끔하게 생긴 중년 남자가 가게에 들어와 물건을 고르고 수표를 내밀었다. 수표 금액에 비해 저렴한 물건을 구입한 남자는 거스름돈으로 받은 현금을 쥐고 사라졌다. 남자가 나가고 나서야 수표 조회를 해 본 부모는 뒤늦게 확인한 도난수표 문구를 보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가게 문 밖을 뛰쳐나가보았지만 남자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때부터인 것 같다. 다른 사람과 그들의 말과 글과 행동을 대할 때의 기본값이 의심과 불신이 된 것이. 나는 속는 걸 싫어하고 처음에는 아무 것도 믿지 않아요, 하는 말에 엄마는 어째서 그러냐고, 자신은 왠만하면 앞에 마주한 사람의 말이 다 진짜라고 여긴다고 내가 이상하다고 했다. 내가 이상한가요. 이상하군요.

스스로 매우 솔직한 편이고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데 주저함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살면서 했던 거짓말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가장 큰 거짓말은 무엇이었나?
와, 생각났다. 진짜 왜 그러고 살았냐 싶은 사례가. 나는 내가 죽었다고 거짓말 한 적이 있다.
열여덟 살 때였다. 내가 자주 놀던 피씨통신동호회에 굳이 차명의 아이디를 새로 만들어 게시판에 글을 남겼다. 이곳 이용자인 누구누구가 학교 4층 창밖 내다보며 까불다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얘가 맨날 이 동호회에서 놀던 게 생각나서 소식 전하러 왔습니다.
추모글이 올라오고 난리가 났다. 며칠 후에야 뒤늦게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에 인터넷이 안 되어서 접속 못하는 사이 친구 새끼가 장난글을 올렸다는 해명글을 올렸다.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야이 관종새끼야 니가 지어낸 거지 하는 싸늘한 반응도 동시에 얻었던 것 같다.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정말 관심을 끌려고 했던 것도 같고, 죽었다 해놓고 동호회 활동을 접을 굳은 결심이었던 것도 같다. 그 굳은 결심이 별로 안 굳어서 다시 쪼르르 접속한 게 문제지.

사실 거짓말한 직후에는 내가 잘못인 줄도 몰랐다. 그냥 민망하고 창피하다는 기분이 잠시 들었고, 금세 잊었다. 그게 잘못인 것은 얼마 후 뼈져리게 느끼게 되었다. 같이 수다떨고 놀던 H라는 아이가 친구와 오토바이를 함께 타고 가다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게시판에 올라왔다. 모두 믿을 수 없어했다. 전에 누구누구처럼 장난일 거라고 했다. H와 가까운 사람 몇이 확인해주고 조문을 갔다온 뒤에야 H의 죽음이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나는 슬픔과 함께 감당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제서야 거짓말의 무거움을 조금은 알아먹게 되었고 함부로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 아침 대양에 빠진 건포도향 커피를 진하게 내리고 허니버터비스킷을 구워 꼬맹이들과 함께 먹으며 이 책을 펼쳤다. 며칠 전 십대가 된 큰꼬맹이가 책 제목을 소리내어 읽으며 호기심을 보였다.
거짓말 읽는 법?
응. 거짓말이 옳다 그르다 하는 책 아니고, 거짓말이란 무엇인가 알아보는 책이야.
그렇군. 거짓말에는 상대방을 위한 거짓말이 있고, 세상을 좋게 하려는 거짓말도 있고, 자기 이익을 위한 거짓말도 있어.
야, 그런 건 어디서 봐서 아는 거야?
고릴라랑 고양이 나오는 책 있잖아. 고릴라가 텔레비전 부쉈는데 고양이가 자기가 그랬다고 감싸주잖아. 고양이는 고릴라를 정말 사랑해서 거짓말을 한 거야.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우리는 친구 이야기였다. 거짓말을 생각할 때 대부분은 남을 속이고, 그로 인해 상처를 주고, 그러니 거짓말은 나쁘다, 하는 담론에 매몰되고 만다. 그런데 꼬맹이가 대뜸 선의의 거짓말부터 이야기하는 게 놀라웠다. 언젠가 머리 큰 꼬맹이가 다 엄마를 위해서야, 알면 쓰러져, 하면서 나를 속이는 미래를 생각한다. 콜버그 도덕성 발달이론에 별로 맞지 않게 자유롭게 자라는 꼬맹이를 보면 나의 양육 태도와 내가 설파한 프로파간다가 얘 인성과 사회성에 과연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지 잠시 회의감도 든다. 네 인생이니까, 정신 단단히 차리고 잘 살려무나...내 말 너무 심각하게 듣지 말고…

이 책은 윤리, 도덕적 판단에서 벗어나 인식론의 관점에서 거짓말이 무엇인지 이해하고자 한다. 거짓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저해하는 것들을 하나씩 짚어간다. 예를 들면 거짓, 거짓말, 거짓말 하는 사람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잊는다. 누군가 나에게 거짓말을 한 번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른 이해를 방해한다. 거짓말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소통을 원하고, 대화가 이루어지고, 그 매체가 언어이기 때문이고, 또한 거짓말에 속는 사람이 바라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것은 거짓말이란 도덕적이지 못한 누군가가 자기 이익을 얻기 위해 누군가를 속이려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통념을 벗어나야 진정 거짓말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한나 아렌트의 생각 일기 중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며, 할 수 없다면 나는 자유롭지 않다.”는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거짓말을 할 능력도 있어야 하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자유도 전제되어야 한다. 단순하지가 않다. 뿐만 아니라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앎이란 무엇인가, 지식과 믿음과 의견의 차이는 무엇인가도 물어야 한다. 앎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니 자연스레 칸트의 철학도 이 책에 자주 등장한다. 저자는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은 하이데거의 세계, 끝없이 의심한 끝에 도달한 데카르트의 (그걸로 뭘 더 할 수 있겠어 싶은) 결론, 그리고 야스퍼스의 진실에 대하여에서 성토하는 거짓의 문제도 언급된다. 아 다 어려워...그래도 야스퍼스의 글을 인용한 부분은 왠지 적어 놓고 싶었다. 우리가 동등하고 평등한 존재로 만날 떄에야 가능한 함께 하는 생각에 대한 부분이다.
“우리는 상대가 진정성을 가질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나부터 먼저 속을 열어 보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나의 개방성이 진정성을 가지며, 그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줄 책임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있다. 나는 솔직함 그 자체이며, 내 목적을 위한 어떤 수단으로 개방성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또 내가 어떤 인간을 믿고, 이 믿음이 어떻게 자라나며, 그리고 이 믿음이 진실이라는 보상을 얻을지 아니면 환멸을 안길지 하는 책임 역시 나의 몫이다.”
거짓이 아닌 진실을 택해야 할 이유를 멋지고 용감하게 선언한 말로 들렸다. 누군가와 만나고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 고립되지 않고 ‘너’를 만나고 ‘우리’를 이루기 위한 전제 조건.

철학 담론은 확실히 어려워서 제대로 이해한 부분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드문드문 안다는 것, 믿는다는 것, 내가 거짓, 거짓말, 속이고 속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온 관점과 그와는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들에 관해 먼저 산 철학자들의 생각과 저자의 관점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뭔말인지 잘 모르는데 흥미롭게 읽히는 신기한 책이었다. ㅋㅋㅋ 반납 전에 다시 한 번 읽어볼까 생각 중이다.

거짓말에 대해 이야기 하자니 믿음에 대한 것도 궁금해졌다. 지금 내가 쓴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어떻게 진실과 거짓을 받아들일 것인가. 글을 쓴 내가 사실은 50대 미혼 남성에, 아이는 낳은 적도 키운 적도 없고, 아침엔 순대국밥으로 해장을 했고, 이 책을 읽지도 않고서 남이 써 놓은 글들을 여기저기에서 긁어모아 짜 맞췄을 수도 있지 않은가. 이 책에는 칸트도 한나 아렌트도 데카르트도 하이데거도 야스퍼스도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을 수도. 철학책이 아니고 거짓말을 잘 파악하는 요령을 담아둔 처세술 내지 자기 개발서일 수도 있잖아. 누구도 이런 의심을 하면서 남의 글이나 말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렇게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 정보를 수집하다가는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할테니까. 다른 사람과 아무런 연결고리를 만들지 못할테니까. 그러니 인간이 가진 기본값은 의심과 불신보다는 믿거나 ‘적당히 속아주는’ 능력인지도 모르겠다. 의심과 불신은 애당초 가능하지 않은 전지전능과 통제에 대한 욕심이다. 그러니 내려놓고, ‘나부터 속을 열어보이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삶을 살아야겠네, (이미 그러고 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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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01-21 14: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점점 물이 오르다 못해 넘쳐흐르는 반님의 리뷰.... 신년에는 독서신이 내리셨군요!!

반유행열반인 2020-01-21 18:09   좋아요 0 | URL
syo님 재치의 발끝만큼이라도 따라가고 싶은데요...그냥 마구잡이로 읽고 쓰는 요즘이어요 ㅎㅎ

무식쟁이 2020-01-24 18: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구잡이로 읽고 쓰는게 이정도라는 거죠?
(요즘 1일1페이퍼 하시는군요. )

반유행열반인 2020-01-24 22:00   좋아요 0 | URL
하루 하나는 아니고 이틀에 한 번 정도 올려요 ㅋㅋ복직 전 발악...

무식쟁이 2020-01-24 1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열반인님 목소리가 일케 이쁘시다구요?? 😲
전투적으로 걸걸허숙희 보이스일 것만 같은건 저만의 편견. 이게 바로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군요.

반유행열반인 2020-01-24 22:00   좋아요 0 | URL
저거 다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이펙팅...ㅋㅋㅋㅋ속고 계십니다. 제목부터 거짓말이잖아요.

2020-01-24 1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1-24 21:58   좋아요 0 | URL
우와아아아아!!! 진짜 이렇게나 비스무레한...왜 이럴까요 우리 ㅋㅋㅋ

초딩 2020-01-27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음사전의 오해가 떠오르네요~
오해: 실수로 알게된 상대방의 진실
ㅎㅎ
이 책 읽고 싶어요에 추가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01-27 13:16   좋아요 1 | URL
책 자체는 어엄청 나게 재밌진 않아요 ㅋㅋ철학책 좋아하시는 분들은 좋아할 듯해요. 네임드들이 막 한 번씩 번갈아가며 말 보태거든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