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연적편협 #라뮤나저 #나비소리 사람마다 각자 다른 환경에서 자라서 필연적으로 자기중심적 편협이 된다. 딱 자기자신이 보고싶은 대로만 보게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세상을 다른시각으로 통찰력을 키워준다. 책의 느낌은 재테크노하우 + 경제개념+사회통찰 에세이이다. 자기 자신을 상황(?)을 잘 알고 소비를 하면 된다. 주변에 경제개념없이 자신의 상황도 상기하지 않은 채 내실은 텅텅빈 채 과소비로 겉치장만 하다가 장렬하게 쪽박의 길로 접어든 사람을 여럿봤다. 자신에 맞게 소비하고 돈을 절약하고 나중을 위해 돈을 조금씩 모으는 것이 필요하다. 일하면서 느끼는 것은 성실함과 부지런함이 탑재한 사람과 일을 미루고 잦은 지각과 건들거림을 탑재한 사람은 그 나중이 확실히 다르다는 거다. 아무리 일을 끼깔나게 잘해도 그 사람의 태도와 행동 그리고 표정에서 신뢰가 가느냐 안가느냐는 판가름이 난다. 여기저기 돈을 많이 준다는 곳에 기웃거리다가 결국은 쪽박차는 그런 상황도 여럿봐와서 진득하게 자신의 스킬을 쌓으며 내실을 다지면 나중에는 빛을 보게되더라. 그래서 내 인생이 대박은 아니어도 성실과 꾸준함 그리고 부지런함이 몸에 배고 좋은 태도로 살면 나중에 중박이라도 하지 않을까하며 (韜光(도광): 빛을 감추고 밖에 나타내지 아니함. (양회): 덕을 기르고 종적을 감춤.)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이 아닌 속이 단단한 사람으로 덕을 기르려고 한다. 덕이 내가 기른다고 길러지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고전과 나보다 웃어른의 삶과 대화를 통해 배우기도 한다. P.75 사소하고 느린 변화라도 쌓이면 큰 변화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더딘 변화도 변화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편협에 갇혀서 자신이 보는 시각대로 운명본능대로 사람의 삶이 진행될 것이라는 착각이다. 가령 자신이 바라볼때에 불행해보이거나 삶이 고되어보일때에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속에서도 행복을 찾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사는데 자신의 잣대로 섣부른 판단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P.103 살면서 알게 되는 것 중 하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정말인지 의문을 가지게 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가진 고정된 관념과 편협한 사고방식에 의해 형성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과 책을 읽기전만 해도, 20살이 되기전에는 갇혀있는 나의 세계가 전부인 양 전부 다 아는것처럼 말하기도 하고 행동했다. 아무리 편협한 사고방식을 가지려하지 않아도 편협하고 모순된 하나의 인간인지라 틀을 깨어 생각하려 한다. 독서는 그런 틀을 부수는 것을 도와주기도 한다. 인생을 살면서 돈을 많이 벌며 여유롭게 살고자 하지만 적절한 균형은 하늘의 별따기이다. 하지만 인생의 균형감각을 찾자. 부모가 아이에게 어떤것을 줘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대책없는 사랑보다는 노력하고 성취하는 즐거움을 줘야한다. 아이가 무너질 것 같거나 포기하려고 할 때,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할때에 격려하고 지탱해주며 지지해주는 부모가 되야한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보다도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아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끊임없는 격려와 용기를 주려고 한다. 막상 하면 잘하면서 첫 시도를 두려워하고 시작도 전에 포기하기때문에. 자신의 컴플렉스는 과감히 무시해버리고 자신의 가능성을 믿었으면 좋겠다. 어릴때에 나는 키가 작아서 못할꺼라는 소리를 부모에게 듣고 자라와서 20살이 되기전까지도 키로 주눅들어 살았다. 사회생활해보니 크던 작던 어떻던간에 자신을 믿고 신뢰하고 확신에 차 있으면 어떤것이든 해내는 사람을 여럿 본 후에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 #자아충만해짐 #오~책좋음
#감옥에서보낸기쁨의편지 #고한율지음 #세움북스 #복음에합당한삶 #빌립보서강해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의 옥중서신중에 하나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빌립보서에는 바울이 기도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빌립보교회 성도를 위해서 항상 기도를 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나도 감사로 사는 삶을 살고자 애쓰는데 일상생활속에서의 감사로 충만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일을 전심을 다해 바쳤는데 바울에게 돌아오는 것은 감옥생활이었다. 행복을 주기는 커녕 언제 나올지 모르는 힘들고 막막한 고난의 시간에 바울은 어떻게 했는가 눈여겨보게 되었다. 빌립보교회의 성도처럼 같은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전에는 힘든일이 나에게 생기면 푸념과 원망이 뒤섞여서 죈종일 멘붕상태로 복귀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왜 나에게 이런일이 생길까. 푸념과 대상없는 원망과 머릿속에 저기 깊고 깊은 우물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쪼그리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었다. 비록 고난의 상황에 놓여있을지라도 나의 삶 가운데서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긴 어둠에서 밝은 빛으로 이끌어주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나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보았는가? 그리고 그 속에 여러일들이 있지만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 긍휼과 교제가 너무 귀하다. 하나님안에서 하나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하나.-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 2장3절- 겸손의 의미를 알아야하는데 "성경적 겸손"을 탑재해야 한다. 스스로 낮추되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최근 다툼이 있어서 힘이 빠져있는 상태였는데 나에게는 어느누구보다 나를 지켜주시고 나의 길이 가시밭길이던 꽃길이던 항상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었다. 나를 더 귀하게 여기시니 이럴수록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만큼 나도 나를 귀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며 평안함을 얻었다. 바울이 성도하나하나가 이단에 현혹되지 않으려 힘써야 한다. 성도의 탈을 쓰고 교묘하게 침투하여 모략을 펼치기도 한다. 정체를 숨긴 채 적극적인 포교로 혼돈을 주기도 한다. 교묘히 침투하여 한 사람의 인생을 흔들어놓다가 한 가정을 철저히 무너트리며 그 주변까지 어지럽혀 놓는 과정을 보면서 이단에 대해 더욱 알려힘쓰고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기 위해 기본 교리나 신앙의 기본기를 탄탄히 다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단이나 사이비는 갑자기 불현 듯 불시에 마음이 약해져 있을때에 다가온다. 믿음의 울타리를 단단히 다져야 한다. 저자의 물음에 한치의 망설임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저자가 생각했던 것과 같을 때에 사랑이 많으신 분이구나 그꼈다.< 교회 다니는 우리는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느끼는가? > 프로그램이 세분화되어 있고 사람의 입맛에 맞게 맞춰진 교회? 전혀 아니다. 서로를 품어주고 서로 세워주며 사랑으로 품는 교회가 찐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저것 따지기보다는 서로의 형편에 맞게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서로 채워가려고 하고 그 안에서 이루고자하는 것을 힘쓰며 주안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P.339 "어떻게 목사가, 어떻게 장로가, 어떻게 권사가 저럴 수 있어"라고 공격하기 시작하면 서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서로 불쌍히 여길 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기에 언제고 항상 강할 수만은 없음을 알아야 한다. 긍휼의 마음으로 사소한 것에 너무 날을 세우지 말고 싸움을 부채질하는 사람이 아닌 불을 끄는 소방관이 되어야 한다. 내가 사람들에게 궁금해도 그 호기심과 궁금증을 누르려고 하는 이유는 부채질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절제와 참음, 그리고 기다림을 하려고 한다. "어떻게 저래?"라고 하기전에 왜 그랬는지 한번 더 사랑으로 들여다봐주길. 바울이 말하는 관용은 자신이 움켜진 것에 염려하지 않는다. 내것이라고 움겨쥐고 욕심을 부리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닌 바울이 말하는 관용의 자세를 알며 모든것에 영원이 없음을 생각하며 관용을 베푸는 자가 되자. P.364 바울은 두가지, 즉 염려하지 않는 것과 기도, 특히 감사함으로 드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감사함을, 그리고 염려를 내려놓고 기도로 구하는 사람이되자.
#열번쯤은만나야틈이생깁니다 #홍성훈외2인지음 #훈훈 10대때부터 내 주변에는 몸이 불편한 친구도 꽤 있었고 그 부모님이 몸이 불편하셨던 경우도 있었기에 큰 편견과 장애에 대한 프레임을 씌워서 불쌍하다거나 동정하는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사람을 대할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를 존중해주는 것에서 사람과 사이에 신뢰가 쌓이게 된다. 어릴때에는 그래도 현재보다 장애가 있건 없건 함께 어우러져 사는 사회가 되었던 것 같은데 최근에 기사를 보더라도 오히려 역으로 퇴화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장애를 바라보는 인식이 21세기인데도 여전히 낮은 문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TV매체에도 반짝 유행만 탈 뿐 TV는 TV일 뿐 사회적인식의 변화는 아직도 갈길이 멀다.P.102 우리 사회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두기와 시기적절한 말을 건네는 데 좀 더 훈련이 필요합니다. 편견과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그릇된 행동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시의적절하게 건네는 말, 쓸데없는 참견이나 상대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가 절실하다. 장애가 있거나 자신이 생각했을때에 상대의 삶이 어렵고 불행하다고 혼자만의 생각으로 단정짓는 경우를 봐왔다. 상대의 행복과 불행을 단면적으로 바라보며 자기 마음대로 생각한 후에 판단을 내려버린다. 삶의 어떤 과정을 지났는가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대로 상대를 판단하고 불쌍하게 바라보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것도 사람을 바라볼때에 그릇된 사회적인식으로써의 판단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는 내 맘대로 상대의 행복과 불행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례한 언사를 제일 싫어하기에 말을 건넬때에도 조심한다. 읽으면서 나도 함께 대화에 끼는듯이 집중해서 보게되었다. 저상전기버스가 있지만 휠체어탄 분이 버스 탄 모습을 본적이 없다. 노약자나 어린이도 타면 급정거에 급출발에 불안한 전기버스를(나이든 여성이나 남성이 전기버스의 급정거에 자빠지는 모습을 두번이나 봤다. 기다려주지 않아놓고선 늦게앉은 사람탓을 해서 보는 사람도 민망해지는 상황)많이 타봤다. 제 시간에 도착을 해야하는 버스기사의 조급함을 보고 버스기사를 운영하는 CEO의 사회의식 변화되면 버스기사의 조급함은 조금 사라질까? 어릴때는 장애에 대한 인식을 어느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아서 막연히 몸도 한번 아프면 고질병처럼 계속 오랫동안 아픈상태가 지속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자라면서 친구따라 봉사도 하기도 하고 같은 학교친구중에 함께 어울리며 지내기도 했다. 사람을 대할때에 내 마음대로 재단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갖고있는 편견안에 가두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든 존중하고 공평하게 대하는 것이다. P.119 나의 슬픔 혹은 어떠한 현상을 해석하는 나의 슬픔을 상대방에게는 너무 드러내지 않는 것, 그것도 일종의 예의라고 보아요.P.120 상대방에게 별 도움도 안 되는 어설픈 위로나 연민을 투척할때도 많아요. 그야말로 투척이죠.P.162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바란다. 가산점이나 특혜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최소한 공평하게 편견 없이 평가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그것이다. 사회적 인식변화중에 제일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은 시기적절한 말을 건네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세 분의 대화에 함께 낀듯이 나도 내가 어떠한 생각과 의식을 하고 있는가 상기하는 시간이었다.
#럭셔리브랜드인사이트 #박소현지음 #다반 명품, 럭셔리는 낯설다 그리고 먼가 어렵다는 생각이 있다. 럭셔리의 개념은 무엇인가를 어떠한가를 깊이있는 안내로 설명해준다. 명품과 럭셔리의 차이점을 알려주고 럭셔리를 왜 알아야하고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저자의 탁월한 안목으로 들여다보았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럭셔리 브랜드는 어떻게 탄생하여 지금까지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것일까. 럭셔리브랜드를 운영하는 CEO의 지혜를 살펴보자. 자신의 브랜드 구축을 위해 과거를 돌아보고 유연한 사고로 중심을 잡고 심도있게 고민하고 내놓은 그들의 브랜드의 역사를 들여다보았다.P.55 굳어진 생각의 단점은 자신이 만든 틀 속에 갇히는 것이다. 그 틀을 깬다고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지 않는다. 속살은 어차피 다시 뼈처럼 단단해진다. 고수해야 할 점을 지키는 것과 고집을 부리는 것은 다르다. 트렌드를 만들어 가는 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이덴티티와 아름다움(나다움)을 지키며 방향을 정하며 나가는 것이다. 유일무이한 상품으로 어느 하나를 딱 떠올리면 그 상품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필수품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하는 필수품을 럭셔리라 칭한다. 럭셔리를 탄생시킨 사람들은 멋지고 매력적이며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 구축으로 삶을 달리하여 현세에 없더라도 그 후세가 브랜드를 이끌어가고 있다. 럭셔리의 대표인물중에 단연코 눈길을 끈 인물은 가브리엘 코코샤넬이다. 그녀는 탈코르셋을 벗어던지게 하며 현대 여성상을 그려 내었다는 것이다. 그 정도의 성공의 가두를 날아다니는 사람을 보면 완벽주의 그 자체이다. 만족을 거둘때까지 끊임없이 노력하고 부지런하다. 늦다면 늦은 나이인 일흔에 재기에 성공하여 10년이상 패션계를 떠났다는 것이 무색할정도로 정상에 우뚝섰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하는 그녀라니. 그림을 못그리니 한손엔 가위를 목에는 줄자를 두르며 부지런히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샤넬의 로고도 멋스럽지만 시그니처인 리틀 블랙 드레스가 내 기억에도 제일 각인되는 건 사실이다. 럭셔리를 읽으며 어떻게 판도가 바뀌는가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럭셔리를 왜 알아야하는가와 그 럭셔리를 만들어 낸 사람들의 일대기를 읽어내는 것은 흥미로웠다. 럭셔리를 배우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작가의 인생철학을 읽으며 그녀가 럭셔리하고 고져스한 여인이라는 것을 마지막 글에서 알 수 있었다.P.340 아무리 좋게 말해도 산다는 것, 일을 한다는 것은 괴로움의 연속, 생(生-살아있음)은 고(苦-괴로움)다. 하지만 생(生-살아있음)은 GO(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생(生-살아있음)은 못 먹어도 GO(전진)해야 한다.
#데미안 #헤르만헤세지음 #반석출판사 고전의 재독의 즐거움이 있다. 흘려보냈던 문장들이 다시 살아나고 과거 보았던 시점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을 즐기기도 한다. 데미안은 현시점으로 세번째 읽고 있다. 딱 내가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들을 데미안에서 찾아보고 있다. 싱클레어처럼 굳건한 내가 되어가는 과정중에 있는건가 싶기도 하고 내 속을 들여다본듯한 문장들을 보며 설레기도 했다. 책장을 넘기며 헤르만 헤세가 이 소설을 쓰며 느꼈던 감정이 무언가 알 수 있기도 한 시간이 되기도 했다. 살면서 느꼈던 것을 이렇게 축약된 한줄로 되다니.P.10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해석할 수 있는 건 우리 자신뿐이다. 우리는 그러한 존재다 이해는 하지만 내가 그 자신이 될 수 없는. 그래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소설을 읽고 에세이를 읽게 되는 것 같다. 싱클레어의 삶이 달라질때마다 다른 세계와의 이동으로 예전의 자신이 사라진 것 같은 자괴감에 빠지는 행동과 다른 세계에서의 적응을 하며 예전의 순수했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속상해했다. 후회와는 또다른 느낌일까. 예전의 자신이 아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어색함과 선한 사람에서 악한 사람이 되어버린 듯한 자신의 모습에 낯설게만 느껴지는 싱클레어에게서 완전한 자아가 생성되기전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싱클레어가 커가면서 크로머라는 큰 벽을 부딪히며 소심한 자아를 탈피하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밝은 세계에서 살아가고자 한다. 어두운 세계로 발을 내딛는 순간 그 수렁에서 빠져나오기란 여간 어렵다는 것이다. 한번 깊은 악의 늪에 빠지기 시작하면 나오기는 어렵다. 크로머의 세계와 데미안의 세계는 나의 삶속에도 누구나의 삶속에도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끌려다니며 살게 되면 얼마나 메마르고 피폐해지고 고통을 받는가 쉽고 빠른 길은 없고 그만큼의 댓가는 꼭 치루는게 인지상정이다. 어쩔 수 없이 그 곳에 빠져들더라도 빛처럼 다가 온 데미안은 밝은 세계로 이끌면서 삶의 주체가 누구가 되는지 일깨워주기도 했다. 청소년기에 나는 어땠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말그대로 질풍노도의 시기 말그대로 사춘기라 과장해서 말하면 성격이 그때그때 다르게 변하기도 했다. 하루는 너무 밝은 나, 또 하루는 소심한 나, 그 다음날은 있는 듯 없는 듯 쥐죽은 듯이 존재감없는 나로 살았다. 어떤것이 진짜 나인가 찾는 여정이 청소년기였다고 하고 싶다. 성격이나 자아생성이 되는 계기가 아니어서 뭐가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 어려운 나이. 나는 그랬다. 여러 세계의 문을 열고 나오면서 수많은 과정과 숱한 시행착오끝에 현재의 내가 되었다. 옛시절보다 오래산다고 하면 아직 반백년이 더 남았는데 나는 어떤 세계의 문을 열고 나아갈까는 내가 어떤 마음을 먹고 살기 나름이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는 데미안을 보며 좀 더 자유롭게 인물들을 풀이해가게 싱클레어에게 도움을 준다. 내면의 자아를 찾게 되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데미안을 현재 네번째 읽고 있나보다. 이제 조금 그 깊이를 알 것 같기도 하다. 나의 인생의 길잡이인 데미안은 누구일까. 내 삶을 누구에게 이해시키기보다 내가 중심이 되고 나를 찾는 내가 주체가 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느끼게 된 시점에서의 이 책은 나에게 나를 찾으라고 말하고 있다. 성인聖人이 될 수는 없지만 나를 찾고 커나가는 내가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