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 21세기 시선으로 읽는 동양고전
박찬근 지음 / 청년정신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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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시선으로읽는동양고전중용 #중용_박찬근 #청년정신

어지러운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단지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기 어려운 일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나의 중심을 잃지 않는 일이 더 어렵다. 외부의 정보와 판단이 넘쳐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비교한다. 무엇을 하든 누군가에게 보여지려는 태도가 누구에게나 스며 있다. 그러나 <중용>은 그 시선을 거두어, 다시 나 자신을 향해 보라고 말한다. 성찰 없는 앎은 흩어지고, 실천 없는 앎은 공허하다. 말뿐인 깨달음은 아무 힘이 없다. 앎이 삶이 되기 위해서는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 말과 행동의 일치함이 어렵다. 하지만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소용이 없다. 번지르르 말만하는 것이 많다.

<중용>은 기쁨과 분노, 슬픔과 즐거움이라는 네 가지 감정이 제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평화가 깃든다고 말한다. 이는 감정을 억누르라는 뜻이 아니라, 감정을 성찰하여 조화롭게 표현하는 지혜를 배우라는 가르침이다. 기쁨과 즐거움만이 가득한 날이면 좋겠지만, 인생에는 분노와 슬픔이 더 자주 찾아온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리고, 내 생각이 옳다고 믿으며 타인을 재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순간마다 내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반응하는가를 돌아보는 것이 중용의 실천이다. 분노의 불길 속에서도 한 걸음 물러서서 나를 성찰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도를 따르는 일이다.

고전이 주는 지혜는 시대를 초월한다. 오히려 지금 같은 혼돈의 시대일수록 더 절실히 다가온다. 공허한 말들이 난무하고 가짜뉴스가 판치고 거기에 더해져 인공지능으로 인해 진짜가 무언지 더욱 날을 서서 봐야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의 중심이 굳건히 서 있던 순간은 매순간 확인해야 했다. 마음은 자주 흔들리고, 그때마다 부러지지 않기 위해 애쓴다. 나의 감정이 극단으로 치닫지 않도록 조율하고, 사람을 만날 때에는 진심을 다해 대화하며, 무엇보다 지금의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잃지 않으려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다.

최근 남편과 나눈 대화 속에서도 '성찰’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재정 상태나 미래의 방향을 이야기하다 보면, 때로는 부끄럽고 현실적인 생각들이 스친다. 그러나 그런 대화야말로 가장 냉철한 성찰의 순간이다. 로또 1등이어도 서울에 있는 아파트를 겨우 산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단숨에 모든 것이 해결되는 세상은 없다.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으며, 유혹과 환상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 결혼 12년, 수많은 징검다리를 건너며 부서진 돌을 딛고 다시 일어서야 했다. 그 모든 과정이 결국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남편에게 뼈있는 말을 많이 했었다. <중용>은 그런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나는 매일 새벽 기도 시간에 나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를 드린다. 지혜와 현명함을 달라고, 그리고 내면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구한다. <중용>을 비롯해서 나에게 고전은 옛것이라고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도구다. 지금 나의 중심은 어디에 있지? 라는 질문은 나를 다시 일으킨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중심을 세우는 일 그것이 내가 매일 새롭게 배워야 할 도이다.

무엇이든 배우고 이루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매일의 기도와 러닝을 통해 마음과 몸을 단련하며 삶의 수행자로 살고자 한다. 내면의 중심을 세우는 일은 언제나 불안정하다. 때로는 ‘이게 맞나?’ 하는 의심이 든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면 중심은 쉽게 무너진다. 중용은 그 모호함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훈련을 요구한다.

결국 중용은 사유의 철학이 아니라 실천의 철학이다. 매일의 삶 속에서 중심을 세우고 다시 점검하라고 말한다. 도는 멀리 있지 않다. 도는 내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그것을 다잡으려는 그 순간, 나를 성찰하려는 그 의지 속에 있다.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은 거창하지 않다. 스스로를 성찰하고, 중심을 잃지 않으며, 매일의 삶을 단단히 살아내는 것. 그것이 내가 <중용>에서 배운 가장 단순하고 가장 냉철한 지혜다. 고전과 계속 친해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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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양자의 세계 - 처음 만나는 양자의 세계 처음 만나는 세계 시리즈 1
채은미 지음 / 북플레저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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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만나는양자의세계_채은미 #양자역학 #북플레저

나와 교양은 늘 친하지 않았다. 교양서적을 펼칠 때면 머릿속에 미세한 장벽이 생겼고, 특히 수학이 섞이면 그 장벽은 거의 벽처럼 느껴졌다. 양자역학이라는 말만 들어도 이미 머리가 복잡해지고, 왠지 내 세계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채은미 교수의 <처음 만나는 양자의 세계>는 그런 나의 인식을 부드럽게 무너뜨렸다.

이 책은 과학을 낯설고 어려운 언어가 아닌, 우리 일상과 연결된 이야기로 끌어온다. 저자는 물리학을 전공한 학자이지만, 과학을 말할 때조차 문학적 감수성을 잃지 않는다. 양자역학의 기본 개념인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 불확정성 원리, 양자 중첩과 얽힘 같은 어려운 용어들을 친절한 비유로 풀어내며, 마치 철학책을 읽는 듯한 사유의 깊이를 전한다. 조금 더 쉽게 풀이하려고 해서 그런지 나도 술술 읽혔다.

읽으며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불확정성 원리’의 철학적 의미였다. 우리는 늘 모든 것을 예측하고, 통제하려 하고, 불확실한 상황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양자 세계의 법칙은 명확하게 말한다. 세상은 본질적으로 불확실하며, 우리는 그 불확실성 위를 걸으며 살아가야 한다고.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존재의 자연스러운 상태다.

불확실성은 과학의 언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삶의 은유이기도 하다. 인간의 관계, 감정, 선택, 미래 — 그 어느 것도 완벽히 측정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 그것들이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과학을 이야기하면서도, 인간의 삶을 말한다.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도 사유하고, 선택하고, 나아가는 태도가 곧 ‘양자적 삶’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읽는 내내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불확실성을 얼마나 견딜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니다. 뭔가 확실하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인데 그것에 대한 이해를 끌어올렸다. 낯선 양자의 세계를 가까운 세계임을 알려주었다.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내일의 일조차 알 수 없는 시대다. 그러나 저자는 불안 대신 이해를, 두려움 대신 호기심을 제안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하는 과학의 태도는, 불확실한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태도와 닮아 있다.
이 책은 차가운 과학을 따뜻한 언어로 번역한다. 이해보다 공감이 먼저 오고, 논리보다 통찰이 더 깊다. 양자역학의 수식은 여전히 어렵지만, 그 안에 담긴 세계의 질서와 인간의 삶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불확실성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가는 우리의 여정, 그 흔들림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 어쩌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매일 살아내는 ‘양자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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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 그림 찾기 - 차별과 편견의 경계에 갇힌 사람들
박천기 지음 / 디페랑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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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그림찾기_박천기 #디페랑스 #차별과편견의경계에갇힌사람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됐는기? 그 말이 실제로 작동하기란 여간 어렵다. 다름은 불편함을, 불편함은 곧 거리감을 만들기도 한다. 인간은 낯선 것 앞에서 경계심을 한껏 드러내며, 자신과 같은 결의 익숙한 영역 안에서 안정을 찾는다. 저자는 차별을 개인의 인성문제로 보지 않는다. 그건 인간이 생존과정에서 몸으로 체득한 안전의 본능이 사회구조와 결합하여 만들어낸 역사적 결과라고 했다.

우리는 여전히 다른것을 틀림으로 받아들인다. 인간의 뇌는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구분하게 되고 익숙하지 않으면 이상하다고 하거나 틀렸다고 단정짓는다. 이러한 단순화된 사고는 편경을 만들고, 편견은 곧 차별의 언어로 변한다. 저자는 차별을 보이지 않는 폭력이라고 정의한다. 다르다고 하여 아예 배제해버리는 모습을 일컫는다. 자신과 다르면 중심에서 바깥으로 밀어낸다. 장애를 '비정상'으로 보는 시선이 대표적인 예이다. 인간의 다양성을 결핍으로 해석하면 그 사람은 평가의 대상이 된다. 누구든 알겠지만 인간의 삶의 모양은 모두 다르고 그 다름이 모여서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 정상이라는 기준은 누가 만든 것일까. 누군가가 임의로 만든 사회적인 합의일 뿐,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문제는 시대가 변해도 차별의 본질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지금은 장애를 넘어 ‘다른 생각’과 ‘다른 방식’을 가진 사람에게까지 편견이 확산되고 있다. 예전보다 장애 인식은 좋아졌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절반의 변화에 그쳤다고 봐야 한다. 인식의 절반만 바뀌었고,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벽 안에 갇혀 있다. 예컨대 자신이 사는 동네에 장애인 학교가 들어선다고 하면, 집값이 떨어질까 두려워 반대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이런 현실을 보면, 의식수준은 옛날과 다를 바가 없다. 겉으로는 다양성과 포용을 외치지만 실제 행동은 과거의 수준보다 더 못하는 게 사실이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개선이나 교통, 시설 접근성은 지하철만 되도 개선되지 않았고, 버스는 당연지사고 휠체어를 탄 이들이 지하철 한 칸 타기 위하여 싸워야 하는 현실은 수십년 째 제자리 걸음이다. 발전은 커녕 앞에서 말했듯이 퇴화된 느낌이 든다.

그 원인은 사회의 구조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태도에도 짙게 깔려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 기억이 나지 않아서 나노가족이라고 하겠다. 그렇게 바뀌며 사람들은 점점 개인의 울타리를 치기 시작했다. 개인주의는 솔직히 편하다 나만 생각하면 되니까. 누구를 신경쓰지 않으니 편하다. 하지만 동시에 타인을 이해하는데는 공감능력의 약화를 초래했다. 그래서 서로의 다름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자신이 다치지 않게 방어벽을 쌓다보니 다양성을 존중하다기 보다는 관심이 없고 피해야 할 불편함으로 인식된 것이 아닐까? 여러 다양한 모습에서 내가 볼때에도 불편한 모습이 있다. 하지만 어느정도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인정하고 받아들이려고 한다.

우리 사회의 복지는 '생활의 편의' 중심으로 머물러 있는데 이제는 '존중의 복지'로 나가야 한다. 다름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그런것을 가르쳐주는 학교나 기관이 있는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학교나 단체가 있는지 묻고 싶다. 나도 나와 조금 불편하다고 하면 외면한다. 하지만 그런 외면한 시선을 거두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나의 성숙을 위해서도 타인을 인정하면서 인간은 비로소 성숙해지기 때문이다.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삶의 태도라고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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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레시피 - 평범한 인생에 특별함을 더하신 은혜의 레시피 행전 간증의 재발견 10
민찬양 지음 / 세움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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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레시피_민찬양 #세움북스

평범한 인생속에 스며든 향기로운 은혜를 담은 책이다. 민찬양목사님은 단순히 말씀만 전하는 목회자가 아니라, 삶으로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직접 많은 대화를 나눈적은 없지만, 그를 떠올리면 인상이 좋고 따뜻한 이미지로 먼저 그려진다. 이웃을 돌보고, 포용력이 있으며, 자신이 가진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그의 삶은 이미 예수님을 그려내는 신앙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릴 적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부모님을 따라 기도원에 갔던 기억은 그의 신앙 여정의 시작이 되었고,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경험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의 삶이 하나님의 섬세한 레시피로 빚어지기 시작한 것은. 어린 나이인 스물여덟에 개척교회를 세운 그는, 믿음으로 걸어온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었음을 삶으로 증명해내고 있다.

P.232 사람에 대한 연민, 그 말씀을 마음 깊이 새깁니다. 사람에 대한 눈물과 삶에 대한 헤아림을 가진 목회자가 되고 싶습니다. 가슴에 눈물을 채운 사람이고 싶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이 조금씩 채워지고, 서로의 마음이 익어가는 삶. 그것은 기다림의 시간이고, 인내로 빚어진 사랑의 과정이었다. 민찬양 목사님의 교회는 바로 그런 기다림과 사랑이 공존하는 따뜻한 공동체다. 겉으로 화려하지 않지만, 그 안에는 서로를 챙기고 세워주는 진한 정이 흐른다. 신앙이란 단지 예배당 안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작은 나눔 속에서도 깊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교회다. 목사님은 언제나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이 어떻게 하면 더 자라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말씀과 기도뿐 아니라, 따뜻한 친교의 자리에서도 신앙의 성숙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식탁에서 나누는 짧은 대화, 서로의 고단한 하루를 위로하는 웃음 한마디가 그들에게는 예배의 또 다른 형태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모든 것을 쏟아가며 사역을 하실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온 마음을 다해 섬김을 실천하는 그분의 모습 속에는 예수님의 향한 사랑이 녹아 있었다. 그 헌신과 진심은 단순한 열심이 아니라,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다시 세상에 흘려보내는 믿음의 실천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숙연해지고, 신앙이란 결국 사랑으로 완성된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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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당신의 죽음을 허락합니다 - 이토록 멋진 작별의 방식, ‘간절한 죽음이라니!’
에리카 프라이지히 지음, 박민경 옮김, 최다혜 감수 / 스마트비즈니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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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당신의죽음을허락합니다_에리카프라이지히 #박민경옮김 #최다혜감수 #스마트비지니스 #이토록멋진작별의방식 #간절한죽음이라니

죽음을 허락한다는 제목을 보자 몇 년 전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서명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원래는 부모님도 함께 싸인을 하셨으면 했지만, 괜한 오해를 살까 싶어 나 혼자 조용히 싸인했다. 그때도 ‘죽음’이라는 단어는 그저 편하게 받아들였었는데 언제부턴가 낯설고 멀게 느껴졌고 왠지 피할 수 없는 숙제처럼 마음 한켠에 남아 있었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한동안 나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래서 외면하고 싶었다. 마음이 약해질 때면, 그래, 죽음이란 게 나에게 온다면 기꺼이 받아들여야지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막상 나이가 40 중반을 향해 가면서 그 다짐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P.86 살아갈 가치가 있는가, 병마와 고통을 견딜 수 있는가는 오롯이 환자 스스로만이 판단할 수 있으며 판단해야 한다. 다만, 나는 어떠한 대안이라도 있다면 환자에게 그 대안을 제시해 돕고 싶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병이나 사고로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죽음’이 더 이상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나 자신도 죽음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나는 그저 멀끔히, 자는 것처럼 조용히 죽고 싶다. 건강하게 살다가, 어디 아픈 곳 하나 없이 평온하게 눈을 감는 것.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죽음도 이와 같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나이가 들수록 크고 작은 병 하나쯤은 달고 살게 되고, 결국 그 병을 안은 채 치료에 매달리다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죽음’이라는 주제가 남의 일이 아니라, 언젠가 나의 문제로 다가옴을 실감한다. 요즘 사회에서는 ‘웰 다잉(Well-dying)’, 즉 ‘잘 죽는 법’과 ‘품위 있는 마지막’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정말 ‘웰 다잉’을 실현할 수 있을까? 아직은 어렵고, 여전히 멀게 느껴진다.

우리나라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제도는 죽음을 앞둔 이들이 불필요한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장치다. 이는 조력사망과는 완전히 다르다. 조력사망은 환자 본인이 스스로 약물을 복용해 생을 마감하는 행위를 뜻한다. 나는 안락사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조력사망이라는 개념은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그 취지가 이해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생명에 대한 존중과 인간의 고통 사이에서 복잡한 감정이 교차한다.

비록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고통을 겪는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만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한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도 타인의 고통을 대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각자가 자신의 삶과 마지막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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