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를위한공부머리문해력 #송숙희지음 #교보문고문해력은 문장이나 문단 글전체를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능력을 말한다. 장기간 꾸준히 학습하고 훈련하여야 한다. 문해력은 문장과 문단사이의 연결을 파악하는 영역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10대에 문해력을 파악해야 공부머리가 생긴다. 책읽기가 왜 필요하고 꾸준히 하는것은 문해력을 향상시키는데 필요하기에 한국대표 문해력 전문가 송숙희 코치가 나섰다. 우리아이만 해도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문장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문제를 풀어도 그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문제해결능력이 저하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생각을 잘 읽고 잘써야 한다. 문해력을 키우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읽기 쓰기가 되어야 한다. 전두엽기능이 활성화 되게 해야한다. 문해력의 특급비법은 읽고 쓰는 능력인 문해력을 키워야 한다.참으로 아쉽게도 아날로그식 공부는 서서히 줄여져가고 있다. 경기도권에서는 현재 디지털식 공부로 공부도 시험도 터치식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디지털식을 멀리하는 것은 현 AI시대에 참으로 어렵다. 하지만 디지털식으로 생활하려고 책도 전자책보다는 종이책을 선호하고 있다. 아이들에게도 조금은 소홀했던 책읽기도 해줘야겠다. 스스로 읽으려하지 않아서 아쉽긴 하지만 부모가 노력한만큼 아이는 자라기에 더욱 신경써서 아이가 책과 친해지도록 해야겠다. 공부머리를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순서는 집어넣기->정리하기->꺼내기로 머릿속에 있는것들을 꺼내어 정리하는 것이다. 읽기->생각하기->글쓰기로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나도 이렇게 훈련이 되었다면 조금 더 공부를 수월하게 할 수 있었을텐데 그런것이 아쉽기도 했다. 아이들도 커서 후회하게 하지 않으려면 문해력을 키워줘야겠다. 독해력과 문해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갑자기 잘하는 방법은 없다. 꾸준히 위에 세가지를 꾸준히 해보는 것이다.공신(공부의 신)이 하는 최고의 공부법은 배운것을 떠올려보며 써본다. 그리고 잘 모르는 부분은 표시한다. 떠올린것과 실제 배운내용을 비교하며 확인한다. 잘모르겠다고 표시한 빨간부분은 다시 공부한다. 촘촘히 꼼꼼히 하는 공부를 통하여 빠짐없이 배우는 것이다. 낸시 소머스는 "하루 10분이라도 매일 글을 써야 비로소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사람과의 대화도 이야기하다보면 나의 생각을 꺼내어 이야기하는것과 비슷한게 아닌가 유추해본다. 어휘력을 늘리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많이 꾸준히 읽는 수밖에 없다. 읽기, 쓰기, 생각하기로 공부가 쉬워지는 마법에 빠져보자.
#교회답지않아다투는우리 #홍동우지음 #지우 #다툼속에서교회다움을발견하다 교회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한다는 저자의 말에 적극 공감한다. 또다른 작은 사회인 교회내에서의 여러 갈등과 상황속에서 함께 나아갈 길을 찾는 책이라고 해야겠다. 저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신앙의 의미가 확다가왔다. 사람마다의 상황에 따라 신앙의 의미자체도 다르게 다가온다. 한 사람이 겪는 시기별 변동에 따라서 삶의 정황에 따라서 신앙의 의미도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나도 여러 상황을 맞딱드리면서 어떻게 지혜롭고 현명하게 상황을 대처해가며 함께 살아갈까 그리고 신앙을 키워갈까 생각하는데 나의 이전 신앙을 돌아보고 현재 신앙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나도 어릴적부터 여러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여러상황들을 많이도 접하게 되었다. 그건 누구나 그렇겠지만 어떤 상황에 놓였을때에 나는 과연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하고 있느냐 내가 나 자신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섣불리 일을 그르친 적은 없었나? 여기에서는 가상의 인물들이 나온다. 정말로 적나라하게 이야기에 몰입이 될만큼 어느 교회에나 있을법한 상황들이 만들어지는데 문제에 대한 대안을 주니 좋았다. 챕터마다 세 인물들이 나오는데 정말 교회에 가면 이런 사람 꼭 있다. 한때는 신앙의 모범생이지만 3년째 방황중인 30세 김호준군, 자수성가하여 성공한 사업가인데 자신의 달란트가 사용되길 바라는 53세 박세직집사, 교회의 모든일을 관여하며 교회중심에 있던 70세 현지우권사이다. 박세직집사는 담임목사가 교회내에서 주도권을 잡지않고 우유부단한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교회내에서는 회사처럼 사장이 지시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주도권을 잡고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양보, 배려, 협력하는 공존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바울이 말하는 '이신칭의'로 믿음을 통해 서로 화평을 이루는 것이다.P.166 십자가의 리더십은 리더가 갖추어야 할 기술이 아니라 삶에서 실천하는 삶의 태도이며 영성입니다.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삶의 태도, 약한 자들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시선을 낮출 수 있는 삶의 자세입니다.P.167 서로가 십자가를 통해 서로 다른 존재를 이해하고 하나되어가는 교회다운 교회를 꿈꿔봅니다.내가 어떤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에 대해 눈에 쌍심지을 켜고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기도하고 섣불리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의 어떤 행동하나가 분란이 되고 시험에 들게 할 수 있기에 다름을 인정하려 한다. 저자가 말하는 것에 매우 공감하는 것은 갈등을 해결하려고만 하기보다는 적절히 갈등을 관리해야하는 곳이 교회라는 곳이라고 했다. 자신의 주도권으로만 갈등을 해결하려 하지말고 각자의 '진심'을 갖고 '공존'해야 어떤 문제에 대해 직면할때에 '존중'하여 '그리스도의 몸다운 교회'를 세우도록 해야한다. 교회내에 있을법한 있는 사안들이 리얼하게 담아져 있어서 몰입도가 좋았다. 손재익목사님의 <분쟁하는 성도, 화평케 하는 복음>도 읽어봐야겠다. 나도 새로운 교회를 가고 그 안에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행동해야 하는가를 알게 되었다. 세 인물에 나의 모습도 보게 되었다.
#톨스토이단편선 #레프톨스토이지음 #김이랑옮김 #최경락그림 #시간과공간사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작을 이제야 접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사상가이자 문예 비평가이다. 피터박스올의 죽기전에 꼭 읽어야할 책 1001권중에 톨스토이의 작품도 들어가있다. 톨스토이라고 머릿속으로 그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덥수룩한 수염의 고뇌가 가득찬 표정의 얼굴을 하고 있는것이 익숙하다. 단편집의 느낌은 종교서를 보는 듯 복음서의 가르침과 닮아있다. 귀족출신인 그가 사회적약자나 고통받는 농민의 편에 서서 집필했으며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많은 고뇌를 했지만 과학, 철학, 예술에서도 해답을 찾지 못하고 마침내 종교에서 해답을 찾았다고 한다. 그래서 단편집이 복음서의 느낌이 물씬 났던 것이다. 톨스토이는 귀족출신이긴 했지만 절제와 간소한 생활을 하였으며 그 시대에 사람들은 '톨스토이 주의'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글과 삶이 일치하게 살아갔던 톨스토이는 저작권을 모두 포기하려 했었고 1891년 러시아 대기근때에는 가족과 국민들을 글로써 도우며 구호를 펼쳤다고 한다. 톨스토이의 단편이 7편 수록되어 있다. 내가 감명받은 단편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와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였다. 나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톨스토이의 글이 보기 편했다. 아무래도 내가 그리스도인이라 더욱 몰입이 좋았던 것 같기도 했다. 요새들어 삶에 대해 사람에 대해 머릿속이 복잡할때에 톨스토이가 사랑에 대한것이 무엇인지 일깨워주고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마침표를 찍어주었다. 하나님의 벌을 받아 내려 온 천사가 깨달았던 진리들을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내가 구둣방지기 세몬이었다면 천사에게 이것저것 많이도 물어봤을텐데 천사가 왜 벌거벗고 거리에 누워있었는가부터 치밀하게 물어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간혹 살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사람마다 각자 생각하는 결도 다르고 처리하는 것도 다르기 때문에 어떤게 답이라고 정해진 것은 없다고 느꼈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에서는 농부 파흠이 성실히 자기땅을 일구며 살아가는데 어떤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야하는가. 인간은 결국 욕망과 탐욕에 찌들면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며 죽음으로 치닫는지 알수있었다. 단편소설이 어렵지 않아서 아이들과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상끝작은독서모임 #프리다쉬베크지음 #심연희옮김 #열림원 스웨덴의 소설은 무언가 마음의 위로를 주고 여유가 깃든 작가의 글이었다고 해야할까. 말괄량이 삐삐로 인한 이미지로 발랄한 느낌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북유럽의 느낌이 책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하는게 맞을것이다. 스웨덴에서 12만부이상 판매 된 <템즈강의 작은서점>을 쓴 작가이며 어렸을때부터 베쉬크는 작가를 꿈꿔왔다. 사랑하는 동생이 갑자기 실종되어 계속 볼 수 없다면 무슨 느낌일까? 죽은지 산지 알 수 없는 채로 살아간다면 살아도 사는게 아닐 것이다. 어디있는지 행방을 모르는 동생의 목걸이가 퍼트리샤에게 왔다. 나도 이런 경험이 있었다.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1년뒤에 내 집으로 배송이 되어와서 너무 신기했다. 무슨일인가 싶을정도로 당황하기도 했다. 실종된 동생의 목걸이가 무려 30년 뒤에 되돌아왔다면 누가보낸 것일까 온갖 추측을 했지 않았을까. 어머니의 고향인 스웨덴의 세상 땅끝인 유세르에 지내게 된다. 연고지도 없는 곳에서의 독서모임은 소설을 읽고 느끼며 서로의 소통으로 위안과 안정을 찾는다.P.83 독서는 자신의 삶에서 몇 안되는 즐거움이었다. 현실이 괴로울 때마다 책이 위로하며 함께 있어 주었고, 그렇게 책을 읽는 동안에는 모든 문제에서 한발 물러날 수 있었다.P.393 우리는 모두 깨진 그릇같은 존재야. 미국에서 먼 이국땅 스웨덴에서의 유셰르에서 우연치 않게 묵게된 호텔의 주인장 모나가 하는 독서모임에 참석하게 된다. 주인장 모나, 도리스, 마리안네로 이루어진 작은규모의 독서모임이다. 외롭기도 하고 사라진 동생의 행방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일말의 기대로 참여하게 된 독서모임이다. 나이대가 비슷하고 공통되는 주제가 있어서인지 조금씩 그녀들은 사이가 가까워지게 된다. 독서모임으로 자연스럽게 서로 친밀해질것이다. 그러면 조금씩 서로 관심을 보이며 실종된 여동생 매를린의 소식을 듣지 않을까하는 기대와 함께 결속력있는 모임이 되어 서로에게 힘이 될것이다. 마음을 그릇에 채우고 또 채우지만 그 그릇은 금세 깨어지고 만다. 전에는 산산히 부서진 깨진 그릇을 이렇게 저렇게 다시 강력한 본드로 감쪽같이 붙여놓기도 했다. 부서진 그릇은 다시 붙여도 균열이 있게 마련이다. 산산히 부서진 그릇의 조각조각을 다시 찾아 붙일생각일랑 말고 나를 다시 채워 줄 크고 깊이가 있는 그릇으로 다시 채워보는 마음을 갖기로 했다. 깨진 그릇을 본드로 붙어 마음을 다시 들이붓는 것은 하지 않기로 했다. 새 그릇을 마련해도 다시 어딘가 그 그릇은 이빨이 나가고 다시금 깨지겠지만 그럴수록 다시 나는 새 그릇으로 사겠다. 인생의 고민을 갖고사는 나이가 있는 작은 독서모임에서의 사귐은 서로 위안과 위로를 얻는다. 과연 파트리샤는 여동생의 행방을 찾을 수 있을까.
#플라톤을찢고나온고흐 #조현철지음 #인문산책 #예술을탐한철학의추노 플라톤과 고흐의 상관관계가 있을까 싶지만 저자는 서양고전에서 고흐의 작품을 해석해보려했다. 철학을 통하여 예술을 탐닉하려한다. 현대미술을 들여다보면 저런건 나도 그리겠다라는 마음도 있는 반면(허나 나는 선하나 그리기도 후덜덜 그림도 못 그리는 사람임) 휘리릭 그려낸 솜씨에 작가의 내공이 담겨있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난해하면 난해할수록 작품을 만든 작가에 대한 프로필을 검색해보기도 한다. 작가의 삶에서 작품의 의도가 보이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에 말이다. 작가의 초기작품부터 마지막작품에 이르기까지 보다보면 작품이 가면갈수록 단순해지거나 난해해지기도 했다. 미술을 잘 알지 못하지만 처음 들여다볼때에는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만의 느낌으로 바라보니 새롭게 다가오기도 했다. 작품들의 서사는 작가의 생애를 바라보면 조금은 이해가 가기도 했다. 현대예술이 나오기전까지는 예술은 충실히 존재 Being를 표상하였으나 그 이후로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다른 기법들이 생겨났다. 사물을 그대로 그리는 것에서 사유하는 작품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현대미술을 이해하기에 앞서 신학과 철학이 어떻게 예술에 변화와 발전을 꾀하였는지를 알게되었다. 조금 더 심도있게 접근을 하니 몰랐던 작품이 보이기 시작했다.P.109 내가 저 수련을 어떻게 보았느냐, 저 해바라기가 내 눈에 어떻게 보이느냐, 더 나아가 내가 저 하늘을 보고 어떤 생각과 느낌이 들었느냐가 더 중요해진 것이다. 대상의 충실한 존재로 보았다가 철학과 신학이 융합되면서 이전 작품은 존재를 충실히 표현하여 그렸다면 그 이후론 작가가 느끼는 인물을 그리게 되었고 상상만으로 그려내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69)가 그린 그림은 지금 시대의 그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정도로 방대한 상상력을 그대로 화폭에 옮긴 시간여행자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작품을 바라보면서 예술의 변화된 곡점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어렵다고 느끼는 예술을 쉽게 풀어주었다. 인문학적 책읽기와 글쓰기로 단련된 그의 필력은 내가 미술을 바라보는 시각과 비슷하여 공감이 가기도 했다. 조금 더 미술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