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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ㅣ 시나리오픽션 1
안슬기 / 바이람북스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다음 생에 남자로 태어나고 싶으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이 세상은 남자로부터 요구하는 것이 너무도 많다. 맨몸으로 왔다가 맨몸으로 가는 이 서글픈 세상에 남자의 몸은 굴레 그 자체일것이다. 남자도 사람이건만, 그들은 마음놓고 울 자유도 없다. 약해질수도 없다. 아내가 귀여워도 드러내놓고 귀여워할 수도 없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들은 더 어깨가 무거워진다. 가장으로서의 책임이 그들로 하여금 숨 한번 제대로 쉴수 없게 보이지 않는 사슬로 묶어버릴것이 분명하니까. 나는 그래서 남자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 전혀.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수 있는지 그 끝의 한계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악마>라는 제목에서 보여지듯 한 남자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착한 남자를 악마로 만들어버린 어쩌면 우리들의 사는 모습과도 같을 강석규라는 한 남자를 어떤 시선으로 봐야할지 너무 착찹하다.
세사람이 있다. 남편 강석규, 아내 지수, 아들 훈.
석규는 자기자신의 초라함을 이겨내고 악마가 되어 하찮은 존재에서 거느리는 남자가 된다. 악마가 되어 사람들을 괴롭히고 밟고 올라가지만 괴롭히면서 희열을 느끼고 하찮은 존재에서 벗어난 자신의 모습과 악마로서의 모습에 혼란스러워한다. 사람들을 짓밟고 올라서야 하는 석규가 나쁜것은 아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나쁘게 보이겠지만 석규는 살기위해 몸부림 친것이다. 실적이 좋지않아 해고당할 위기에 놓이고 신혼때보다 못한 집으로 옮기게 될 정도로 살림이 궁핍해지면 누구나 그렇게 되지 않을까?
지수는 남편을 포기했었다. 사랑이 아닌 연민으로 결혼했지만, 너무나 능력이 없는 남편은 지수가 상상했었던 달콤한 결혼생활은 아니었다. 늘 생활고에 시달려 너무 힘들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변했다. 남편은 회사에서 어느덧 인정받는 위치까지 올랐지만, 그렇다고 집까지 부자가 된것은 아니었고, 회사에서 인정받을 위치까지 가기위해 가정을 방치하다시피 하여 부부사이의 대화는 단절된지 오래였다. 너무 힘들어서 누군가가 있다면 위로받고 싶어진다. 자꾸만.
훈은 아빠가 싫다. 저런 아빠는 없었으면 좋겠다.
두마리의 토끼를 잡기는 힘든 법이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다. 회사에서 능력받기 위해서라면 그만큼의 노력을 해야하고 그렇게 하자면 가정에 소홀해지기 쉽다. 못벌어 오면 못벌어 온다고 바가지를 긁고, 잘벌어오기위해 밤 늦도록 일하게 되면, 왜 가정에 소홀해지는거냐고 아빠자격도 없는 사람이라며 인신공격을 서슴치 않고 해대는 아내가 무서워 아무리 힘들어도 늦도록 술 한잔 마실 시간조차 없을 것이다. 하지만 능력이 있는 남자라고 해서 석규처럼 아내를 배신하는 일은 하지 않아야하지 않을까? 석규는 밖에서 힘들게 일하니까, 사회생활을 하는 남자라는 핑계로 문란하고 난잡한 생활을 해도 되는 타당성은 없다. 석규는 아내가 아닌 다른여자와 바람을 피워도 되고, 남편에게 지친 지수는 바람을 피우면 안되는 이유도 없다. 바람을 피운건 지수의 잘못이 아니다. 지수를 그렇게 만든건 남편이다. 아내와 자식에게 충분히 관심을 기울여줬다면 지수가 그런 선택을 했을리 없다. 돈 벌어오는 사람은 당연히 바람 피워도 되고, 주부는 바람피우면 안되라는 법이 어딨나. 모든것은 상대적이기 마련이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지수가 바람을 피우게 된것은 둘 모두의 잘못이고, 그런 선택을 하게 된 지수가 이해가 되는것은 왜 일까? 한가지 아쉬운 점은 지수가 아들 훈에게 아버지를 잘 못 인식시킨 점이다. 아무리 악마로 변한 석규이고, 아내인 자신의 눈엔 한없이 부족하고 마음에 들지 않을지언정 아들에게 만큼은 가정을 위해 밖에서 열심히 일하시느라 고생하시는 아버지라고 교육시켰어야 하지 않을까? 훈은 가정에 소홀한 아버지라며 단 한번의 따뜻한 말조차 건네지 않은 비정한 아들이다. 그런면에서 볼때 지수는 자신의 외로움과 아픔만 돌보느라 아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보는지 몰랐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자기자신의 아픔을 밖으로 표출해내어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에게 등돌리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지수는 그런면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
마지막 석규의 처절한 눈빛을 떠올리면 너무 마음 아프지만 악마에게 영혼을 판 댓가로 어쩌면 이미 일은 이렇게 될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다. 이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 악마가 될수 밖에 없었던 그는 잘못이 없다. 누구나 능력없고 힘없다고 석규처럼 악마로 변하지는 않지만 악마로 변하지 않기에는 석규는 너무 섬세한 남자였다. 악마가 된 그를 누가 탓할수 있을까. 그도 이 세상의 피해자인것을.
잔인함만으로 치자면 별 다섯도 부족할 지경이다. 왠만한 잔인함 정도는 영상이 아니라면 자신있게 볼수 있다고 자부해 왔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너무 눈살이 찌뿌려지는 잔혹함과 거친표현들때문에 한번에 읽을수가 없었다. 재미있는 내용임에는 분명하지만 자꾸만 한템포 쉬고 읽게되는 내 자신을 발견할수 있었다. 작가의 사진을 자꾸 쳐다보게 된다. 이렇게 순하게 생기신 분의 머릿속에서 이런 단어들이 나오다니 믿을수 없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하나씩의 악마를 품고 살아가는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머리를 끄덕일수 밖에 없다.
부쩍 40~50대의 사망이 늘었다는 뉴스가 종종 나오듯이 우리나라 현 가장의 실태를 아주 잘 표현한 책인것은 분명하다. 물질만능주의에 점점 악마가 될 수 밖에 없는 현실속에 한 가정이 철처히 파괴되어 버리고 결국에는 폐인이 되어버리는 현실을 꼬집는 소설이다. 석규의 몸이 대지에 녹아 스며들어 버리듯 어쩌면 그런 삶에 찌든 가장들은 머리카락 한올 조차도 이 더러운 세상에 남겨두고 싶지 않다는듯 생각되어 이 시대에 남자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것인지 다시한번 새삼 느끼게 된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을것이다. 더더욱 많은 악마들이 태어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위해선 어떤 노력을 서로 기울여야할지 깊이 생각해봄직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