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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평점 :
‘필립 로스‘라는 작가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이 작품만 놓고 본다면 내 영혼과 공명하는 작가임에 틀림없다. 워낙 와꾸가 마초적이라서 그렇지 알고 보면 한 섬세하는 양반이셨다.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들이 차고 넘치는데, 나한테는 로스가 다방면에서 가장 미국적이라고 느껴진달까. 콕 집어 설명은 못하겠는데 로스를 읽어본 분들은 대강 이해되리라고 본다. 그나저나 이분도 나이 좀 잡수시고 등단한 줄 알았더니 26세에 작가가 되셨더만? 이이한테 이상한 색안경이 가득한 건 나만 그런가 봉가.
<울분>은 약 50년의 작가 활동 중 거의 끝자락에 써낸 작품이다. 막상 열어보니 원숙한 맛은 전혀 없었고, 20대의 젊은 청년이 써 내려간 글처럼 혈기왕성한 에너지가 넘쳤다. 70대 중반의 어르신한테 이만한 젊은 감각이라니. 마치 Rock will never die? 뭐 그런 삘이었다. 정육점을 하는 유대인 가정에서 자란 마커스의 이야기. 자식이 대학 갈 나이가 돼가자 부친의 알 수 없는 과잉보호가 시작된다. 견디다 못한 마커스는 멀리 떨어진 대학교로 도피한 뒤, 한국 전쟁에 보내지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학업에 전념한다. 아니, 그럴 계획이었는데 룸메이트를 잘못 만나고, 꺼림직한 과거가 있는 여자와 사귀고, 학과장에게 이상한 놈 취급을 받는 등등 잠잠한 날이 하루도 없는 다이나믹 대학 생활이었다.
자타 공인 바른 청년으로 살아온 마커스는 이 모든 상황을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피해만 주는 룸메 때문에 방을 옮긴 것이 왜 자신의 부적응 탓이 되는가. 공부할 게 많아서 클럽에 들지 않겠다는데 어째서 별종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대체 아버지는 멀쩡히 커가는 자식을 왜 그리도 불안해하며 감싸고도는 건가. 나를 특별히 생각한다던 그녀가 왜 친구의 거시기를 탐내었는가. 또 학과장은 툭하면 불러다 놓고 프레임을 씌워대는가. 도대체들 왜왜왜? 어떤 목표를 향해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실패나 마찰이었다면 차라리 이해가 될 게다. 헌데 마커스를 괴롭히는 일들은 그의 잘못은커녕 개입한 적도 없었기에 더 억울할 따름이었다.
결국 클럽 학생들의 추악한 소동에 엮이고 마는 주인공. 유대인이면서 종교를 찾지 않은 벌을 받은 것일까. 이렇게 지지리도 재수 없는 인생에 당첨된 경우가 간혹 있다. 마커스가 그렇고, 나 또한 그러했다. 일탈 한번 없이 스탠더드하게 살아온 내게 하늘이 시험이라도 하듯 온갖 시련이 날아들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뭔 죄를 지었느냐는 말이 목젖까지 차올랐다. 도무지 모르겠어서 그냥 세상이 착실한 사람을 시기하는 거라고 치부해버렸다. 나도 그렇고, 마커스도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는 여친의 과거사를 감싸주려 했고, 어머니의 이혼 결심을 막아내었고, 괴짜 같은 학과장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이제 막 올라온 새내기인데 이만하면 백 점짜리 갓생이 아니고 뭐란 말이더냐.
작중에서는, 발을 조금만 잘못 디뎌도 비극의 낭떠러지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대답했다. 한마디로 까딱하면 나락 간다는 말인데, 그 경고장이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날라온다는 게 그야말로 난센스다. <울분>도 작가의 자전소설이라던데 어째서 로스는 펜 잡을 힘도 없는 나이가 돼서야 이런 케케묵은 이야기를 썼을까. 그만한 세월을 보내고서 겨우 깨달은 인생의 순리를 기록하고 싶었던 걸까. 가혹한 인생, 물이나 먹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