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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침묵했다 ㅣ 창비세계문학 69
하인리히 뵐 지음, 임홍배 옮김 / 창비 / 2019년 7월
평점 :
퇴근길에 접촉사고가 나서 이번 주 내내 병실에 입원해있었다. 당분간 통원치료 다닐 생각에 스트레스가 밀려든다. 어쩌다 병원을 가게 되면, 내 주변에 환자가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응급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생기 잃은 표정으로 침묵하고만 있는데, 단지 정숙해야만 하는 이유보다도 내가 뭘 어찌해볼 수 없다는 무력함 때문일 것이다. 그 고통이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간에. 아픔이 훑고 간 자리에 버려진 이들은 각자의 침묵 속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이 고비가 인생이라는 책의 한두 페이지일 뿐이며, 곧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거라고 속삭였다. 괜한 의미 부여와 감상적인 태도를 피하고자 읽은 책이 하필 핵노잼이라서 우울했지만, 지금 내 상황과 연관이 없지도 않은 듯하니 좋게 넘어가 준다.
<천사는 침묵했다>는 전후 문학, 그러니까 종전 후를 다루는 소설이다. 헌데 폐허의 묘사가 트라우마를 일으킨단 이유로 꽤 오랫동안 출간을 거절했다더라. 처참한 전쟁문학들은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는데 어째서 전후문학은 외면받아야 했을까나. 전쟁에 관련된 문학이 다 그렇듯 이 작품도 썩 친절한 편은 못된다. 병원서 남는 게 시간이라 제법 집중하며 읽었음에도 이해 안 되는 구간이 꽤 많았다. 하여 이번 리뷰도 망했다는 생각과 함께 해설자의 줄거리 요약이 어찌나 고맙던지. 226p의 ‘작품 줄거리‘를 먼저 읽고 시작하시길 추천해 드린다.
2차대전에 징집되었다가 돌아온 한스. 듣자 하니 탈영병인 자기 대신 어느 간부가 총살당했단다. 이후 검거 수색을 피해 다니다 홀로된 여인을 만나 동거하며 살아가는 주인공. 한편 찾아간 간부의 부인은 중병에 걸려 남편의 재산을 사회에 기부할 셈이고, 옆에서 이를 방해하는 피셔 박사의 음모가 드러난다. 알고 보니 추기경의 측근이며 나치의 끄나풀로 밝혀졌는데, 진정 사탄도 한 수 접는 인간성을 보여준다. 끝내 박사를 막지 못한 한스가 올려다 본 천사 석상이 침묵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자전소설답게 하인리히 뵐이 경험한 내용들이 잔뜩 녹아있는데, 아마 현실에서도 피셔 박사 같은 이들이 분명 있었을 걸로 추정된다. 폭파된 도시와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 얘긴 제외하고, 인간 말종인 피셔 박사가 있는 한 전쟁은 아직도 진행형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주인공이 계속 신분을 바꿔가며 연명하는 것 또한 같은 선상이고. 누군가는 종전으로 겨우 평화가 왔다지만 아무리 청소해 봐도 더럽기만 한 집구석과 다를 바 없는 현실이었다(15장). 그 가운데서 인류가 가질 희망이라면 단연코 사랑, 오직 그 하나뿐이었다. 요즘같이 남을 헐뜯고 혐오하는 세대들도 전쟁통에 홀로 떨어진다면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질 것이다. 혹여 당신이 생존에 능하대도 실속을 챙기는 사탄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고, 반대로 천사들은 침묵으로 일관할 테니까. 아이고, 전두엽이 안 돌아가서 더는 못쓰겠다. 화이자 맞았을 때가 딱 이랬었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좀 많이 걸릴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