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황금방울새 - 전2권
도나 타트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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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말에 코로나에 확진된 후 현재까지도 컨디션이 썩 좋지 못하다. 그래도 시간 지나면 나아지겠거니 하고 있는데 유독 찝찝한 것은 코로나가 뇌의 어딘가를 손상시켜서 회전이 둔해진다는 말 때문이었다. 그 말대로 현재 하는 일마다 버퍼링이 걸려 애매하게 고생 중이다. 아이씨, 여기서 머리가 더 나빠지면 어쩌란 말이냐. 당분간은 서평도 예전같은 탄력은 없을 것 같다. 사실 쉬는 동안 나의 글쓰기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좀 해봤다. 뭐 하러 글을 그렇게 아등바등 써야 하지? 내가 무슨 작가를 할 것도 아니고, 파워 블로거도 아니고, 내 필력이 대단한 것도 아닌데 말이지. 여러 가지 규칙 때문에 글쓰기가 버거울 때도 많았는데, 이제는 이것저것 재지 말고 가볍게 써 버릇 해야겠다.


도나 타트의 <황금방울새>를 드디어 읽었다. 퓰리처상 수상작이라는데 난 딱히 타이틀에 관심이 없다. 그저 엄청난 스릴러라는 소개 글 때문에 급관심이 생겼을 뿐. 두터운 분량답게 매우 더딘 전개였지만 읽기에 별 부담이 없었던 건 작가의 문체 덕분이었다. 읽는 내내 정유정 작가가 생각났다. 문장도 그렇고 캐릭터들도 그렇고, 뭐랄까 되게 중성적인 색채가 묻어난다. 특히 남성 작가들에겐 잘 없는 절제미가 장점인데 이게 반대로 단점이 되어 너무 지루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점만 빼면 별 만점 줘도 아깝지 않은 작품이다.


미술관 테러 사건으로 엄마는 죽고 아들 시오는 겨우 살아남는다. 곁에서 죽어가던 노인에게 부탁받은 황금방울새 그림 때문에 마음고생한다는 그런 내용이다. 그림을 경찰이나 관계자들에게 넘길 타이밍을 계속 놓치고, 도난당한 미술품 뉴스를 볼 때마다 소년은 심장이 철렁한다. 고아가 되어 친구네 집에 살게 된 시오는 그림을 넘겨줬던 노인의 집 주소인 골동품 가게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노인의 사업 파트너인 가구 수리상 아저씨와, 똑같은 테러 피해를 입은 소녀를 만난다. 이 두 사람은 시오 평생에 가장 소중한 인연으로 발전하고 그가 위태로울 때마다 지탱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조금씩 상처와 충격에서 회복되나 싶더니, 오래전 집 나갔던 아빠가 나타나 라스베이거스의 사막으로 시오를 데려간다. 아픔을 잊고 새 출발 하기에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데 이건 또 무슨 전개냐 싶지만 이제 시오를 본격적으로 망가뜨릴 보리스라는 친구가 등장한다. 이 친구에게 술, 담배, 마약 등등 온갖 안 좋은 것들을 배운 시오는 이전의 순수를 서서히 잃어버린다. 이때부터 시오가 자기 파괴적인 형태로 현실도피를 반복하게 된다. 테러 사건 이후로 소년의 많은 것들이 무너졌고, 앞으로도 더 나아질게 없음을 스스로도 잘 알기에 바르게 살려는 노력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거다. 도박중독인 아빠도 그렇고, 1급 문제아인 보리스도 그렇고, 폭력적인 보리스의 아빠도 그렇고 죄다 막장인생인데 멀쩡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한참 성장기에 있는 소년이 받은 막대한 영향들은 훗날에도 여러 가지로 고생하게 될 요인이 된다.


작가는 소년을 지독하게 굴려댄다. 이 정도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반박 불가이다. 그래서 연속된 불행이 가져다주는 재미보다는, 얼마나 더 상황이 나빠질지를 상상하며 읽게 된다. 시오에게는 어중간한 관계의 인맥이 없었다. 완전히 멀리해야 하거나 평생 가까이해야 할 타입뿐인데, 어린이의 눈높이에선 무엇을 쳐내야 할지 몰라 필요하다면 다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대놓고 피해를 주는데도 관계를 끊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건 언제라도 다시 버림받고 혼자가 될 자신의 처지를 잘 알기 때문. 하여 누구든 손만 내밀어 주면 그저 고마워서 진흙탕이라도 따라가고 만다. 술과 마약은 점점 소년의 총명함을 지우고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실제로도 이런 케이스들이 가장 안타깝더라고.


1권에서는 그림 때문에 안절부절하는 내용이 거의 없다. 순전히 시오 인생에 끼어든 불행을 주로 다룬다. 빚쟁이 아빠를 잡으러 다니는 채권자들을 피하다 교통사고로 죽어버리는 아빠. 아 정말 어린 나이에 인생 더럽게 꼬인다. 보고 있으면 숨이 턱 막히는데, 위에서 말했듯이 전개가 느린 편인데다 작가 특유의 절제미로 인해 갑갑함이 증폭된다. 그림만 들고 다시 뉴욕으로 튄 공황상태의 시오는 골동품 가게에 얹혀살면서 인생 2막을 시작한다. 아저씨에게 가게 일을 배우고 소녀와 친해지며 겨우 안정적인 삶으로 돌아가나 싶더니 엄청난 변수가 등장한다. 2권부터는 그림의 행방을 알고 있는 인물의 등장으로 간신히 멘탈을 부여잡는 시오의 나날을 다루고 있다. 리뷰가 길어져 2권 내용은 생략하지만 딱히 분석할 건더기도 없다. 실망스러운 두 가지. 그 인물이 그림의 비밀을 어떻게 알았는지도 설명이 없을뿐더러 결국엔 소리 없이 들어가 버린다. 또한 그토록 그림이 사라지길 염원했으면서 막상 없어지자 미친 듯이 찾으러 다니는 시오의 상반된 모습이 영 이해되지 않았다. 이 두 가지가 잘 나가던 작품을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다 평범한 결말을 맺게 한 요인이다. 엄밀히 보자면 이 작품도 용두사미 플롯이다.


무거운 서사에다 분량도 많고 삶과 죽음에 관한 철학도 종종 다루고 있어, 어떤 메시지나 주제를 담은 듯해 보이지만 의외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인과응보나 사필귀정도 아니고 심지어 권선징악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 생각대로 굴러가지 않는 게 인생이라는 걸 크게 확대해서 보여준다는 인상이랄까. 시오가 누구를 만나 어떤 길을 가든 지 간에 황금방울새의 그림에서 해방되어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결말은 있을 수 없다. 우리도 때로는 일이 안 풀릴 때보다 잘 풀려서 불안할 때가 있지 않나. 이처럼 누구나 지니고 있는 불안의 싹이 언제 꽃을 피울지 몰라 안절부절하는 게 인생인가 보다. 만개한 벚꽃잎이 우수수 떨어짐을 볼 때면 꼭 이렇게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게 된다. 휑하고 쓸쓸한 가을겨울보다 화창하고 청량한 봄여름이 더 슬픈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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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4-10 12: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뇌는 이상무 ! ㅎㅎ 물감님 글 마지막 문단 넘 좋은데요 *^^*

물감 2022-04-10 13:34   좋아요 2 | URL
정말요?ㅋㅋ 저 원래 글 하나 쓰는데 며칠 걸리는데 이번엔 금방 쓴거 거든요. 역시 강박을 버려야 하나봐요ㅋㅋㅋ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책읽는나무 2022-04-10 16: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 년 전 <황금방울새> 완전 몰입해서 읽었었는데 다 읽고 나니까 좀 허~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그래도 재밌게 읽었어요.
물감님의 리뷰도 재미나게 읽혀요^^
코로나 때문에 고생 많으시군요?
헬쓱해지셨겠어요. 이동욱 얼굴이 반쪽이 된 얼굴이 상상되어 지는군요.ㅜㅜ
잘 챙겨 드세요^^

물감 2022-04-10 17:01   좋아요 3 | URL
아무리 자도 개운하지가 않고 허~하네요ㅜㅜ 독서도 글쓰기도 집중이 잘 안되고요. 제가 유독 회복이 늦는거 같아요ㅋㅋ
재미는 있는데 이렇게까지 길어야 할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계속 들더라고요. 솔직히 결말은 쓰다가 막힌듯한 기분도 들고ㅋㅋㅋ 그래도 이 작가한테 관심이 생겨서 다른 작품도 읽어볼 생각입니다^^
빨리 나아야죠! 책나무님도 건강하세요🙂

새파랑 2022-04-10 16: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필력은 대단하신데 겸손하신거 같습니다~!! 저는 서평 까지는 아니고 독후감 쓰는건데도 어렵더라구요 😅 전 물감님 별 다섯개는 무조건 따라 읽겠습니다 ㅋ 건강 잘 챙기시길 바라겠습니다~!!

물감 2022-04-10 17:08   좋아요 2 | URL
에이, 제 글은 인기없어요. 그건 제가 잘 알고 있거든요. 저랑 유머코드 비슷한 몇몇분이 계실뿐ㅋㅋㅋㅋ저보다 새파랑님의 독후감이 훨씬 낫습니다^^ 아마 알라딘에서 인기로는 탑텐에 드실걸요ㅋㅋㅋ 새파랑님을 위해 별5개를 열심히 뒤적거려볼게요😎😎😎

coolcat329 2022-04-10 18: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머 물감님 걸리셨군요 ㅠㅠ 그래서 조용하셨군요. ㅠ 아직 완전히 회복 안되신거 같은데 빨리 나으시길 바랍니다.

물감님의 개성 넘치는 글 저는 늘 재미있게 읽으니 화이팅하세요~저는 물감님의 반만 써도 좋겠는데요...

도나 타트 ...저 아주 예전에 <비밀의 계절>이란 책 읽고 이해를 못했던 안좋은 기억이 있어요. 그래서 요 책도 알고는 있었는데 선뜻 손이 안가더라구요.
도나 타트 다시 도전해 보고 싶네요.

물감 2022-04-10 19:52   좋아요 1 | URL
네 한동안 요양하느라 활동이 뜸했어요, 그래서 일부러 두꺼운 책을 골랐고요ㅎㅎ 곧 나아지겠죠 모😁 쿨캣님도 글도 충분히 개성있어요! 글도 잘쓰시고요ㅎㅎㅎ
비밀의 계절은 난해한가 보네요? 기회되면 읽어보고 평가해보겠습니다~ 일단 문체는 합격이에요😀

잠자냥 2022-05-20 1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 물감님 저랑 비슷한 시기에 걸려버리셨었네요? 요즘은 회복 좀 되셨습니까? -몰아 읽기 뒷북 댓글 ㅎㅎㅎ-

물감 2022-05-20 15:11   좋아요 1 | URL
뒷북 읽고 댓글 환영이에요 ㅎㅎㅎ 코로나는 이제 다 나았지만 후유증이 있긴 해요. 피로감이 계속 떨어지지 않고 무기력 상태일 때가 너무 많아요 ㅠㅠ 처음엔 업무과다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거 같아요. 그냥 빨리 걸리고 회복하는게 낫겠다고 생각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안걸리는게 정답이었어요 아오 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