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실험대상 1 - 우리들에게 연애가 어려운 이유
윤대훈 지음 / 흐름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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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추겠노라고 다짐하며, <이성교제>수업 자료를 준비하려고 읽기 시작했는데, 21세기 한국판 리얼리즘 ‘사랑의 기술’이라고 칭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이성교제의 양성평등관부터 상대에 대한 존중, 그리고 연애 상대가 아니라 자신을 먼저 돌아보도록 하는 삽화들을 읽으면서, 저자가 과연 1987년생이 맞을까, 의구심마저 들었다. 

  이해하기 쉽게, 똑부러진 주관을 명석하게 드러내며  집필한 일관성은 <사랑의 기술>을 현실에 맞게 주석하고, 실용서로 새로이 각색했다고 해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듯하다.  이성에 대한 근거 없는 날조와 단견으로 얼룩진 이성관, 현실과 이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숙함, 채움과 구속의 강박증으로 치닫는 이성교제 현실. 도덕적이고 따분한 훈화만 되풀이하다가 끝나는 수업을 지양하기 위해, 어느 접점부터 더듬어야할지 고민했는데, 1권만 읽었을 뿐인데도 어느 정도 체기가 가라앉은 느낌이다. 2권도 기대된다.   

  연애론에 대한 저자의 책임감과 전문성(?)은, 스스로 꼭지로 선정한 제목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 같다.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 연애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어느 장을 펼쳐든 현실 세계의 연애임을 결코 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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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 2013-06-09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사아님
 
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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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앎을 공유하기 위해 누군가의 용기가 필요한 분야가 있다면, "법"은 단연 으뜸의 자리를 차지하고도 남는 것 같다. 법치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면서도, 법을 모른다는 선언이 오히려 덕망으로 추앙받는 현실, 그 안에서 법은 어느새 특정인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렸다. 법학을 전공했고, 짧지만 검사 생활을 했으며, 법학을 가르치는 교수로써, 최고의 법, 헌법을 최대한 가볍고 이해하기 편하도록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앎의 소유가 한정되고, 공유의 지경이 좁아질수록 특권은 더욱 드높아지고, 더없이 강력해질 수 있다는 상식, 그것을 깨기 위해 가장 필요한 덕목은 "용기". 이 책은  법과 그 안에서 특권을 누리는 법조인을 향한 이단 법조인의  "용기"에 관한 서술이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저자가 헌법 정신으로 꼽는 것은 단연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정의의 이름으로 아무렇지 않게 괴물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검찰,  수사 상황에서의 피의자 진술 거부권의 행사, 당연하게 여겨지는 차별과의 치열한 투쟁, 시대정신과 법정신의 구현, 그 안에서 변치 않고 도도히 흘러야할 제 1원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것이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헌법의 좌표가 이 선언과 함께 바로 눈앞으로 잡아당겨진 느낌마저 받았다. 원래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스스럼 없이 참고하고, 뒤적이고, 인용할 수 있는 헌법이어야 하는데, 누군가의 시선으로 재해석되고, 주석이 달리고, 정의되고, 한정된 잘려나간 헌법을 추앙하면서, 우리의 헌법을 그들의 헌법으로 떠넘기는 데 일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활자들은 뜨겁게 파고든다.  


  행정법 시간에, 법에 규정되지 않은 정의도 가능한가, 교수님이 물으셨던 기억이 난다. 짧은 질의였지만, 섬광처럼 날카로웠던 물음. 돌아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자세를 견지하는 한, 실정법에 규정되지 않았다고 해도, 얼마든지 용납할 수 있는 정의의 실현도 가능하다는 생각에 더욱 확신이 든다. 당연하다고 생각됐던 왕정정치를 깨고,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고, 심지어는 범죄자의 인권도 보호해야한다는 법정신의 구현, 결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들이대며 철옹성들을 부수고, 두드려대며 쌓아온 승리의 결과물 아닌가.  


  그러므로 법으로 지배되는 복잡한 사회 속에서, 인간의 진짜 인간됨을 복원하고, 인간다움을 실현하기 위해서, 앎의 경계를 허물고, 모두의 이해로 넓히려는 법학자의 용기있는 깨어있음이, 더욱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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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의 비밀 - EBS 다큐프라임, 타인을 움직이는 최상의 커뮤니케이션 전략 설득의 비밀
EBS 제작팀.김종명 엮음 / 쿠폰북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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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프라임 <설득의 비밀>편을 다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다행히 이 책을 통해 부족하지만 해소하게 됐다. 7:3의 법칙과 사실-데이터-정보-지식-지혜의 피라미드를 간과하며,  감성에 기댄 설득에 힘을 실어온 행보를 확인하게 된 것은  큰 수확. 설득의 유형을 분석하고, 대응 전략을 소개하면서, 설득의 실험을 통해 확증해나가는 과정은  흥미롭고 참신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설득의 비밀이라고 확신하기에는 여러 실험 여건이 미흡하고, 제시된 법칙이 다소 표면적이고 작위적인 느낌마저 든다. 오타도 눈에 띄는 것을 보면, 책으로서의 설득력은 사실 반감되는 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적 설득의 비밀을 탐색하고, 독립적으로 연구하고 실전에 적용하려는 움직임은 박수 받아 마땅하다. 그 어느 곳에서도 설득의 기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있는 우리 현실을 생각해볼 때, 깨지고 좌절하고 무너지는 이들이 있는 한, 설득의 비밀을 체계화하려는 노력은 분명 값진 도전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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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생명과 환경, 공동체적 삶 問 라이브러리 4
장회익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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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을, 현상으로서의 생명과 주체로서의 생명으로 구분한 점이 탁월하다.  '우주의 빈 공간 안에서, 생명현상이 주위의 아무런 도움 없이 자족적으로 지탱해나갈 수 있는 최소 여건을 갖춘 물질적 체계'를 온생명이라 할 때, 온생명 안에는 개체로서의 낱생명과 보생명이 포함되며, 현상으로서의 생명은 이 틀을 의미한다는 점, 그리고 주체로서의 생명을 고려할 때, 이미 우리 신체를 이루는 물질 속에는 이미 의지를 포함하는 주체적 의식을 가지도록 하는 준비가 되어 있어, 결국 나와 물질은 별개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의지와 주체를 자각하는 과정과 물질의 인과관계를 통해 나타나는 결과들을 이원론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 인식을 바탕으로, 나라는 주체가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공동체 주체로 승화되는 과정을 통해서만이 나의 확장이 가능하며, 온생명 사상을 덧입어 결국은 평화와 공존이 가능하다는 데까지 논리는 확대된다.  

     다만, 이상적인 공동체를 위하여 온생명 사상을 바탕으로 합의된 이념과 목표를 설정하고, 개체적 삶과 공동체적 삶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견 공감할 수 있으나, 생명을 이루는 물질 안에 이미 의지에 관한 주체 의식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을 대입해볼 때, 생의 의지를 확충하기 위한 방법론이라면 만들어진 그대로 자연스럽게 놔두는 것, 그것 말고 과연 어떤 방법으로 온전히 생명을 구현할 수 있을런지 의문스럽다. 이념, 목표, 체제 등은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생명의 틀 안에 존재해 있던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덧붙여진 것들 아닌가.  

   이상을 지향하자는 단순한 윤리적 구호가 아니라, 물리학적 관점에서 연구해볼 때, 저자는 "생명"은 나에서 머물러서는 안 되고 우리라는 확장된 틀로서만이 온전히 생명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으로,  내가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나이며, 내가 곧 우리이며, 우리가 곧 내가 되도록 구조화된 생명의 틀을 벗어나는 순간, 생명은 구현될 수 없고 유지될 수 없다는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그러므로  온생명 사상에 대립한 발전, 경쟁 따위의 논리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있는 그대로 둘 수 있는 용기, 존재 자체를 왜곡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관용, 나와 또 다른 나를 향한 사랑. 결국 인간됨의 회복 또는 인간 본성의 복구만이 생명을 지속적으로 환류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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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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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순간 좌파 기독교란 단어는 우리 사회에서 참 많이 낯설어졌다. 굳이 우파라는 말을 붙이지는 않더라도, 기독교는 우파의 상징인양 정형화되고 있다.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것은, 진보라면서도 자본주의 사회의 틀은 그대로 수렴하면서 조금씩 고쳐나갈 뿐이라고 믿는 개혁주의자들이라고 일갈하는 김규항. 독설가가 쓴 <예수전>이라니. 대표적인 좌파 논객이라고 불리우는 그가 만난 예수님은 누굴까.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실 때, 성경에 기술된 "측은히 여기시고"란 대목에 그는 집중한다. 설명을 들어보니, 원어로는 "애가 끊어진다"는 표현이며, 처음 만난 병자들을 보면서 "애가 끊어질 수 있는" 예수님이야말로 혁명가라는 것이다.

    영성 없는 혁명, 혁명 없는 영성을 논하며 닭의 목을 비틀 듯 어떤 망설임도 없이 위선을 뒤틀어버린다. 삶으로 보여주지 못하는 혁명, 사는 것이 되지 못하는 영성. 그 언저리에서 구호만큼 매력적인 것이 또 있을까.  잘 살고 있다고, 바른 방향으로 진리의 편에 서 있다며,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기는 얼마나 쉬운가. 이미 누릴 것을 누리면서, 배울 만큼 배운 지식으로 감동을 이야기하고, 미래를 그려나가는 교양인들에게, 어쩌면 위선의 몸짓과 언어인줄도 모르고 거칠 것 없이 질주하는 무심한 내 심연을 향해,  촉을 세워 그가 내던지는 한 마디..'측은히 여기시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오른 뺨을 때리는 자에게 왼쪽 뺨도 내밀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는, 인간 자존감의 회복까지 승화시키고 있다. 오른 뺨을 맞는다는 것은 상대가 손등으로 때렸다는 것이며, 왼쪽 뺨을 내민 것은, 비굴하게 여기도 때려달라거나 단순히 상대를 용서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맞는 나 역시 존엄한 인간이니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오른쪽 뺨을 손등으로 때릴 것이 아니라, 때리려거든 왼쪽 뺨을 때리라는 비폭력 저항 정신의 발로라는 것이다.

    죽기까지 각오하고 처자식과 재산을 버리고 떠난 제자들에게, 혁명의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는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웠으나, 도무지 이해 못할 역설의 십자가를 택하는 모습을 보면서 변화산에서 졸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스승의 행보를 마지막까지 인간적으로 존중하고 싶어 자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식의 상상력도 발휘한다. 부활 사건을 겪고 로마의 박해를 받은 후 쓴 복음서에 대해, 당시 시대적, 사회적 정황을 곁들여 세세히 분석하면서, 인간 예수에 대하여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했을런지, 저자는 철저하게 불의 언어로 되살려내고 있다. 이 책만큼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하는 책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예수님은 영성을 갖춘 진짜 혁명가의 삶을 사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불행한 시대와 억압받는 사회 속에서 한 인간으로써 철저히 주어진 삶을 사신 예수님을 만난 저자가,  왜 궁극적으로 불온한 좌파일 수밖에 없는지, 김규항의 다른 책은 읽지도 않았는데, 감이 온다. 돈과 명예와 기득권의 논리로 점철된 세상을 깨고 싶다며,  철저하게 세속의 논리로 다스려지는 세계의 심장을 겨누면서, 언제나 가지지 못한 자,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 곁에 섰던 살아있는 예수님을 만났는데,  좌측으로 걷지 않고 어떤 길을 갈 수 있을까, 저자는 많은 고민을 했을 것 같다. 영성에 관한 한 이 책만큼 도전이 되었던 책은 없었다. 혁명에 관한 한 이 책만큼 에둘러 말하지 않고 정곡을 겨누는 날카로운 책은 만나보지 못했다.  영성과 혁명의 두 이정표를 가지고 다시 복음서를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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